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11] 진정한 주체는 변하지 않는다 | 본질로서 살아가는 것

Buddhastudy 2024. 6. 12. 18:51

 

 

우리는 현상에 나는 알고 있다.

지금 현상에 나는 이렇게 있죠.

현상에 나는 이렇게 몸이 이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각되지요?

몸도 지각되고, 벽도 지각되고, 다 지각되잖아요.

이걸 현상이라는 걸 우리가 알고 살아요.

 

하지만 몸과 생각과 감정을 지각하는 주체에 대해서는

대개 모르고 살고 있다.

대상은 변하지만 지각하는 주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주체라는 말이

몸과 생각과 감정을 나라고 했던

그 나는 없기 때문에 무아예요.

근데 무아에서 끝이 아니고

그 무아임을 아는 주체는...

 

주체가 없으면 무아를 어떻게 알아요?

그렇지 않나요?

1시간 뒤로만 가봐도

지금 나의 육체와 감정과 생각은 다 꿈같구나.

근데 꿈 같구나하고 아는 것이 있잖아요.

그 아는 것은

지금 1시간 전의 것이 꿈 같구나하고 아는 거나

한 시간 뒤에 가서 지금을 보고 꿈 같구나하고 아는 것이

그거는 같아요? 틀려요?

거기에 착안을 한다. 이거예요.

그거는 변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변치 않는 그 본질의 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본질의 나를 혜능 대사는 자성이라고 부른다.

한자 성은 본질이라는 뜻이다.

본질의 나를 발견하는 것을 견성/

 

견은 발견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_ 발견, _ 본질을 발견한다.

본질은 무엇인가? 현상을 보고 아는 거다.

현상을 보고 현상이 사라지는 걸 아는 거다.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이라고 했죠.

제행무상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차원이 들어가 있어요.

-하나는 제행, 모든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들이 무상하다고 하는 차원이 하나 있고

여기 또 숨어 있는 건 뭐냐 하면

제행무상에는 어떤 차원이 숨어 있는가?

제행무상을 보는 차원이 숨어 있어요.

변하지 않는 것에서 봐야지 이걸 변한다고 보지.

변하는 거 안에서는 안 보여요.

 

그러니까 제행무상이라는 말 속에는

현상의 차원이 모든 것이 변한다는 말이지만

이 말을 하는 부처님의 입장은

변하지 않는 자리에서 이걸 보고 이 말을 하셨다, 이거예요.

그거를 열반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제행무상에 숨어 있는 것은 열반적정이에요.

제행무상이 제행무상이 되려면 반드시 열반적정에서 봐야지

이게 제행무상이 된다.

 

그래서 여러분, 제일 중요한 것은 견성이다 이거예요.

자성을 보는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순간에 자성의 기본 철칙이 있어요.

자성의 기본 철칙.

지금 여기 있어야 돼.

지금 여기에 반드시 있어야만 자성이에요.

그래야 나의 본질이야.

오케이, 맞습니까?

 

그러면 보세요. 확인해 보십시다.

지금 여기에 언제나 있어야 되는 것,

그것은 지금 이렇게 지금 앉아 계시죠?

앉아 계실 때 내 몸이 있다는 것은 지각이 되죠?

몸이 있다면 부정 못하잖아요. 몸이 있죠?

근데 몸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있다.

몸이 스스로 자기가 있다고 알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몸은 물질이니까.

몸은 물질이라서 몸이 스스로 자기가 있다고 알 수는 없다.

그러면 몸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몸이 있다는 걸 아는 것은 몸이 아니다.

여기까지 맞습니까?

 

그러면 몸이 있다는 걸 가만히 있어 보면

지금 이 순간 여기 있어야 돼요.

견성을 어떻게 하는가?

본질을 발견한다.

본질을 어떻게 발견하는가?

가만히 있어 본다.

가만히 있어 보면 몸이 이렇게 있다.

 

근데 몸이 있다는 걸 아는 것은

지금 뭔가가 있다.

몸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있다.

근데 이걸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면

여러분 뜻밖에도 중요하네요. 그죠

 

몸이 있죠.

여기에 몸만 있어요?

이게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이거를 의식이라고 부르건, 정신이라고 부르건

제가 여러분께 잘 드리는 말씀은

정신 나갔어요? 정신 있어요?” 하잖아요.

그럼 여러분 정신이 있다는 걸 느껴보세요.

정신 나간 사람?

정신 나갔지 않았죠? 정신 있죠?

[정신이 있다는 걸 느끼는 게 견성]이에요.

[정신이 있다는 그 느낌이 견성]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해드려야 돼.

방점을 찍으라고.

 

지금 몸이 있어요. 몸만 있느냐 이거예요.

몸이 있다. 몸만 있는가?

근데 여기에 몸이 아닌 정신 같은 게 있다. 이거예요.

신령스러운 정신 같은 게 있어서

이것은 형상은 없다.

 

형상이 있어요? 없어요?

일단 그전에 몸이 있다.

근데 몸만 있는가?

정신이 나갔나?

정신이 있다.

정신이 있다는 느낌이 있느냐 이거예요.

중요한 문제에요.

 

정신이 있다는 느낌이

지금 이렇게 있잖아요.

살아있는 거잖아요, 이렇게.

정신이 있다는 느낌

느낌은 있는 거죠.

그거다 이거예요.

여기 있지. 그거다, 이거예요.

그게 견성이다. 이거예요.

성품을 발견한 거잖아.

 

지금 이렇게 정신이 이렇게 있다. 이거예요.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정신이 내가 없애려고 해보세요.

정신 나가려고 해보세요.

 

안 되죠? 그게 증거다. 이거예요.

정신이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다.

그럼 이 정신이 지금 있죠?

1초 지났어요.

지금도 정신 있죠? 모션은 변해요.

그렇지만 이 정신은 이렇게 있고, 또 이렇게 있고, 또 이렇게 있어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은 계속

여러분들한테 어떻게 설명할까만 궁리하고 있어.

그래서 저한테 떠오는 단어 하나가 뭐냐 하면

제가 여러분한테 꼭 드리고 싶은 단어가 뭐였느냐 하면

[기본]이었어요.

베이직, 베이시스, 베이직,

기본이 정말 중요하구나.

 

허다한 말을 할 필요가 없이

매 수업 수업 기본을 강조하자.

[제일 기본은

언제 어디서나 정신이 이렇게 있다.

이게 자성이다.]

부처님이 샛별 보고 이거 깨달은 거다.

부처님께서 샛별 보고 이거 깨달은 거다.

 

지금 물질이 아닌 물질만 있는 게 아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이 의식이 있고

그리고 이 의식은 내가 의식이 필요 없으니까 좀 가줄래? 해도 안 가네.

 

그래서 기본은 가장 기본은

[각해]라고 할 수 있어요.

_ 지금 이 순간에 있는 이거

물질만 있는 게 아니고 지금 이렇게 깨어 있는 거

이걸 각이라고 불렀어요, 한자로는.

각의 바다

각이 이 세계를 지금 완전히 다 포용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작은 나에서 큰 나로 전환될 때

이런 피지컬 바디, 이모셔널 바디, 멘탈 바디 안에서 갇혀 있다가

이걸 툭 터져서 인두겁을 벗고 나왔다 이거죠.

나왔더니 이 전체가 다 의식의 바다더라. 각해.

 

각해라고 하는 말은 용성 스님의 저서에 각해라는 말

그런 책이 있어요.

깨달음의 바다.

 

깨달음은 거창하니까

깨어 있음의 바다

지금 이 의식의 바다

아는 그냥 [아는 것]이라고도 표현되고

그냥 [깨어 있는 것]

혹은 지금 하여튼 뭐가 있지 않나요?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렇게 깨어서 보고 듣고 다 하고 있는.

 

그러니까 정신 나가지 않았을 때.

여러분 이거 밖으로 나가보세요.

각해 밖으로 한번 나가보세요, 나갈 수 있는지.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그랬잖아요.

양자물리학자하고 잠깐 만나서, 잠깐 대화했을 때

다중우주가 있다

이해한다.”

장자만 해도 꿈을 우리가 꿈을 한두 번 꿉니까?

꿈마다 새로운 우주가 나오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얼마나 많은 꿈을 꿔요, 우리가.

그럼 이 생시뿐만 아니고

꿈 세계가 또 얼마나 많아요.

하나하나가 다 우주라고요.

그거 인정한다고. 오케이.

 

그런데 꿈을 꿨을 때 그 꿈이 어디서 펼쳐져요?

그러니까 지금 이 의식 속에서 어떤 꿈이라도 여기서 펼쳐지는 거죠.

그래서 이걸 바탕이라고 불러요.

바탕, 필드, 그라운드, 스페이스, 각해야, 바다야 바다.

 

그러니까 꿈을 꿔도 어떤 꿈을 꿔도 여기서 꾸는 거고

그리고 생시에 우리가 어디를 가도

여기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를 알아채면서 한 번 번쩍

그러네.”

그러면 보세요.

나만 그래요? 아니면 모든 사람이 그래요?

다 그렇죠

, 그러니까 딱 맞다고.

 

부처님께서 화엄경에서 깨닫고 보니까

이것을 모든 일체중생이 다 완벽하게 갖추고 있더라.

그래야 진리가 된다 이거예요. 그래야 진리다.

 

그리고 지금 내가 새로 얻은 거예요?

아니면 원래부터 있던 거예요?

이게 원래부터 있던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마조가

本有今有본유금유, 본래 있던 것이 지금도 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모든 것이 여기에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는 오고 감이 없어.

희한해요. 그죠?

 

여기에 나타나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콜할 수 있어.

여러분 댁,

여러분 댁 콜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어디 나타나고 있어요?

이제는 잘 알아들으시는데.ㅎㅎ

선생님이 참 이번에 장족의 발전을 지금 하고 계시네.

막 열려가시네.

 

한 생각을 일으키건, 어떤 감정을 일으키건, 뭘 하건 간에

여기서 일어난다.

인연 따라.

근데 일어난 것은 연연 따라 다시 또 사라지죠.

그리고 또 나죠.

 

그러니까 이것은 무한대의 샘과 같아.

무진장이라고 불러. 이거를 무진장.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보고 들은 기억이

꿈도 기억하고, 생시도 기억하는데

이 기억이 어디에 저장돼 있겠어요?

알고 보면 여기에 다 기억돼 있어요.

다 저장돼 있어.

그러니까 요즘 컴퓨터 용어로 쓰면 클라우드라 그래요.

클라우드에 우리가 자료를, 정보자료를 복원하잖아요.

그것처럼 얘가 클라우드에요

클라우드인데 어떤 클라우드냐?

무진장의 클라우드예요.

 

보르헤스라고 하는 작가가

<바벨의 도서관>이라고 하는 작품을 썼는데

무한대의 도서관, 바벨의 도서관 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게 대도서관이에요.

무한대의 도서관.

모든 인류의 모든 정보가 여기에 다 저장돼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용수보살이 화엄경을 용궁에 가서 꺼내왔다고 그러잖아요.

용궁이 어디냐 이거예요.

여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수많은 인류가 여기와 접속하면

수많은 정보를 또 시공을 넘어서 가져올 수 있다.

여기에는 시공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모든 과거 정보와 모든 미래 정보까지도

여기 다 있어요.

지금 우리가 굉장한 공부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모든 것의 단초는 기본.

기본은 각해

깨달음의 바다 속에 살고 있다, 이미.

 

지금 너무나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좀 감당이 안 되기는 해.

그렇지만 공부라고 하는 것은

계속 우리가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어마어마한 이 길이 새로 열린다.

그러니까 우리는 참 엄청난 지금 인연을 맞이하고 있는 거예요.

 

기존의 세계와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세계는

많이 다르죠, 그렇지 않습니까?

행운아죠.

 

이거 입장에서는 해도 한 바가 없다이래 되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내가 누구냐? 할 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당신이 고타마라고 하는 개인에서 벗어나서 붓다가 됐잖아요.

붓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붓다다 이거예요.

그러면 고타마냐? 붓다냐?에서

부처님은 붓다라 그래.

나를 고타마라고 부르지 말라.

붓다라고 불러라, 그랬잖아요. 부처님께서

 

그러니까 붓다라고 하는 말은

이거를 붓다라고 한다 이거예요.

이것을 법신불, 법의 몸을 가진 부처.

 

부처님이 깨달은 덕분에

부처님만 법신불이 아니라

우리들도 모두가 다 똑같이

우리들의 본래면목은 법신불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깨어 있는 우리들의 본질인 이것

지금 요거

이거는 본래부터 청정하다.

이것은 여기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에 물들어요? 들어요?

여기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에 물이 드냐? 안 드냐?

안 들죠.

진흙에 핀 연꽃처럼

진흙하고 같이는 있지만 물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본래 청정하다.

 

/우리의 본질인 의식은 현상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변함이 없다.

물들면 변하는데 물들지 않기 때문에 변함이 없다./

 

여러분 공성이라고 하는 말도 이해돼요?

이거를 지금 공성이라고 한다.

텅 비어 있으니까.

그리고 각성

깨어 있는, 깨어서 아는 성질도 가지고 있다.

 

/보리자성 본래청정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마음공부의 방향이 달라진다.

마음공부의 목표는

본질을 깨닫고 본질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본질을 깨닫는 것이 견성

본질로써 살아가는 성불

 

여러분 오늘 조금 감이 옵니까?

근데 재밌게도 이 말이 갈수록 이렇게 젖어드는 것 같아.

제가 지금 느끼거든요.

여기 처음 오신 분들은 약간 긴가민가 하셨다가

좀 연수가 좀 묵으면

이제는 이게 젖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져요.

 

그러니까 본질을 깨닫는다.

그런데 본질로서 살아가는 것은 조금 시간이 걸려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주 간단하게

본질로서 산다이 말은 뭐냐 하면

간단하게 말하면

본질은 불이법이에요.

나누어지지 않는 거예요. 본질은.

이걸 어떻게 나누어요?

허공 같은 이걸 나눌 수 없죠.

 

그런데 보세요.

현상은 전부 나누어지는 것들이에요.

컵이다 그러면

컵하고 컵 아닌 거 하고 나누어지기 때문에 컵이다 하잖아요.

근데 이거는 나눠지지 않죠.

 

근데 우리는 현상을 컵이다, 카메라다, 나다 하는 것은 익숙해 있어.

이분법의 분별에는 익숙해 있어요.

그리고 불이법에 무분별 후덕지 쪽은

무분별의 뒤에 쪽에는 아직까지 우리가 낯설어 있어요.

 

그러니까 익어 있는 분별을 죽여가고

낯설어 있는 이 본질의 세계를

계속 익어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이 말도 이해되죠?

 

그래서 공부는 두 단계예요.

하나는 본질을 깨닫고

두 번째는 본질로서 살아가는 것.

 

근데 본질로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법회하는 거예요.

계속계속 만나서 다지고다지고

같은 말이라도 다질 때마다 내가 느끼는 체감은 달라요.

그래서 계속 체감을 길러가는 것

이게 본질로서 살아가는 방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