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13] 믿고 맡기고 쉰다 타고 있는 소를 보라

Buddhastudy 2024. 6. 20. 18:28

 

 

다시 한 번 봅니다.

/자나 깨나 한결같이 작용하는 평상심이 바로 부처/

 

평상심은 평상 의식이에요.

평상 의식, 보편의식

 

 

/이것이 바로 부처라는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면

당장 모든 방황과 어리석게 치달려 구하는 치구심이 멎을 것이다.

이것이 가장 빠른 구원의 길이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이렇게 썼잖아요.

자성에 맡기고 쉰다.

오염의 정화 방법인 거예요.

오염을 정화하는 방법.

 

사실은 어떤 의미로는

깨달음은 누구나 다 깨달아 있기 때문에

정말 더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음을 확인하는 순간

맡기고 쉬는 것.

그래서 나의 현장에서의 오염.

 

우리 본질은 청정하지만

현상에서는 누구나 다 나름대로 업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인정하시겠습니까?

인정하지요.

 

문제는 그 카르마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 카르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카르마를 본질을 믿고 맡겨서 쉬는 것이

카르마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그랬죠.

바보야, 문제는 치구심이야

치달려 구하는 마음이야.

 

그래서 자기 마음이 이미 갖춰져 있는데

치달려 구하는 이 어리석음을 보고 멈춰야 한다.

멈춘다, Be Still, 멈출 .

지난 시간에 설명한 거예요.

그러니까 멈춘다.

믿고 맡기고 멈춘다.

 

그러면 멈추면 어떻게 되느냐?

멈추면 본질하고 하나가 돼요.

멈추면 본질하고 자동적으로 하나가 돼요.

구하기 때문에 본질을 등지는 거예요.

구하기 때문에 본질을 등지고 집을 나가는 거고,

멈추면 그 자리가 집이에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치부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뭐죠?

이유가 뭐죠?

욕심과 집착이에요.

욕심과 집착.

 

그러면 욕심과 집착이 왜 생길까요?

자기도 모르게 구한다, 치달려 구한다.

왜냐?

욕망과 집착 때문에

갈애라고 하죠, 갈애.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에

 

그럼 왜 갈애를 할까?

무명, 어리석음 때문에.

 

왜 어리석어졌을까요?

우리가 속아 왔기 때문이에요.

무엇에 속았는가?

부처님께서 부처님은 오도송이 있어요.

부처님이 깨닫고 하신 게송이 있어요.

 

부처님 오도송은 이렇게 돼요.

나는 너를 보았다, 집 짓는 자여.

너가 나를 지금까지 속였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왜 무명, 어리석음이 왜 생겼는가?

속았다.

무엇에 속았는가?

집을 짓는 자에게.

 

이때 집이 이상이에요, 이상.

우리 나름대로 자기도 모르게 어떤 이상을 세우고

그걸 향하여 내 인생을,

이상을 실현하는 대로 가는 게

보람 있는, 의미 있는, 존재 가치가 있는 인생이다 라고 하는

그 사회 체제 속에서 우리가 속아 살아왔어요.

 

그러니까 집을 짓는 자여

이 현상을 가지고 이상을 만들고

그 이상을 향하여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함으로써

자기 존재가 가치가 있어진다고 하는 그 착각

거기에 속았던 거예요.

 

그래서 참 이게

우리가 왜 집착하고 욕망하는가?

이상에 속아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지금 고생을 하고 있다.

 

그러면 자기 이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근데 이상을 향하여 추구하면 할수록 본질을 등지게 되죠.

그렇지 않나요?

 

진짜 깨달음이라는 것은, 진짜 이상은

본질이 진짜 이상이에요.

근데 진짜 이상은 밖에 있어요? 자기한테 있어요?

자기한테 있잖아요.

그러니까 깨닫게 되면

더 이상은 이상에 속지 않는다, 이거예요.

나는 너를 보았다, 집 짓는 자여

너가 나를 속였구나.”

 

그러니까 참 희한하게 여러분

우리는 이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평생 속아 살아왔어요.

사회의 공업

항상 경쟁해야 되고, 남보다 이겨야 되고

이런 이런 가치들 있잖아요.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머리에 박혔다.

그걸 향해서 살았다, 목숨 걸었잖아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무명에 걸려들고, 어리석음이 걸려들고, 집착하게 되고

그리고 치달려고 하는 마음이 쉬지를 못하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 이거예요.

 

그러면 모든 이상을 내려놓아라.

이상을 내려놓아라.

그러니까 참 부처님의 이상도 그런 거였겠지.

어떤 깊은 선정 가서

뭔가 아무도 이르지 못한, 어떤 깊은 선정 경지

그런 걸 이상으로 삼으셨겠지, 부처님도.

근데 깨닫고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이거죠.

 

그래서 나는 너를 보았다

참 좋은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속에 지금까지 나를 속여온 이상을 보는 거

굉장히 중요한 공부예요.

설마 문제가 나한테 있을까

이걸 못 돌아보는 거예요.

 

나는 너를 보았다. 집 짓는 자여할 때

이상을 만든 자

조리적으로 말하면 마왕, 마군이 되겠지.

그렇지만 이렇게 인문학적으로 풀어보면

이상에 속는다이거예요. 우리가.

이상에 속아서 그걸 잣대로 삼아서

현실을 재단해서 모자라니까 욕망하는 거죠.

그리고 가진 거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그 욕망과 두려움이 핵심이거든요.

그것이 전부 다 이상에서 나와요.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다만 본질인 이 의식을 쓰면서 살아간다.

선사들은 이 의식을 살림살이라고 불렀다./

 

이걸 쓰고 살기 때문에 살림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일거수일투족 하는 것이 의식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Now life is living you 하잖아요.

이 순간 생명이 당신을 살고 있다.

이때 생명 대신에 의식을 넣으면

[지금 이 순간, 본질인 의식이, 당신을 통해서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닫는 거는 뭐냐 하면

깨닫는 그 포인트는, 힌트는 작용이에요.

자기 작용을 보면 돼.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데

어떤 분은 그렇게 깨달았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이 뭐꼬?’ 화두를 들고

이 송장 끌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가?’

이 화두를 들었대요.

그래서 이분이 결심했대.

딱 저녁 먹고, 저녁 참전 들어가면서 밤이 기니까

아침 해가 뜨기까지 나는 반드시 깨닫겠다해서

이 송장 끌고 다니는 이 놈이 뭐꼬?’ 하고

계속 추구에 들어간 거예요.

 

근데 1시간 2시간 너무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까

스스로 지쳐서 새벽 23시 가니까

벌써 상당한 시간을 집중했잖아요.

그래서 스스로 나가 떨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해도 안 돼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못 찾겠어.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있긴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못 찾겠어.

그래서 하다 하다가 안 돼서 지쳐서 그냥 이걸 다리를 풀었대요.

풀고 그냥 넋 놓고 그냥 아무래도 안 되니까

이렇게 안 되나, 나는 이렇게 의지가 약한가하면서 한탄하면서

가만히 그냥 풀고 내버려 뒀대요.

근데 포기했는데

아침에 종소리가 하고 오더래요.

앉아 있는데 종소리가 하고 오니까

지금 종소리 듣고 있는 걸 하고 있어요? 안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듣고 있네.” 이렇게 된 거예요.

듣고 있네. 작용하네

작용이 힌트라고, 작용이.

 

, 듣고 있네하고 이 사람이 불현듯 탁 이렇게 소식이 왔어.

그리고 돌아봤어요.

그러면 왜 이걸 내가 지금 깨닫지?” 하고 돌아봤더니

그 몇 시간 내내 찾았기 때문에 작용은 이걸 놓쳤다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찾는 그 놈이더라.

결국에는 찾는 그놈이 안 찾으니까 듣더라 이거예요.

복기를 해보니까

매 순간순간 찾고 있는 작용을 했고

작용이 힌트

작용이 매 순간순간 찾았고

안 찾았더니 듣더라 이거예요.

 

살림살이

모든 인간이 이걸 가지고 살아야.

그러니까 이 순간에도 이거를 쓰고 산다.

어떻게 쓰는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또 뭘 하게 되면 하고, 찾으려면 찾고

찾는 그놈이다. 이거예요.

작용에 있다.

도는 작용에 있다이런 말도 많이 이야기를 해요.

현성공안(그 궁극적인 진리가 이 현실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이다.

진리는 눈앞에서

현성_ 이루어지고 있다.

현성공안이다.

항상 진리는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떻게?

작용으로

작용으로 이렇게 이루어지는 이거

그래서 이것이 지금 살림살이의 뜻이에요.

모든 인간은 이걸 가지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런다니까 심심하면

뭐지?” 해본다니까요.

뭐지?” 하면 뭐지 하는 놈이야

이렇게 확인한다고요.

작용을 가지고 확인한다고

 

가만히 있으면

보고, 들리고 다 하잖아요.

이것이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작용해서 확인한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하다 보면

계속 작용하는 그 순간에

한 번 딱, 한 번 이렇게 계합이 되는 날이 온다.

그러니까 미루지 말고 하여튼 작용에 있다.

작용의 힌트다.

 

제가 지난 시간에 그랬잖아요.

아버지 뭐 하시노?” 지난주에 그랬잖아요.

불성이 지금 뭐 하시노?”

 

아니 설거지하고 있으면 설거지하는 놈이지.

그러니까 이걸 그걸 찾으러 그렇게 돌아다녔다 이거예요.

그렇게 돌아다녔다.

그 시가 기억나네요.

 

봄을 찾으러 온 산천을 돌아다녔는데

못 찾고 돌아왔더니

뜻밖에 집 앞에 집 마당에 매화꽃이 피었더라.

그런 시가 있잖아요.

 

찾는 놈이기 때문에 못 찾아.

그러니까 온 천지 사방을 찾아다녔는데 못 찾다가

돌아와 보니까

자기 집 마당에 매화꽃이 피어 있더라.

 

그러니까 지금 이거예요.

지금 이거라고.

 

그러니까 이런 말을 계속 듣다가

한 번 이렇게 탁 돌이킴이 와서

이거네그러면서

이거네지금

지금 하다 하다 포기했을 때 이거네

종소리가 쿵 오니까

이거네이렇게 깨달았다 이거예요.

 

...

 

때때로 느낀다고 그러잖아요.

때때로 느끼는 그거라고.

그런데 그걸 스스로 납득을 못하고

뭐가 있을 거라고 그 치구심 때문에

이상에 속아서

자기가 이상에 속고 있다는 걸 봐야 돼요.

이상에 속고 있다는 걸 봐야 돼.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그걸 깨주는 거예요.

이거다라고 딱 이야기를 해 주잖아요.

살림살이

 

/인생이란 다만 이 의식을 쓰는 것일 뿐이다.

부처도 예수도 우리도 모두 똑같다.

갓난아기도 잼잼, 곤지곤지, 도리도리 하는 것/

 

제가 배운 거예요, 그분한테서.

갓난아기도 잼잼, 곤지곤지 도리도리 하는 거 그거예요.

갓난아기한테도 있는 거

어른하고 갓난아기가 현상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지금 작용하는 의식

이 말도 들어옵니까?

지금 작용하는 의식이것이 존재의 본질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육조 스님 이후에

조계종이 중국, 한국, 일본을 완전히 석권해요.

육조 이후에 동양에서 그 문화를, 정신문화를 육조의 가르침이

조계 종지가 완전히 석권해요.

저는 갈수록 많이 느껴요.

중국에도 엄청난 영향이고, 한국도 엄청난 영향이고, 일본도 뭐 그냥 이거고.

 

그러니까 왜 이렇게 되었는가?

육조스님의 이 확신 때문에 확신

이거다라고 방점을 찍어놨기 때문에

보리자성이 본래 청정하다

단용차심이다.

다만 이 마음 작용밖에 없다.

무엇이 일어나도 이 마음 작용밖에 없다.

 

그러니까 참, 이 의식의 작용, 지금 작용하는 의식

이것이 존재의 본질이다라고

육조스님이 점을 딱

이렇게 육조단경에서

 

그러니까 팔만대장경 중에

모든 조사 의록은 록인데, 마조록 임재록 록인데

스님 말은 육조록이 아니고

단경경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여기 있다 이거예요.

그 이후로 그냥 꽃이 피어버렸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말씀하셨듯이

이거 알고 나면 이거 진짜 옛날부터 있던 거예요.

틈틈이 느꼈어.

이렇게 지금 살아있는 이거, 거 이건데

살아있는 이거, 이거를 옛날에도 느꼈는데 하고

지나가 버리는 걸

육조스님이

그거지 더 이상 없다. 본질은 그거다.

그 본질의 힘으로 현상을 정화하는 것만 하면 된다.

본질을 빨리 깨달아라.

그 본질의 힘을 가지고 현상은 본질에 따라서 맡기면 된다.”

이렇게 가르친 것이 육조 스님의 지금 가르침입니다.

 

본질을 깨닫는 것은 미루지 말자.’

지금 하품하는 그거

때 돼서 하품하시는

지금 끄덕끄덕하시는 그거

알고 보면 모든 거다. 모든 거다.

 

/이미 자기인데 자기가 자기를 찾고 있다.

찾는 그것이 바로 자기다./

 

여기서 끝냅시다, 그냥.

찾는 그것이 자기에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속인다니까.

찾으라고 한다니까.

찾으라고, 쉽게 찾으라고.

그리고 깨달으라고, 찾는 그것이라고.

찾는 그것이 자기에요. 그렇잖아요, 이치가.

 

근데 지금 하여튼

이상에 속아 있는 게 문제예요.

여러분 자기를 돌아보세요.

나는 어떤 이상에 홀려서 살았는가?

어떤 이상에 속아 살아왔는가?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거예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이 말은

부처가 이상이 되면 그 이상은 죽여라, 이 말이에요.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스승이 이상이 되면

나도 저 분처럼 되어야지 하면 이상이다 이거야.

자기 거를 놓치고

나도 저분처럼 되어야지하면

그 저분을 죽여라는 거예요.

 

그러고 살았는데

지금까지 항상 누군가를 닮으려고 했잖아요.

근데 이거다 이거지

내가 부처지 따로 부처가 없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깨달음이 일어난다./

 

복기할 때 깨닫는다. 이거야.

복기한다.

뭘 잘못했는가를 돌아봤을 때 깨달음이 일어난다.

 

/그동안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자기를 찾았기 때문에

자기를 못 만난 것이다.

찾는 그놈이 자기 이이며 본질이다.

그러니 당장 찾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멈출 지자가 수행의 핵심이다.

그 반대말은 치달려 구하는 마음

즉 치구심이니다./

 

치자에는 말 마자 있죠.

말처럼 달려서 구한다. 이 말이에요.

멈출 지자의 반대말이 치구

치달려 구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못 깨닫는다.

 

여러분, 여러분이 애쓰지 않아도

자기 부처가 자동적으로 보고

애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자기 부처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다.

자동적으로 숨 쉬고 작용하고 있다.

 

/밖으로 찾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있어 보면

자기가 이 순간에도 살아서 완벽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아까 그분처럼

찾을 때는 못 찾겠더니

포기하고 넋 놓고 가만히 그냥 앉아 있는데

하니까

어 듣는 놈하고 발견했다. 이거예요.

 

찾을 때는 못 찾았는데 내려놓았더니

그냥 온통 이것뿐이더라.

온통 이것뿐이다, 이거예요.

이걸 찾아서 지금 그르쳤던 거다.

 

 

/그래서 자기를 믿고 쉬면

곧 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

멈추면 편안해지고, 편안해지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밝아온다.

그리고 깨달음이 온다.

그것이 견성이다/

 

다시

멈추면 편안해지고

편안해지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밝아오면서 깨달음이 온다.

그것이 견성이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는 거예요.

소 타고 소를 찾는다는 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답변이

너가 지금 찾는 소는 관두고

타고 있는 소를 봐라.”

 

다시

너가 지금 찾는 소는 관두고 타고 있는 소를 봐라.”

타고 있는 소는 뭐냐 하면

찾고 있는 그놈이 타고 있는 소예요.

지금 작용하는 소.

이 순간 작용하는 거.

 

지금 이 순간 작용하는 거 하면

여러분이 불꽃이 탁 튀어야 돼.

이 순간 작용하는 거

지금 이 순간 작용하는 거

이거 이상 없다 이거예요.

 

근데 너무나 자비로운 가르침은 뭐냐?

진짜 선지식은

앞에서 육조 스님이

당신이 선지식인데 올라와서 밑에 청중들한테

선지식 들이시오이렇게 했잖아요.

 

육조 스님 눈에는 무엇이 선지식인가?

자성이 선지식이다.

그러면 육조 스님은 부처 눈이니까

부처 눈에는 다 자성이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아니 멀뚱멀뚱 뜨고 있는 그것이 다 자성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거 보고

선지식들이여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진정한 스승은 진정한 선지식은

자기 자성이에요.

그 자성을 믿고, 선지식을 믿고 거기에 내려놓는다. 쉰다

그러면 소식이 온다.

 

멈추면 편안해진다.

편안해지면 고요해진다.

고요해지면 밝아진다.

밝아지면 견성의 소식이 온다.

 

이거니까

여러분 지금 이거예요.

지금 이거예요.

 

그래서 이심전심이에요.

지금 이거

이심전심

 

그러니까 참 공부가 아주 간단 명료하게 돌아오는 게

육조단경의 공부예요.

그래서 이게 경이에요.

 

하여튼 저는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 책 볼 거 없는 것 같아.

그냥 단경 하나를 착실하게 읽는 것.

 

그리고 여러 말 할 거 없어.

기본을 계속 반복해서 다지는 것.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기본을 다지고 다지고 다져서

이심전심으로 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