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설법
사람이 하는 설법은 유정설법이에요.
근데 지금 이 자리를 알아챈 사람한테는
모든 것이 설법하고 있어.
뭐냐 하면
그것이 나타난 그 공간, 지금 한바탕이에요.
별이 나타난 자리를 보는 순간
한바탕인, 통으로 하나인 이거를 깨달아버린다.
이해되세요?
‘별을 보고 깨닫는다’ 이 말은
별을 보고 별이 나타난 그 공간을 깨닫는 순간
자기 의식이 완전히 모든 걸 다 채우고 있고
이 의식 공간에는 시간이 있어요? 없어요?
여기는 시간도 없고 뭐 동서남북도 없고, 통으로 하나니까.
그리고 이 통으로 하나 속에
몸뚱이가 걸어가면
인연 따라 이러한 저런 것들이 온갖 것들이 보인다 이거예요.
그러면 나타난 모든 것이
이 하나가 아미타불이라고 한다면
나타난 모든 것은 아미타불의 나툼이다, 이 말 이해되세요?
‘무정 설법을 들을 줄 아는 자는
아미타불을 본다’ 이 말도 이해되세요?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
약견, 약견 만약에 본다.
제상, 제상은 무정물, 무정물을 보고
약견 제상, 모든 구름이든, 뭐 나뭇잎이건, 굴러가는 무슨 돌맹이건, 이걸 보고
그것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이 자리에 인연 따라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을
약견제상,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을 보고
그 모양이 있는 것이 비상
비상, 모양 없는 것
안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면
즉견여래, 모양이 나타나거나 모양이 없는 거나 통으로 하나인 여래.
이게 여래다 이거예요.
모양이 텅 빈 본질이 이 순간.
본질하고 현상이 따로 있는 거 아니에요?
그냥 통으로 하나의 공간 안에
생각도 인연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거다. 이거예요.
오케이?
그래서 이게 왜 중요하냐면
보통은 본질이 있고 현상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본질 안에 현상이 나타나서
본질하고 현상을 뗄 수가 없어.
색하고 공을, 색이 있고 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공 안에 색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어서
공하고 색을 뗄 수가 없다, 이거예요.
하나의 수정체 속에 보여지는 이미지들이기 때문에
수정체 자체하고 거기에 나타난 이미지하고 뗄 수가 없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수월이라고, 물에 비친 달.
물에 비친 달에서 그 달하고 물을 뗄 수 있느냐 이거예요.
달이라고 딱 만졌는데 그게 물이잖아요.
뗄 수 없다.
거울에 비친 꽃, 경화라는 말도 있어요.
거울에 비친 꽃에서 거울하고 꽃을 뗄 수가 없다.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인데
그런데 우리는 지금 불리감에
이 육체를 나라고 하는 분별심에
너무나 오랫동안 젖어 있어서, 훈습되어 있어서
공을 발견해도, 의식을 발견해도
자기도 모르게 나는 여전히 나고, 공은 또 공이고 하고
이렇게 따로 준다 이거예요.
지금 상황 이해되세요?
그게 아니고
공 하나밖에 없고
그 공 안에 인연 따라 색이 찰라 생멸하고 있는데
이 몸도 찰나 생멸하는 것 중에 하나다.
여러분, 몸이 지금 연장되어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여러분 몸만 있는 적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불가능해요.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내 몸을 포함한 통으로 현상이에요.
내 몸을 포함한 통으로 현상이고
이 현상이 본질 안에서
인연 따라 몸과 환경으로
같이 나타났다가 같이 사라지고 있는 거
이게 실상이다. 이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유독 기존에는, 깨닫기 전에는
몸을 오려내서 ‘나다’ 하는 바람에 ‘남’이 또 생겨서
나는 남을 또 나누네.
좋은 놈, 나쁜 놈
나누어서 지지고 볶는다, 이거예요.
탐진치
탐진치가 발생을 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모든 잘못은
내가 누구인지를 몰랐던 거.
나의 본질이, 본래면목이
지금 이렇게 텅 비어 있는 이 의식인데
이걸 모르고
몸을 나라고.
마치 영화를 볼 때
나는 영화 보는 관객인데
자기가 관객인 걸 까먹고
영화 속의 주인공하고 같이 희로애락을 하다가
관객임을 까먹고
영화 속의 한 인물을 동일시하죠.
생각해 보세요.
영화 밖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인데
자기가 관객인 걸 까먹고
영화 속에 빨려 들어가서 미혹되어서
‘미’라는 말은 ‘길을 잃다’
혹은 매혹되어서.
매혹은 속는다는 말이에요.
영화 속의 내용에 속아서 길을 잃어서 본질을 까먹고
본질을 까먹는 걸 집을 나간다. 그래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영화에서 깨어난다는 말, 이해하시겠어요?
교토에 가면
제가 간 많은 선종 사찰, 교토 선종 사찰의 정원들을 보러 가거든요.
그런데 많은 선종 사찰에
손님이 와서 처음에 딱 들어가는 거기에
제가 여러 번 봤는데
큰 액자 아니면 나무 있잖아요. 그 잘라놓은 나무
나무에다가 조각한 거.
근데 가장 많이 손님이 와서
현관에서 처음 보는 글자 중에서
가장 많이 쓰여져 있는 글자가 夢이에요.
몽, 꿈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 절에 들어가자마자 이 글자를 딱 보는 순간
뭘 가르칠까요?
그 깨달은 사람들이 우리한테 뭘 가르쳐주고 싶을까요?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이
꿈이다 이거예요.
본질의 입장에서는
여러분, 본질의 입장에서는
소리나 인간이 한숨 쉬는 소리 하는 거나 같을까요? 다를까요?
새가 지저귀는 거나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아요.
그 상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 상에 속지 않는다면
모양에 속지 않는다면
전부 다 사실은 본질이 작용으로 드러난 거잖아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미타불의 나툼이고, 현현이고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역사고, 그렇잖아요.
이게 지금 성경 체험이에요.
지금 알아들으시겠어요?
이 소리가 어디서 나요?
이 소리를 보지 말고
약견제상비상
소리를 듣는데 소리에 속지 않으면
이것이 지금, 이 공간이
불생불멸인 이 공간이
이 의식이, 의식 공간이
의식 공간이라는 말 이해돼요.
의식의 공간
다시 의식의 공간
이해되세요?
그냥 공간은 없어요. 빈 공간은 없어요. 그냥 허공은 없어요.
전부 의식이에요.
꿈 전체가 의식이듯이.
그러면 의식의 공간에
이게 성령이에요.
그러면 성령 체험은 뭐예요?
완벽하게 텅 비어 있어요.
따라서 진짜 체험은 무체험이야.
진체험은 무체험이에요.
그 체험에 내용이 있으면
현상이지, 그게 본질이 아니에요.
‘이런 체험했다’ 하는 건 욕심이에요.
그냥 한마디로 에고의 욕심.
그러면 검증하는 방법은
“지금도 그 체험이 있습니까?”에요.
여러분, 소리가 나는 공간이
본래 청정하다, 이 말 이해하시겠어요?
본래 청정해야 언제나 이 소리가 나지.
근데 자기가 무슨 생각하고 있으면
이 소리 못 듣는다니까, 오케이?
그래서 지면 안 돼요.
공부는
깨닫고 난 다음에는 깨달음을 버려야 돼요.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또 집착을 해.
그래서 마지막에는
절벽에 매달린 손을 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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