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물질만 있다고 할 수는 없지요.
너무 간단한 거 아닌가?
너무 당연하지 않나요?
인간인 이상은
물질인 몸만 이렇게 있는 거는 아니잖아요.
뭐가 있잖아요. 그죠?
그냥 가장 쉽게, 물질이 아닌 거?
정신
몸이 아닌 거?
그럼 지금 깨어 있는 이 정신.
정신은 깨어 있다.
깨어 있고,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양이 없는 깨어 있는 것이
누구에게나 이렇게 있다.”
이거 발견하는 것이
사실은 돌아보면 너무 당연한데
문제는
남이 이렇게 지적을 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이 정신을 자각하기는 쉽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참 희한하죠.
돌아보면 이것이 별것도 아니고 너무 당연한 일인데
근데 이 당연한 일을
이렇게 누가 지적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가 자기 정신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거예요.
그래서 거의 이걸 못 알아차리면
이 현상을 분별해서
좋다 나쁘다 하는 마음 따라다니는
그러니까 마음에 가려져 버리는 의식이
마음하고 의식은 다릅니다.
[마음]은 생각과 감정을 말하고
[생각과 감정]은 현상에 속하는 거고
근데 [의식]은 생각, 감정이 일어나고 있는 그 공간 자체라서
모든 것이 존재하려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이 공간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공간 자체, 시간 자체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이 근거 자체라서
이 의식이 이렇게 먼저 있고
여기에서 생각 감정이라고 하는 마음이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데
우리의 눈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생각 감정의 마음에 끌려다니느라고
그거에 가려서
그 바탕인 이 지금 의식은
미처 눈길이 안 갔던 것뿐이에요.
근데 생각, 감정이 없어도
이렇게 깨어 있잖아요.
다시
생각, 감정이 없어도 멀쩡하게 깨어 있잖아요.
깨어 있는 이거다 이거예요.
멀쩡하게 깨어 있는 이것에
인연 따라 한 생각도 일어나고
희로애락의 감정도 일어나고
일어나면서 또 사라지고.
심리학에서는 되게 뭐 16초 걸린다든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데.
이것들은 생멸하는 것들
물질과 생각, 감정의 마음은 생멸하는 현상이고
근데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할 때 돌아보면 그래요.
돌아보면
지금 방금 제가 시작하면서
삼라만상은 이 한 개 의식의 나타남이다.
이런 말을 옛 분들이 해놓았거든요.
옛 분들이 구구절절하게 다 해놓은 말인데
문제는 이 말이
그냥 말로써 들리다가
점점점점 실감 나는 게 공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돌아보면
그 아주 미세하게 이 말을 수용하는 것이
미세한 차이가 있어요.
세월이 감에 따라.
그래서 이것이 50% 수용되고, 60% 수용되고
70% 80% 90%
90% 와도, 또 91% 92%로 하면서
하여튼 그 미세하게 이 말이...
지금 죽비도 이렇게 물질처럼 보이는데
알고 보면 우리의 [식]이 이렇게 나타난 거다
혹은 감각된 것이다.
이게 죽비라는 물질이 물질로서만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여러분에 의해서 감각된 것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알고 보면
모든 물질조차도
여러분이 감각을 인식해 주지 않으면
지각, 인식
각이라고 하든지 식이라고 하든지
이렇게 여러분이 하지 않으면
이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잠이 폭 들면
이 세계가 그냥 다 사라져 버리죠.
몸을 포함해서.
여러분이 의식이 돌아와서
지각해 주지 않으면, 또 인식해 주지 않으면
같은 말인데
모든 것이 존재할 수가 없어요, 사실.
그래서 [삼라만상이 자세히 관찰하면
의식이 인연 따라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까 소리 하나
“이겁니다” 하고
또 이렇게 들어서 보여주고
한 번 치고
이게 본문의 끝이다, 이거예요.
형상이나 소리나 한 개 의식의 나타남
이게 다다
한 인간이 인생 100년을 살아도
매 순간순간 반복되는 것은
이거 하나가 다다.
그러니까 이것을 얼마나 내가
여기에 이 말을 수용해서 내가 실감나는가
처음에는 이런 말을 듣고 이해를 하고
그리고 한 번 딱 이렇게
“정말 그렇네” 하는 좀 깊은
그런 점심한다고 하는, 그런 것이 한번
“이거 의식이라는 것이 지금 이거구나.”
그리고 그 의식이 가면 갈수록
“정말로 삼라만상으로 모든 것이 다 의식이 드러나는 것이구나”
하는 그 수용, 그런 인식이 깊어지는
그게 공부고
인식이 깊어지는 것은
몸으로 주로 받아들여져야 돼요.
몸이 저절로
그렇다는 것이 받아들여져서
머리에서 몸으로 내려오는 데 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이게 세월이 필요하다고 말을 할 수 있는데
아무튼 지금 계속 반복되는 것은
방금 드린 그 말씀의 변주예요.
수없이 많은 변주가
다 이 한 개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 그냥 말로 들리다가 점점점점...
그냥 말로 들릴 때는
이 생각 과잉이 나를 번뇌롭게 하니까
생각 과잉이 나를 이렇게 번뇌를 일으켜서 나를 괴롭게 하니까
그것을 컨트롤하려고, 정화하려고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런 말을 내가 이해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 딱
“정말 그렇구나” 하고 한번 깨달음이 오고
그리고 그 깨달음이 몸까지 스며들어서
이게 깊어지면
생각이 와도 그 생각이
모양은 생각이지만
‘본질이 나타났다’라고 하는 것이 같이 보여지는
그런 순간이 오는 거예요.
이걸 체득된다고
그 사실이 갈수록 체득이 돼요.
불이법이라고 하는 하나의 기준
불이_ 둘이 아니라고 하는
본질과 현상, 뭐라고 말을 하건
둘이 아니라고 하는 하나의 기준이 딱 생기면
거기서 이런 말들을 거기에 대입을 해보면
훨씬 더 명확해지는.
여러분께서 지금 이 짧은 대목에서
연기설은
그러니까 본질은 불생불멸이고
현상은 생멸인데
문제는 본질과 현상이 하나다.
이거는 논리로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불이법은
무상_위가 없는
정등각_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라고
무상정등정각이라는 말도 쓰고
정을 줄여서 정등각이라고도 해요.
이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자주 나오죠, 경전에.
그러니까 이게 왜 위가 없는가에 대한 철저한
이분법은 위가 있어요.
근데 이게 불이법이 되면 위가 없어져버려.
그러니까 이 무상정등각,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 말이 가지는 함의가 있습니다.
한 개 의식이
이렇게 아름답게, 정말 다양하게 이렇게 드러나고 있어서
한 개 의식인 면에서는 평등한데
모든 음식이 한 개 의식이 나타난 것은 평등한데
근데 그것이 또 다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자유잖아요.
현상으로 나타날 때는 자유인데
본질로서 동일하다는 것은 또 평등하거든.
그러니까 자유와 평등이 이렇게 모든 것에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자체.
그러니까 이것이 존재의 원리라고 하는 것.
이것을 느끼면
세상이 조금 더 즐거워져요.
그러니까 한 개 의식을 우리가
부처님이라고도 하고, 성령님이라고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그 한 분 부처님이
그러니까 한 분 부처님을 가장 불교적으로 말하면
대승불교에서는
아미타여래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한 분 아미타여래가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 분 성령이, 성령께서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이 사실이
여기에 감각적으로 눈이 떠지면
이거 감상하기 바빠요, 여러분.
안 그래요?
이거 감상하기 바빠요.
나뭇잎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니까.
모양도 다르지, 빛깔도 다르지
지금처럼 살짝 흐려지면
“비 올 건가 보다. 어제까지 그렇게 쨍쨍했는데”
날씨에 따라서 또 저 칼라가 또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정말 아름다움으로 넘쳐나는 거예요.
내가 어떤 무심한 상태에서만 있다면
모든 것이 정말 축복으로 선물로 주어지는.
인생이 정말 바빠요.
이 공부가 정말로 우리를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이거 똑같은 자연을
보는 사람마다 다 느끼는 건 다를 거 아니에요.
여러분, 기왕이면 다홍치마 아닌가요?
그러니까 내 마음 하나가 비어 있느냐?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느냐?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 못 보죠?
전혀 못 보고, 먹어도 맛을 못 느끼는데
마음이 비어 있으면
모든 게 일생일대, 일기일회란 말이
한 번 기회에서 한 번 만나는 거
한 번의 기회에서 한 번의 만남
모든 것이.
그러니까 참 이게 정말 이 세상이 참 풍요롭습니다.
/분별심에 속지만 않으면
본질도 의식이고 현상도 의식이다.
마치 바다와 파도가 공이 물이듯이
그리고 의식은
본질로서도 본래 청정하고, 현상으로서도 청정하다./
현상으로서도 청정하다. 이 말은
이 의식 자체는 현상의 그 어떤 모양에도
물들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에요.
/다만 이것을 인간의 분별심이
현상은 오염되었다고 착각한 것이다.
본질과 현상은 불이이며 중도를 이룬다.
본질이 인연따라 나타난 현상은
실제로는 현상은 찰나 생멸이므로
실재라고 하기 어렵다.
다만 본질이 그렇게 순간적인 모양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여러분 지금도 그러고 있나요?
지금도 모든 현상은 예외 없이
찰라 간에 생멸하고 있어요.
찰라 간에 생멸하는...
그러니까 이게 지금 찰나 간에 생멸하는 사진인데
눈은 착시를 일으켜서
이 사진이 이어지고 있으므로
동영상처럼 보인다.
맞나요?
영화도 실제로는
1초에 24장이 펼쳐지는 활동사진이잖아요.
영화가 활동, 움직이는 사진인데
눈은 그것이 연결된 듯이 보이므로
이게 동영상으로 보일 뿐이지만
사실은 그렇다 이거예요.
이런 말을 들으면 여러분 이해는 되죠.
근데 집에 돌아가시면
자기도 모르게 또 번뇌를 없애려고 해.
번뇌하고 싸워.
그러니까 “번뇌부처님” 해야...
번뇌라는 모양으로 나타난
본질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본질이 부처니까
번뇌라는 모양으로 나타난 부처님인데
우리는 그것을 없애려고 그렇게 노력을 한다.
그래서 이 공부가 좋은 게
전환이 되고 나면
공부가 되기 전에는
생각과 싸우는 것이 마음공부의 다라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안 그래요?
공부가 전환되기 전에는
생각하고 싸우느라고
이게 거기에 온통 에너지를 다 뺏기는데
공부가 전환이 되면, 이것만 뚫리면
약간제상비상이 되면
모든 모양을 볼 때
겉모양은 모양 그 모양이지만
본질이 그렇다는 것을 꿰뚫어 볼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 공부가 전환이 되어서
생각하고 안 싸운다 이거에요.
왜 안 싸우느냐?
생각도 본질이 나타난 거다 이거예요.
감정도 본질이 나타난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생각이나 이런 감정도 알고 보면
이게 예외 없이
전부 다 우리로 하여금
그런 걸 체험해서, 그런 경험을 맛보라고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라는 걸 알게 돼요.
그래서 나한테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하지 말고
약간 어려운 일도 일어나면서 내가 성숙해지는
이 음과 양을 같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폭넓은 인간으로 내가 전환되기 위해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구나 하고 알고 받아들여요.
그래서 그때 일종의 말하면
현실의 수용력이 길러지는 거예요.
이해되시나요?
그걸 수용하는 힘이 자꾸자꾸 길러져요.
그러니까 안목이 생겨야 수용도 돼.
그래서 “수용해야지”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예전에는 생각과 싸우고, 감정하고 싸웠는데
가면 갈수록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힘이 자꾸 생깁니다.
하여튼 그래서 어떤 분이 먼저 깨닫고
번뇌가 곧 보리다.
번뇌는 현상이고요.
보리는 본질이에요.
그러니까 현상이 본질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색즉시공
이 말이 정말로 받아들여지면
그때부터는 번뇌가 더 이상 번뇌가 아니고
번뇌가 바로 본질이 드러난 것이라는 것.
분뇌가 바로 보리.
보리라는 말은 깨달음이잖아요.
그러니까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구나”
또 번뇌를 통해서
내가 깨달음으로 전환되는 힘이 생기는 거예요.
번뇌를
그것이 본질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내가 이렇게 탁 각성이 또 일어난다.
이해되나요?
각성이 와도 각성하고
번뇌가 와도 각성하고
나는 각성할 일만 남았어.
그게 전부 안목에서 이루어진다.
의식은 두 번째 안다
보세요.
보고 안다
듣고 안다.
내가 지금이 낮이라는 걸, 아는 걸, 내가 알고 있어요.
지금이 낮이라는 걸, 제가 알고 있어요.
내가 낮이라는 걸, 아는 걸, 또 안다.
제가 지금 보살님 지갑 속에 돈이 얼마 들었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모르는 걸 알아.
이해되세요?
보살님 지갑만 모르는 게 아니라, 내 지갑도 몰라.
내 지갑도 얼만인지 몰라.
요즘 카드 쓰니까.
거의 뭐 현금이 좀 있긴 있지만, 얼마 있는지 잘 몰라요. 그죠?
근데 모르는 거를 알죠.
이 두 번째 안다는 말도 참 재밌는 말이에요.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냄새 맡고 알고, 이게 뭐라고 또 알잖아요.
냄새를 맡고 알고, 맛을 보고 알고, 느끼고 알고
하여튼 아는데
나중에 가면
아는 줄을 또 알고
또 모르면 모르는 줄도 안다.
끝내 아는 것은 있다, 이 말이야.
이게 [영지]
신령스럽게 안다.
텅 빈 것이 신령스럽게 안다.
무엇이?
지금 깨어 있는 의식인데
무엇이 의식인가 하면
지금 눈앞에 이렇게 밝은 거
이 말을 제가 왜 했는가?
한번 수업시간에
공적영지, 이런 말을
이건 의식은 텅 비었고
텅 비었고, 따라옵니까?
의식 자체는 고요하죠.
여기서 소리가 일어나니까
그러니까 텅 비고 공적한데 신령스럽게 또 알지요.
이렇게 모양도 보면 알지
소리도 듣고 알고
알잖아요.
그러면 이런 말을 수업시간에 들으면서
“아, 그렇네”
따옴표
“아, 그렇네” 하고 느껴지는 것이 있죠.
이게 지금 수업 듣는 것의 장점...
이 책으로 보는 거하고
수업으로 이렇게 들으면서 소통하는 장점이 이거예요.
“그렇네”라는 느낌이 좀 있잖아요.
여러분이 따라오시면서
“아, 그렇네” 하잖아요.
“아, 그렇네” 하는 그 감이
몸이 알도록
“아, 그렇네” 하는 것이
이제는 몸에서 알아지도록 하는 게 수행이에요.
그냥 이렇게 책을 보고도 잠깐 느낌이 오죠.
그렇지만 그 느낌이 이렇게 지금처럼 구체적으로 몸으로 느껴지는 느낌은
아무래도 약하다 이거예요.
근데 우리의 장점은
이런 말을 하면서
“의식이 지금 눈앞에 텅 비어서 투명한 채로
밝게 깨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금 색깔 보면 무슨 색인지를 바로바로 다 압니다” 하면
그런 느낌이 좀 오잖아요.
그 느낌이 반복되어서
내가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이 말이 중요하네.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몸에서 알아지는 거
그게 쌓여가는 거
그게 수행이다 이거예요.
그게 되어야 빠꾸를 안 해요. 이해되나요?
머리로 아는 거는 빠꾸해요.
근데 몸이 이렇게 익어지면
그 몸이 아는 것은 돌아가지 않아.
잊어버리지 않아 한마디로 말해서.
그 하여튼 가끔
저도 자전거 탄 지 오래됐어요.
근데 지금도 자전거 탈 수 있어.
그렇지 않나요?
안 탄 지 오래됐어요.
그렇지만 몸으로 익혀진 것은 안 잊어 먹어, 이해되나요?
지금 이 감각, 공적영지 하는 이 본질인 의식
이 감각이
자꾸 이렇게, 이렇게 반복되면서
몸에 서서히 스며들어서
몸이 익혀서 아는 것은 잊어버리지를 않는다.
그게 지금 공부의 지금 핵심이에요.
상황 이해되죠?
그러니까 머리로 아는 것은 금방 잊어먹는데
몸이 아는 것은
이게 몸이 아는 것을 동양에서는 [도]라고 해요.
이해되죠?
몸이 아는 것을 [도]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로만 딱 이 몸에 익어지면
그다음부터는 몸이 알아서 한다.
그러니까 그게 진짜 공부다.
그래야지 우리가 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머리만 알고 아는 거 가지고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워요.
몸이 알면
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텅 빈 채로 깨어있는 이것은
언제나 이대로죠.
안 변하잖아요.
이게 지금 구원의 소식이다, 이거예요.
몸은 변해가고
또 몸은 낫다가 죽을 거지만
그러나 지금 깨어 있는 이거는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알고 보면
낮에도 이렇지만
자도 이거는 그대로예요.
자는 것은 몸이 자는 거지
이 의식 자체가 자는 건 아니다, 이거예요.
의식이 자면 우리 죽어요.
견성이라는 것은
자기 의식을 느끼는 거예요.
본질인 의식에 관심을 가지면
그만큼 그 의식에 대한 감각이 살아난다.
그래서 더 점점점점 또렷해진다.
근데 그 또렷해지는 것이
머리로 아는 거냐?
몸으로, 온몸으로 이것을 또렷또릇한 것이 더 짙어져 가느냐?
어느 쪽이에요?
몸으로 안다.
몸으로 느낀다. 이거야.
몸에서의 느낌이 갈수록 갈수록
관심을 가지면 더 뚜렷해진다, 이거예요.
그게 지금 제일 중요한 공부 같아.
우리가 지금 이런 문자를 가지고 하는 공부는
결국은 그걸 하기 위해서
하나의 지금 수단으로 쓰는 것뿐이에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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