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의 내용은
개체의 차원에서 말하는 게 아니고
이 우주 전체를 설명한 것.
그래서 자성, 본성, 불성 이런 말보다는
법성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이 본질을, 의식을.
본질인 의식을
법성, 법은 모든 존재하는 것
모든 존재하는 것의 본질
그래서 법성이란 말
법성원융무이상 이렇게 나오잖아요, 시작이.
그 대목이 끝나고 바로 나오는 게 그 법성은
불수자성_ 본질인 그것을 지키지 않고
수연_ 인연에 따라서
성_ 이룬다.
이거 중요하니까 한번 따라 합시다.
불수자성수연성
법성은, 본질인 의식은
“내가 의식이다” 하고 지키고 있지 않아요.
본질인 의식은 “나는 의식이다” 하고 딱 자기를 지키고 있지 않아.
불수자성, 어떻게 하는가?
수연성_ 인연 따라 현상으로 이렇게 나투고 있어요.
그래서 본질이 의식이 본질이구나 하는 순간
그 의식은 굳어버려요.
그럼 그 의식이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나타나.
‘나타났구나’ 싶으면 이게 환이야.
이게 지금 중도의 뜻이에요.
나타나서 “이게 있는 거구나” 하면
텅 비어서 이거 없는 거예요.
환이에요.
근데 ‘환이구나’ 하면 벌써 본질로서 이것이 엄연히 이렇게 있거든요.
근데 ‘본질이구나’ 하는 순간 또 이렇게 나타나.
그러니까 이 관계가
동시에 현상이면서 본질이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현상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없다, 본질만이라고 할 수도 없어.
이게 중도예요.
그러니까 중도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이 세계가, 이 세계의 존재 원리가.
본질이면서
“본질이네” 히는 순간 현상이 되어버리고
“현상이네” 하는 순간 본질이 되어버려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이게 항상 동시에 같이 일어나고 있다.
은현동시隱現同詩다.
그러니까 지금 중도의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법안을 뜨면
여기에 밝아지는 거예요.
중도에 밝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현상이라고 해서 집착하지 않고
또 현상이 싫다고 해서 본질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법화경에는 또 그런 말이 나오거든요.
본질은 본질로서 언제나 의연히 있어서
현상이 언제나 또 현상은 현상대로 또 펼쳐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게 둘 다 동시에 긍정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지금 항상 두 개가 동시에 같이 있다.
본질은 본질로서 있고 현상은 현상으로서 있는데
이거라고 하는 순간
그거는 없다.
하여튼 요 중도라고 하는 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그러니까 동시에 유이면서 무고
동시에 비유이면서 비무고.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하여튼 묘한 존재의 실상
이것에 대한 안목이 요 법안에서 떠지거든요.
/따라서 현상이 본질이 되고
본질이 현상이 된다./
현상이 본질이 된다, 이 말은
색즉시공이고
본질이 현장된다는 말은
공즉시색, 이게 동시다, 이거예요.
/현상과 본질이 하나인 불이
둘이 없는 중도의 세계다.
여기에 예외가 없다/
따라서 현상이 본질이고, 본질이 현상인데
모든 현상은
그 자체의 재료는 본질이기 때문에
꿈속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는 꿈이기 때문에
그 재료는 꿈을 꾸는 의식이기 때문에
꿈속에 나오는 번뇌도 의식이다, 이거예요, 그 자체는.
그래서 번뇌 즉 보이다.
그러니까 법안에 의하면
모든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그 자체가 본질이에요.
그러니까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죽비다, 이런다고
본질이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다.
왜냐하면 본질이 본질로서 안 있고
이 순간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본질이다” 그러면
그거는 공허한 관념이다, 이거예요.
그 본질이 본질도 안 있고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면 현상을 말하고
“현상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또 본질로 말해.
그러니까 이게 참 우리가 여기에 소화를 시키는 거
이게 안목이에요.
그 안목을 뜨려면 에고가 한번 떨어져야 돼.
에고는 분별심
분별심은 “A는 A고 B면 B지
어떻게 동시에 A면서 B입니까?”하고
분별은 용납하지 않아요.
이게 우리의 동물적인 본능, 편도체가 발전해 온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개체를 지키기 위해서
개체하고 이 환경하고 떨어뜨려 놓는 이 분별심이
우리는 발달되어 있어요.
동물적인 본능.
사실은 그래서 우리 마음공부는
이 몸을 움직이는 주인이
에고에서 의식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공부는 뭐 하자는 거냐?
보통 사람은 에고가 주인이에요.
에고가 끌고 다녀.
근데 깨달아서 법안이 열리면
에고가 아니라
본질인 의식이 나타나는 통로가 되니까.
모든 것이 본질인 의식이 나타나는 통로로서.
그래서 에고가 성숙한 거에요, 그리 되면.
에고가 본질이 잠들어 있을 때는
집사가, 주인이 없으면 집사가 지 맘대로 전횡을 하는데,
주인이 나타나면
집사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게 되어서
오히려 주인한테 필요한 일을 집사가 잘하죠?
<배트맨> 그런 영화 보면
집사가 아주 훌륭한 사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집사도 잘해야 돼.
에고는 능력이 많아요.
근데 그 능력 많은 에고가 주인 없이 전횡하던 것을
주인이 나타나서 질서를 잡으면
에고는 아주 훌륭한 집사가 되는 것
그게 우리 공부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효과예요.
그래서 아무튼
/법안에 의하면
번뇌즉 보리이며 중생즉 부처이자 생사즉 열반이다./
모든 분별이 없어진다.
현상이 본질이고 본질이 현상인데
현상 안에서의 모든 반대되는 말들도
전부 다 통일이 된다, 법안에 의하면.
이건 어렵지 않죠?
본질의 입장에서.
근데 여기서 한 가지
한 가지 우리가 주의할 점은 뭐냐 하면
번뇌즉 보리 이런 말 우리가 배웠잖아요.
번뇌즉 보리이라는 말을 배워서
“보리는 깨달음이니까
번뇌도 다 깨달음이네” 하고 배워서
그 말을 관념으로 잡아서
“아무 번뇌를 일으켜도 괜찮네”
이렇게 하면 안 돼.
이게 바로 본질에 집착하는 거예요.
본질의 입장을 집착해서
본질에서 보면 모든 게 평등하거든요.
그러니까 “번뇌도 깨달음이네”해서
그냥 막행막식이라고 해.
이게 공부가 잘못되면, 스승이 없으면
이렇게 되기가 쉬워요.
그러니까 뭔가 반짝하는 식광이라 그래, 식광.
앎이 열리면 거기서 공부가 왜곡되어서
본질을 잡아서 자기가 본질이라고 착각을 해요.
그러고 현상을 무시해
그래서 현상을 아무렇게나 해.
현상의 인과를 무시해.
그러니까 이게 잘못한 공부의 하나의 현상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말을 할 때
번뇌즉 보리가
법안에 있던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현상에서 살 때는
번뇌는 번뇌고 보리는 보리에요.
여기 중생즉 부처잖아요.
현상에서는 중생은 중생이고 부처는 부처예요.
괜히 이런 말 배워서
“중생이 그대로 부처다”
중생 노릇도 하면서
그러면 안 돼.
그러니까 철저하게 현상에서는 분별을 해야 돼요.
대신에 이 분별이 치우친 분별이 아니라
본질을 보고 난 뒤의 정확한 분별.
그래서 본질을...
그런 말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
본질을 보고 나면 인과에 더욱 철저해진다.
지금 따라옵니까?
본질을 봤다고 해서 인과를 무시하는 게 아니고
본질을 보고 나면
인과에 더욱더 철저해진다, 이해돼요?
네, 그러니까 더욱더 조심하고
그 현상을, 현상의 법칙을, 더욱더 잘 따르는 거예요.
대신에 힘이 있죠.
본질의 힘이 있지.
그러니까 본질로서 현상을 살아가는 것
이게 우리의 공부입니다.
/마지막 불안은 육조단경 첫머리에서
혜능이 읆었던 게송의 내용이 잘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쭉 오안을 공부해 왔어요.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불안은 육조단경 첫머리에서
혜능이 읊었던 게송의 내용이 잘 보여준다./
어떤 거냐 하면
보리 자성이 본래 청정하다
누구나 다만 이 의식을 쓰는 것이니
곧장 성불해 마쳤다./
그러니까 불안은
전히 깨어났다 이 말이에요. 깨어났다.
완전히 깬 사람의 입장.
완전히 깨어난 사람은 자기가 의식이죠.
그리고 의식이 스스로 자기가 즐기기 위해서
이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어.
그러니까 완전히 잠에서 깬 사람 입장에서는
보리 자성이 깨어 있는 의식은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걸 가지고 지금 살고 있어서
인생 100년,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매 순간순간
알고 보면 모든 사람이
이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김 아무개가 사는 게 아니고
생명 자체가 사는 거예요.
이것이 분명한 사람은
이제 불안이라고 해서
너무나 이게 당연한
완전히 깨어난 사람, 완전히 깨어난 사람에서는
/누구나 다만 이 의식을 쓰는 것이니
곧장 성불해 마쳐 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부처였다.
한 번도 부처가 아닌 적이 없었다 하는 것으로
완전히 깨어난 사람 입장에서는
모든 게 그렇게 보이는 걸 어떻게 해.
모든 게 그렇게 보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는 게 무슨 신통한 게 없는 거예요.
못 깨달았을 때는 깨달음이 참 귀한 거지만
깨닫고 나면 꿈은 사라졌잖아요.
그냥 어젯밤 꿈이었어요.
에고니 뭐니 수행이니 하는 모든 것이.
그러니까 완전히 깨어난 사람의 입장을 불안이라고 하고
그래서 참 이런 말은 굉장한 거예요.
누구나 다만 이 의식을 쓰는 것인데
의식이 부처니까
모든 사람이 다 부처지.
처음부터 부처였지.
이것을 아닌 적이 없어.
다만 이것은 완전히 깨어난 사람의 입장이에요.
근데 이런 걸 우리가 알고 공부를 하는 거지.
왜냐하면 궁극적인 목적은
지금 불안을 가지고 살자는 뜻이기 때문에.
/그래서 의식이 곧 부처이고
모두가 이 의식을 써서 살아가고 있으니
누구나 본래 부처라는 뜻이다.
사실 훤칠하게 깨닫고 보면 오안이 본래는 하나이다/
이 말이 중요해요.
완전히 깨닫고 보면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 그냥 하나의 눈일 뿐이야.
그걸 꿈속에서 잠꼬대했던 거지.
꿈속에서 뭐 육안이다, 천안이다 하고 나누어서 수행하고 하는 것이
전부 꿈속에서 했던 일이다.
깨고 나면, 완전히 깨고 나면
눈은 하나밖에 없어요.
깬 사람이 뜨고 있는 눈
그거 하나밖에 없어.
근데 못 깬 사람은
꿈속에서는, 깨기 위해서는 이런 단계들이 필요했던 거지.
깨고 나면
처음부터 육안도 불안이고, 천안도 불안이고, 혜안도 불안이고
법안도 불안이고, 불안도 불안이고
처음부터 이거 하나였어요.
다시 말하면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수행하느라고 발버둥을 쳤는데
이거 안에서, 의식 안에서, 의식이 수행했던 거예요.
완전히 깨고 나면
이런 코미디가 없었던 거지.
그냥 온통 의식 하나뿐이고
그 의식 안에서 의식이 수행하느라고 그렇게 노력했던 거지.
알고 보면.
그러니까 이건 지나고 난 사람의 입장이에요.
근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철저하게 또 밟고 나가야 돼요.
그러니까 요게 모순같이 보여요.
완전히 깨고 난 다음에는
아무것도,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불안을 무오무수無梧無修_ 깨달음도 없고 닦음도 없다.
이게 불안의 입장이에요.
깨고 나면 이래.
깨고 나면 꿈속에서 꿈을 깨기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이 그런 것이
처음부터 그런 건 그냥 꿈속이었을 뿐이야.
그러나 꿈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철저하게 한 발 한 발 수행을 통해서
여기까지 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를
/누구나 본각이지만, 불각으로 살아가는 현실에서/
본각, 불각 이거 중요하니까 외우세요.
대승불교에서 보는 깨달음의 과정이에요.
처음에는 누구나 본각, 본래부터는 의식을 다 가지고 있어.
그리고 의식은 완벽해요, 스스로.
누구나 본각이지만
그러나 에고에 지배당해서 지금 불각으로 살아.
불각_ 각이 없는, 깨달음이 없는 상태에서 살아요.
/불각의 현실에서 비로소 다시 깨닫는 시각
다시 깨닫는다.
시_ 시작 그러잖아요. 다시 시, 비로소 시
/비로소 다시 깨달아서
마지막 구경각으로 가는 여정을
오안을 떠가는 방편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경각 하고 나면 어딘가?
본각이에요.
그러니까 동그라미지.
본각에서 출발해서 본각
지금은 불각 상태
근데 시각을 거쳐서 구경각을 갔더니 본각이더라, 거기가.
그러니까 처음 그 자리더라.
그러니까 이게 지금 아이러니컬한
이게 인생이에요.
인생이 완벽하게 인생이 이루어지고 나면
처음 그 자리였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공부 과정이에요.
근데 처음 그 자리를 ‘산은 산이다’, 그래.
시작할 때도 ‘산은 산’인데
끝날 때도 ‘산은 산이다’로 끝나요.
근데 마지막 ‘산은 산이다’가
‘산은 역시 산이다’
‘역시’가 붙어.
그러니까 요 ‘역시’가 붙는 것을 평상심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역시 산은 산이다’ 하는 이 말 한마디 하기 위해서
참 우리가 고생을 하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우리가 이 과정을 알고 공부하면
중간에 ‘괜히 뭐 깨달았네’ ‘괜히 뭘 봤네’ ‘뭘 했네’ 하는 모든 것이 다
환상이다, 아무 일이 없다.
깨고 나면 다 꿈속의 일이고
깨고 나면 그냥 본래부터 완벽한 이 세계에 아무 일이 없었다.
일장춘몽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정말 안심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꿈을 깨자고 하는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꿈을 깬 사람이 하는 말을 배워서
꿈속에 있는 사람이
“이거 꿈이다”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꿈속에서 고통은 있어요? 없어요?
고통은 있잖아요.
그러니까 고통을 없앨 수는 없어요.
공부의 기준이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되어야 되지
뭔가 반짝 해서
본질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상황 이해되세요?
그래서 하여튼 여러분
고통이 없다는 것은 밖에 사람이 알까요? 자기가 알까요?
자기가 알잖아요.
그게 기준이라고.
우리 공부의 기준은 고통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를 실제로 해야 돼.
두 가지 해야 되죠.
일상에서도 항상 깨어서 자기를 보려고 해야 되고
그래서 결국에는 자기 안의 야수
자기 안의 에고를 발견해서
에고를 또 부정하면 안 돼요.
에고를 사랑해야 돼.
우리들의 본성이 부처잖아요.
에고는 중생이잖아요.
부처가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
그게 내 안에서 일어나야 된다 이거예요.
본성의 자비로
따뜻한 사랑과 연민, 연민심 있잖아요.
그걸 가지고 나의 에고를 사랑을 해서
잘 다스려서 다독다독해서
목우_ 검은 소를 흰 소로 바꾸면
그다음에는 소를 타면 날뛰지 않아.
자동으로 딱 앉으면
자동으로 선정으로 쑥 들어가는 연습해야 된다.
일상에서도 봐야 되고 앉는 것도 계속 해서
해보면 알아요. 여러분
잘 안 들어가다가 속이 시끄러워
그러다가 익으면
이제 앉으면 쑥~~~ 들어가는 거예요.
이거는 해야 돼.
태권도를 품새를 익혀야 돼.
이거 지금 선정으로 들어가는 이것을 익혀야 돼요.
화두삼매를 지금
제가 한마디로 말하면 화두삼매
화두를 가지고 삼매에 들어가는 거
왜냐하면 의식 자체가 화두니까
화두삼매, 의식삼매.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우리가 자기 수행을 해야 됩니다.
다음에 우리가
“아, 이게 이 의식이네” 하는 순간
그 의식은 관념으로 변해버려요.
다시
우리가 “아, 이게 의식이네” 하는 순간
그 의식은 관념으로 변해버려요.
그러니까 의식을 깨달은 다음에는 의식을 놓아야 돼요.
그리고 놓을 수 있는 근거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놓을 수 있는 근거는
본질인 의식은
내가 이래라 저래라 안 해도 의식이에요.
내가 집착할 필요가 없어요.
이걸 제가 지난 시간에 이렇게 표현했잖아요.
지난번에 한번 이런 말씀드렸잖아요.
본질인 의식이 기독교에서는 신이라고 부르는 절대거든요.
그러니까 신을 한번 만났으면 됐지
신을 한번 확인했으면 됐지
믿음으로 가야지
신하고는 믿음으로 관계를 맺어야지
신을 내가 잡아서 있으면
신이 자기 일을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신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소를 놓는다.
‘소를 잊어버리고 사람이 남는다’ 이 말은
소라고 하는 깨달음, 의식, 본질, 신
이름이 뭐든지 간에
그것을 내가 잡으면 현상이 돼버려요.
다시
본질을 내가 잡으면 현상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확인한 다음에는 믿음으로 전환한다.
‘믿음으로 전환한다’ 이 말을 놓는다.
본질에 대한 욕망을.
본질에 대해서도 우리가 욕망을 가지고 있어요.
세간에서의 욕망이 지겨워서 출세간에 넘어왔는데
그 욕망은 그대로 있고 또 출세간을 또 욕망하고 있어.
그래서 출세간을 확인한 다음에는 또 출세간을 또 잡는다.
잡으면 그것이 현상이 돼버려.
본질이 다시 현상이 돼버려요.
다시 말하면
진정한 신이 아니고 우상으로 전락해요.
이런 본질을 놓을 때를 ‘백척간두 진일보’라 그래요.
왜냐하면 인간은 무엇이든지 의지하고 싶어 해요.
그리고 무엇이든지 소유하고 싶어 해요.
인간이 소유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개념화하는 거예요.
인간이 무언가를 소유하려면 개념화해서 소유해.
만약 인간이 자유를 소유하고 싶다
그러면 ‘자유란 이런 것이다’ 하고 개념화를 시켜서 소유하려고 해요.
이게 인간의 분별심의 메카니즘이에요.
따라서 내가 이거다 저거다,
혹은 내가 깨달았다 하는 모든 것 뒤에는
에고의 욕망이 그렇게 그걸 하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쌍차라고 해.
이게 백척간두 진일보고
현애살수 매달릴 현, 절벽 애, 놓을 살, 손 수
절벽에 매달린 손을 놓는다.
현애살수 백척간두
백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진일보_ 허공 속으로 한 번 더 나간다.
벽척간두가 깨달은 그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깨달음을 놓아야지 완전 허공으로 나가야지.
깨달음 뒤에 붙어 있는 에고가 떨어진다 이거예요.
그래서 옛날부터 깨달음을 모병이라 그랬어요, 모병.
참 날카로워요.
수행자의 목적은 깨달음인데
그 깨달음을 모_ 고질이라는 뜻이에요.
고질병이라 그래서
깨달음이 고질병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깨달음 뒤에
정말 강력한 에고가 도사리고 있어요.
쌍차하면 법안이 터진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욕망 하나를 다스리는 것.
이게 사실은 핵심이에요.
근데 인간이 자기 욕망을 돌아보기는 어려워요.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를 구하고 있어.
욕망이 있어.
근데 그거를 스스로 교묘하게 합리화하거든요.
“나는 이거 해야 돼.
이거는 천하에 귀한 거야. 나만 이거 할 수 있어.”
인간의 욕망이 모든 걸 왜곡시켰다는 거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제일 깬 사람이 할 일은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인생은 고애로 끝나버린다.
그러니까 꿈에서 깨세요.
이게 먼저 깨달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할 자비예요.
입전수수, 시장으로 들어가서 자기 손을 걷어붙인다.
입전 전_ 시장으로 들어가서
수수_ 손을 걷어붙인다. 남을 돕는다.
동사섭을 해서 깨달음을 이끈다.
동사섭 안 하면 여러분 말 안 들어요.
도둑놈 교우할 때는 같이 도둑질을 하면서 해야지
에햄하고 점잖은체 하면 붙여주질 않아.
아예 말을 듣지 않아.
그러니까 참 지장보살이 지옥으로 갔다.
이게 지금 입전수수의 하이라이트예요.
갈 수 있다.
왜냐?
깨어났기 때문에.
깨어났기 때문에
깬 힘으로 지옥이라고 하는 꿈을 꿀 수 있다.
근데 그 안에는, 지옥 안에는
그게 꿈이지만
모든 사람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그래서 이게 꿈이라는 걸 알려줘서
깨어서 나와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예수보살을
지장보살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대요.
종교학자 중에는.
예수님이야말로 지장보살이다
이렇게 하시는 분도 있더라고요.
왜냐하면 이 사바세계의 지옥에
하느님의 아들이 와서
이 지옥에 와서 뒹굴면서
이걸 구원하는 그 과업을 하셨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나 지장보살의 그 일을
우리도 힘을 기르면
이어서 해야 되는 거죠.
그게 지금 최종적인 10번의 이야기입니다.
이게 지금 불안이다.
불안, 부처의 눈이다.
부처의 눈은 보살행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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