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본질인
부처와 부처가 본체를 전했다.
왜냐하면 부처님도 여러 분이거든요.
그리고 조사와 조사가 오직 이 본심을 전했다, 할 때
이 본체 혹은 본심은 뭐냐?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있는 것
그래야만 그게 진리예요.
“특정한 사람한테만 있고 다른 사람한테는 없다”
이러면 진리가 아니에요.
그래서 부처와 부처가
오직 이 본처를 전하고
조사와 조사가 오직 이 마음을 전했다.
근데 이 마음은 요즘 말로 하면
그냥 간단명료하게
의식이다, 이거예요.
그럼 지금 이 의식
한 번만 더 확인하고 들어가면
지금 이 의식이
이 순간 나에게는 어떻게 지각되는가?
어떻게 어떻게 감각되는가?
어떻게 확인되는가?
어떻게 분명한가?
의식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어떻게 분명한가?
제일 큰 것이
인간의 여러 가지 감각기관 중에서
눈이 8할이라고 하거든요.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인간이 외부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그 정보의 8할은, 80% 이상은
이 눈이 받아들인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
이렇게 멀쩡하게, 평범하게, 평상심대로 이렇게 보고 있으면
지금 보고 있는 정보가 들어오잖아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이렇게 앉아서 이렇게 바라보는데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지금 나의 눈이 있는 자리에
실제로 내가 나의 눈을 보면
나의 눈이 있는 자리에는
실제로는 이 세계가 보인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마니주라는 거다.
그럼, 이 마니주는 여의주라서
크기가 무한대로 확장되기도 하고
좁히면 무한히 작아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 의식의 크기는
자유자재로 신축성이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되기 때문에
이거를 여의주라고 하는
마니주, 여의주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이거예요.
지금 우리들의 의식이 어디 있는가?
지금 이 눈에 있다.
또 하나는 반메는 연꽃
반메라고 하는 말은
인도 말로는 파드마예요.
파드마를 한자로 반메라고 이렇게 썼어요.
그러면 연꽃은 이 의식이
마이주 같은 이 의식이
투명해서, 청정해서
이 의식 안에 나타난 이 삼라만상으로부터 물들지 않는다.
이걸 많은 분들이 비유를 해서
고경이라고 했어요. 옛 거울
처음부터 있었던 거울.
그러면 거울에 사물이 비치잖아요.
거울에 사물이 비치는데
거울에 나타난 빨간 사과, 그 빨간색이 거울을 물들이냐? 할 때
물 안 들죠.
그럼 빨간 사과가 지나가고 노란 바나나가 딱 나타나면
그 노란색이 거울에 물드는가?
물이 안 든다, 이거예요.
물이 안 드니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비칠 수 있어요.
이해되나요?
이게 투명해야만
이거 자체가 칼라가 있으면
물들어서 안 된다 이거예요.
그래서 연꽃과 같다.
진흙탕에 핀 연꽃처럼.
이 진흙은 현상계
그리고 이 현상계에 피어난 연꽃은
현상계로부터 물들지 않는다.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물들지 않는 연꽃
그래서 마니주하고, 연꽃을 가지고
지금 우리의 이 의식을 비유를 했다.
불법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말 중에 하나가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정법안장하고 짝을 이루는 단어가
실상무상(實相無相)
진짜 모습은 모양이 없다.
진짜 모습이
모양 없는 진짜
이거 이거거든요.
우리들의 의식.
지금 여러분, 깨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말을 제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자꾸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것이 여러분한테 익숙해지라고.
이렇게 살아 있다, 이 말은
의식이 있다는 말이고
의식은 어떻게 있는가?
지금 몸이나 이 삼라만상이 있는 이 차원에 있는 건 아니에요.
다른 말로 하면
이 삼라만상이 의식 속에 들어앉아 있어요.
그래서 의식이 먼저고 삼라만상은 굳이 따진다면
존재의 순서가
의식이 먼저고
이 의식에 인연따라 삼라만상이 지금 나타나는 거예요.
이건 또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 중에 하난데
아침에 잘 자고 일어나면
의식이 먼저 돌아온다 이거예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의식이 먼저 돌아온다.
그럼, 그 돌아온 의식에 삼라만상이 또 나타나는 것.
그래서 특히 눈 뜨기 전에 한 생각이 잘 떠오르거든요.
의식이 먼저 돌아오고
돌아온 의식에 한 생각이
이런 물속에, 어항 속에 고기가 빠꼼하면
방울이 이렇게 오르는 것처럼
한 생각이 뽀로로, 이렇게 올라온다 이거예요.
옛 분들이
한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
한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
그게 우리들의 본심이다, 본질이다, 본체다.
그런 말 들어보셨죠?
그러니까 딱 아침에 의식이 먼저 돌아왔는데
그 투명한 의식의 공간 속에
한 생각이 물방울처럼 뽀로로하고
한 생각이 탁 떠올랐다가, 폭 하고 꺼져서 사라진다.
그러니까 한 생각이 떠오르는 자리가 어디인가?
의식이다, 이거예요.
의식.
그래서 이 의식이 정법인데
이게 바른법인데
알고 보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살아 있는 우리가 현상만을 보고 살아서 놓쳤는데
무얼 놓쳤는가?
모든 현상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이 공간 자체로서, 바탕 자체로서
모든 삼라만상보다도 먼저 있는
이 공간 자체로서의 의식
그걸 놓치고 산다 이거예요, 우리가.
근데 이걸 발견하는 것이 견성이다.
그러면 이 의식이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의식은 항상 있고
이게 중요한 거예요.
의식은 항상 있고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모든 인연은
나타나는 것을 유의법이라고 해요.
전문 용어로 유의법.
유의법이라는 말의 뜻은
“인연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모든 것들”
그걸 유의법이라고 해요.
이 유의법이, 모든 것들이
의식 속에서 생겼다가 사라지거든요.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은 제행무상이고, 제법이 무아고
나라고 할 것이 없어.
고정된 실체가 없어.
그리고 그것에 집착하면
그 집착이 고통으로 일체개고
모든 것이 고통으로 변하는.
그러니까 본질의 입장에서는
본질은 말이 재미있는 게 없는 듯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의식은
이렇게 딱 잡을 수가 없어, 이거라고.
잡을 수는 없지만 있긴 있죠?
없는 사람?
이거 날아가요.
왜냐하면 ‘아야’ 하고 피하고 뭐 하는 것은
전부 다 의식이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지금 의식이 있긴 있습니다.
맞아요?
근데 이게 현상하고는 다른 차원에 있다.
이 공간 자체로서 존재한다.
텅 비어서, 투명한데
이 공간 자체로, 지금 우리 시야 전체가
이게 한 개의 의식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존재한다. 이거예요.
우리들의 의식이.
그래서 이걸 말하는 의식이 정법이고
이것이 바른법이고
생겼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불생불멸의 영원한
오직 이거 하나인
의식 하나인
그리고 의식이 나타난 거예요, 삼라만상은.
그래서 오직 의식 하나로서
의식을 정법이라 그래요.
바른법이다.
근데 이것이 어디 있는가?
의식이 모든 사람의 안_ 눈에
장_간직되어 있다.
장은 저장한다, 혹은 안장한다.
하여튼 이렇게 간직되다, 창고, 창고 ‘장(藏)’자라고도 해요.
그러면 보세요.
이런 말 속에 깨달은 분들이
이 비밀을 이미 이렇게 밝혀놨어.
정법은 그들의 의식
의식은
안_ 눈에
장_ 있다.
여러분 자기 돌이켜 보세요.
지금 이 순간 자기 의식이 어디 있는가?
자기 눈에 있다.
그러면 내가 내 눈을 보면 어떻게 돼요?
내가 내 눈을 보면
내 눈이 있는 자리에 실제로는 뭐가 지금 보이는가?
이 투명한 공간 속에 이 세계가 보인다, 이거예요.
이 세계가 실제로는 내 눈 하나가 이 세계다, 이거예요.
이 육안 말고 심안
내 눈이 있는 자리에, 내 육안이 있는 자리에
실제로는 심안이 있다.
그 심안에 인연 따라 지금 삼라만상이
이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현상으로서의 나는
몸하고 생각·감정이에요.
현상으로서의 나는
몸하고 생각·감정인데
생각·감정을 조사 스님들은 주로 이런 말을 많이 썼어요.
조사 스님들이 쓰는 용어를 우리가 또 배워보면
정식(情識)이라고 했어요.
식은 아는 거고
정은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감정과 이해
식은 이해, 혹은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네요.
감정과 생각.
감정과 생각은 주로 몸에서 일어나는 것들이죠.
몸하고 감정 생각
이것은 현상으로서의 나예요.
근데 본질로서의 나는
몸과 생각·감정이 나타나는 이 공간 자체로서의 의식.
다시
몸과 생각·감정이 나타나는
그 공간 자체로서의 의식
이게 우리들의 본질이에요.
그래서 본질은 변하지 않고
현상은 변해서
본질이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현상은 나타났다가 사라져서
약간 어떤 느낌이냐 하면
이게 실체가 없어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긴 하는데
실체가 없기 때문에 약간 꿈 같은 느낌이 들어요.
우리 의식의 주의 집중이 본질에 가 있으면
현상은 점점점점 리얼리티가 줄어들어요.
그래서 바로 1시간 전에
아침은 그렇다 치고, 2시간 전에 제가 점심을 먹었는데
2시간 전에 먹은 점심도
지금 돌아보니까 꿈 같아요.
그러니까 쉬는 시간 되면
우리가 화장실 갈 거 아니에요.
화장실 가면서 첫 시간 돌아보면
꿈 같을 거예요.
인생 60년이 꿈 같다는 거죠.
본질에 나의 입장이, 나의 주의 집중이
본질의 입장에 가 있으면 가 있을수록
현상은 실체감이 줄어들어요.
실체감이 줄어들면
자연적으로 현상에 대한 집착도 줄어들어요.
그러면서 좀 이렇게 거리가 좀 생기는 느낌
그러면서 “아, 이게 꿈 같고, 영화 같구나” 하는
지혜가 자꾸 생긴다, 이거예요.
그 지혜를 부처님이 삼법인이라고
제행무상_ 모든 일어나는 것들은 무상하다
제법무아_ 그리고 모든 것들은 실체가 현상은 실체가 없다
일체개고_ 그런데 실체 없는 것에 집착하면 고통이 생긴다 하고
부처님이 삼법인, 세 가지 진리의 도장이라고 해서
딱 이렇게.
여러분 부처님이 이런 말을 하는
부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세요.
제행무상_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그런 말을 부처님이 하셨잖아요.
그러면 그 말을 한 부처님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부처님이 현상 속에 있으면서
모든 현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고 말을 했을까요?
아니면 본질의 입장에서 보니까 모든 현상이 무상하다고 했을까요?
어느 입장일까요?
본질의 입장이잖아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하신 말씀들은 본질의 입장에서 하셨구나”하는 걸
우리가 지금 알 수 있죠.
그러면 우리가 하는 공부는
“내가 현상의 입장에서 살아가는가?”
아니면 “본질의 입장에서 살아가는가?”
돌아보면 99%는 현상의 입장에서 살아, 보통 사람들은.
근데 점점점점 본질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그 시간이 늘어난다.
이해되나요?
그래서 이런 말
옴마니반메훔 이런 말들이 굉장히 우리한테 도움을 주는 것은
의식이 어떤가? 의식이.
의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개 구슬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상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다
이런 말이 우리로 하여금
이 본질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데 굉장히 도움을 준다.
그리고 정법안장_ 바른 법은 눈에 있다.
여러분, 실제로 의식이 어디 있는가?
지금 딱 보면
보는 지금 여기가 통째로 하나의 의식이다, 이거예요.
일원상_ 한 개의 둥근 모양을 가진
이 의식을 일원상으로 표현했구나 하고 자각이 되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
자기 눈을 보시면
눈에 실제로 있는 것은 공간이 있죠, 맞아요?
아니 본인이 이걸 느껴보라는 거예요.
확인해 보라는 거예요.
이해하지 말고, 확인해 보세요.
자기 지금 눈을 보면
눈의 자리에 실제 있는 것은
눈에 실핏줄이 있는 그 눈이 아니고
아니 눈은 실핏줄이 많대요, 눈에.
수정체하고 실핏줄이 막 있고 한 그런 게 아니고
그런 건 안 보이고
멀쩡하게 지금 공간이 보인다 이거야.
자기 눈의 자리에 실제 있는 것은
이 공간이다, 이거예요.
이 공간이 의식이다
그래서 이 의식이
이렇게 좀 밝고 투명하게 자각이 된다.
그 느낌이 견성을
“아, 그러네” 하는 게 견성이고
그리고 그 느낌을 가져가는 게, 이 견성이 익어 들어가는
견성 이후에 보림이라고 하는
오후수행(悟後修行)_ 깨달음 뒤의 수행, 깨달음 이후의 수행
깨달음 이후의 수행은
본질인 의식을 자각하는 것
의식을 발견하고, 의식을 계속 챙기는 것.
첫 번째는 의식을 발견하고
두 번째는 의식을 계속 챙기는 것.
이게 생각을 항복 받는 길이다.
이게 인간의 길이에요.
왜 태어났는가?
여러분, 우리가 왜 태어났는가?
이거 하러 태어났어요.
의식을 발견하고
의식하고 하나가 되는 것
내가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바로 깨어 있는 것이 수행이다.
버티는 것이 수행이다.
이해되나요?
멈추는 것
딸려가지 않고 멈추는 것
그러면 멈출 ‘止’자.
관은 의식을 보는 것
의식이 의식을 보는 것
지관_ 멈추면, 끌려가지 않으면
우리가 의식이 집을 나가서 어디론가 집착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관_ 자기가 자기를 보게 된다.
스스로 깨어 있다.
내가 이 자각으로서 스스로 깨어 있는가?
아니면 경계에 그냥 쑥 딸려 가는가?
이게 자각이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따로 수행이 없다.
내가 깨어 있는가?
아니면 깨어 있지 못하고 경계에 딸려 갔는가? 경계에 마음을 뺏겼는가?
마음을 지키고 있는가? 마음을 뺏겼는가?
마음을 지키고 있는 것을 ‘화두’라고 하고
마음을 뺏긴 것을 ‘화두를 놓쳤다’고 하는 거고.
그러니까 한 인간의 일생에서 깨어 있는 시간하고
마음을 뺏긴 시간하고 따져보면
일반인들은 99% 마음 뺏겨 살죠.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까 고통의 세계인 거예요.
그래서 그 고통 덕분에
우리가 정신 차리고 돌아와서 본질을 발견하고
그리고 본질을 자각하는 시간을 가져가는 것.
근데 좋은 거는요.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깨어 있는 시간을 자꾸 챙겨야 되고
그 챙기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느새 생각은 힘이 약해져 버려요.
항복기심(降伏其心)
이때 心은 생각이거든요.
분별심, 분별심을 항복 받는다.
생각을 항복 받는다.
그러면 좋은 게 뭐냐 하면
여러분 생각을 항복받으면 좋은 게 뭐냐 하면
행복해요.
진짜 두말 할 필요가 없어.
생각에 끌려다니면 불행한데
컴컴하고, 뭔가 어둡고, 불안하고, 불행한데
딱 깨어 있으면
아무 일이 없고, 그리고 뭐가 와도 그냥 다 지나가 버리고
나를 이 연꽃처럼, 파드마, 반메훔할 때 반메
연꽃처럼 오고 가는 것에
내가 물들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어요.
그러면 행복해요.
그리고 행복하면 할수록
이 기가 막힌 진리가, 천하의 보물이
나에게 이 마니주, 여의주가
나에게 100% 완벽하게 처음부터,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것은 주어져 있구나.
이것은 내가 어디 돈을 지불하고
애써서 시험 쳐서 획득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거는 처음부터 있는 이것이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같이 있구나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도 찬스예요.
여러분이 지금
처음 오시는 분도 계시고
또 오신 지가 지금 몇 번째 되는 분도 계시지만
전체가 다 공통으로
지금 깨어 있는 이것이 의식이에요.
다시 말하면
지금 깨어 있는 이것이 부처예요.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한테도
육신의 나가 있었고
본질의 나가 있었어요.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신의 나는 돌아가셨죠?
돌아가셨잖아요.
근데 석가모니 부처님한테 있었던 본질의 그 의식은
몸은 돌아가지만
의식은 돌아가지 않는다.
자 그러면 지금 보세요.
여러분의 의식이
여러분의 지금 눈의 자리에 공간으로 있죠.
그거 하고 저의 의식하고가 서로 겹치고 있어.
맞아요?
여기 경계선이 있어서
여기까지는 선생님의 의식이고
여기서부터 나의 의식은 아니죠.
겹치고 있죠.
의식과 의식이 중중무진으로 겹치고 있죠.
그러니까 의식 자체한테는 시공간이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의식이나
지금 나의 의식이
완전히 하나로서 같다.
의식은 불생불멸이고
그 안에 인간의 육체는 생멸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니까 육체를 나라고 하면
그 사람은 생로병사를 겪지만
의식이 나인 걸 깨달은 사람한테는
육체의 생로병사는 하나의 꿈 같은 현상일 뿐이고
그 본질로서의 의식은 영원불변하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새로워요.
언제나 새 것이에요.
이게 진짜 좋은, 진짜 축복, 은총, 축복, 또 가피
이거야말로 가피네요.
우리의 의식은 항상 새것이다.
몸은 늙어도 우리의 의식은 항상 새것 그대로
깨어 있는 이거를
몸에 익혀야 돼.
이게 핵심이에요.
아는 거 하고
몸에 익는 거 하고는 차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수본진심(守本眞心)
본질은 현상에 물들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이 본질을 끊임없이 챙겨 나가서
모든 것이 몸에 익어서 완성되는 것처럼
이 도가 몸에 익어서
이 깨어 있는 각성이
언제나 깨어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깨어 있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가져가면 가져갈수록
생각의 힘은 빠져서
더 이상 생각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 때가 오더라고요.
이제 이 말하고 쉬겠습니다.
평상심(平常心)의 뜻이
평정이 늘 이어지는 마음
상_ 늘 이어지는
평정이 뭐예요?
차분한 이 마음이 편안한 이 마음이
늘 이어지는 게 평상심이에요.
이렇게 되기까지는
본질을 발견하고
본질의 힘을 계속 키워서
생각의 힘이 빠지면
평상심이 내한테서
내 특히 몸에서
이것이 익어져서 된다.
'김홍근_육조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단경73] 살아서 당겨 죽는다 (0) | 2025.01.16 |
---|---|
[육조단경72] 현상에서 잘 사는 것이 중도다 (0) | 2025.01.15 |
[육조단경71] 내 몸도 포함하는 이 공간 자체 (0) | 2025.01.09 |
[육조단경70] 깨달음이 왜 필요한가? (0) | 2025.01.08 |
[육조단경69] 공기와도 같다 | 깨어서 살핀다 (0) | 2025.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