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뭐냐?
본질인 의식이
그거는 깸인데
그 의식이 꾸는 꿈이 현상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 의식이
본질이 왜 현상이라는 꿈을 꾸는가?
이걸 경험하기 위해서 꾼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재 지금 깸인 의식이
꿈인 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이게 지금 중도를 말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깸과 꿈
이것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서
깸과 꿈이 동시이다.
우리가 공부를 할 때 항상 하나의 감각이 있는데
그 감각은 지금 동시, 동시다.
이런 말은 ‘즉’이다.
불교에서는 반야심경에 즉이다.
본질과 현상이 즉하고 있다.
또 다른 말로는 ‘연기’다.
연기, 연기하고 있다.
또 다른 말로는 ‘불이’다. 둘이 아니다.
본질과 현상이 둘이 아니다.
또 다른 말로는 ‘중도’다.
다양한 표현이 있는데
이게 하나의 감각이에요.
지금 그러면 나는 누구냐?
나는 본질과 현상인 거죠.
지금 나도 본질이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계가 본질과 현상의 중도다, 연기다.
붓다라고 하는 분이 깨어나면서
“아, 그 공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을 한 거예요.
어떻게 발견했는가?
본질에서 현상이 피조되어서 나온 게 아니라
본질이 피조가 아니고
본질이 드러난 것이 현상이다.
요거 ‘아’다르고 ‘어’다른데
굉장히 큰 차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본질이 현상을 만들었다.” 이래 되면
현상은 사라져도 본질은 안 사라지잖아요.
맞아요?
그런 주종 관계인데
근데 붙다가 깨달은 것은 그게 아니고
이 현상은
있는 그대로 본질이 나타난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현상과 본질이 하나다,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이게 하나의 아주 위대한 발견이에요.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할 때
현상이면서 동시에
즉, 현상이면서 동시에 본질인 거예요.
그래서 이게 그 논리적으로는 따라잡기가 어려워요.
논리적으로는 창조주가 있고, 피조물이 있어서
이렇게 설정을 하면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가 쉽거든요.
근데 이거는 연기설은 그 논리를 떠난 거예요.
본질이 일어난 것이 현상이에요.
그래서 현상에서, 모든 현상에서
그 현상이라고 하는 그 관념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모든 현상이 있는 그대로 본질이다.
약견제상, 만약에 본다면
제상, 모든 현상에서
비상, 현상이라고 하는 그 개념을
비, 제거하고 볼 수 있다면
즉견여래,
여래, 여래란 말은 중도, 중도를 본다.
이 말은
현상이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본질이라고 하는 것
이게 지금 아주 핵심적인 붓다의 깨달음이에요.
중도예요.
그래서 말 난 김에 한 말씀만 더 덧붙이면
항상 우리가 공부를 할 때
중도가 최종적인 붓다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공부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돼요.
우리가 일반인이 현상만 알고 살다가
이런 가르침에 의해서 본질을 한번 깨달아요.
근데 본질을 깨달으면
본질은 너무나 이것이 진리 자체라서
손댈 게 없어요.
본질은 진리 자체라서 손댈 게 없어.
그러면 우리는 지금
그러나 깨달았지만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 말은
우리가 실제 사는 것은 현상에서 살잖아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중도는
현상에서 살다가 본질을 깨닫고
다시 현상에서 돌아와서
현상에서 잘 사는 게 중도예요.
이해되나요?
그래서 이 선불교에서는 경계하는 게 뭐냐 하면
깨닫고 본질에 집착하지 말자.
이걸 굉장히 강조해요.
그래서 부처님 같으면 금강경에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내려놓아야지
뗏목을 이마에 이고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된다.
근데 뗏목이 아니라 바이킹 배 정도 되면
머리에 못 이고 가.
걔네들은 호수가 워낙 많아서.
바이킹의 거기는 호수와 바다, 피요르드 협곡이 워낙 많아서
배가 수시로 필요하기 때문에
걔네들은 크게는 안 만들어도
그 육지에 닿아도 배를 또 지고 가요.
또 체격도 좋고 해서, 걔네들이.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대나무로 만든 뗏목이라면
강을 건넜으면 당연히 놓고 가야죠.
깨달음이 뗏목이에요.
더 말하면,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본질이 뗏목이에요.
화성(化城)이에요. 화성
최종 목표가 아닌 거예요.
제가 여러분하고 함께 오랫동안 공부를 하면서
저의 목표는
제가 공부를 해보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몰라도
저는 그래요.
저는 처음부터 이 참전 공부를 한 목표가
인간이라는 것은
이 업이 있어서, 아주 완강한 업이 있어서
정말로 안 바뀌는구나 하는 걸, 저는 절감했거든요.
그래서 이 인간의 어떤 의식변화를 위하여
제가 20년이나
문화재단의 고전아카데미에서
그 좋은 고전을 가지고 일반인들을 위한 교육을 펼쳤지만
결과적으로 20년을 해봤는데
결론은 ‘인간은 안 변하는구나’ 하는 결론인 거예요.
그러면 인간을 정말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을 변화시킨다, 이 말은
제가 뭘 발견했느냐 하면
업을 발견한 거죠, 업장을, 업습, 습기라고도 하죠, 습관.
인간의 완강한 습관, 고정관념.
이것이 인간한테는 박혀 있어서
이 웬만한 교육 가지고는
겉만 좀 바뀌지 속은 안 바뀌더라.
그래서 속을 바꾸는 교육을 찾아서
저는 참선했거든요.
그래서 저의 참선의 목표는
제가 참선한 목표는
첫 번째는 물론 제가 스스로 행복해지는 거죠.
자유로워지는 거죠.
근데 그것보다 더 한 저의 목표는
저도 저지만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업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하는 게
저의 초지일관된, 저의 원력이에요.
불교 용어에 원력이라는 말 아시죠?
보현보살의 행원
원력을 실천하는 그게 보현보살이잖아요.
그러니까 저의 원력은
일반인이 어떻게 하면 업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이 문제를 저는 정말 밝히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연구를 해왔는데
자유를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해요.
그리고 일반적인 심리학 용어를 쓴다면
마음치유라고 해요.
그러니까 자유, 해탈, 마음치유가 목적이고
중간에 있는 화성(化城)이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 꼭 들려야 하는
가장 중요한 중간의 목적지는
깨달음이에요.
그래서 제 스스로는 철두철미하게
깨달음이 목적이 아니고 해탈이 목적이에요.
해탈을 위해서는 반드시 깨달아야 돼요.
그래서 깨달음을 하는데
문제는 깨달음을
중간에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깨달음에서 머무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부처님은 많이 경계하신 것 같아.
그래서 중도를, 본질을 발견한 다음에는
그 본질을 버리고,
현상에서 잘 사는 중도를 완성하자.
이게 초지일관 대승불교
부처님의 본뜻이고
또 대승불교에서 아주 추구하는 그런 가르침이라고
저는 요즘 최근에 더욱더 확신하게 됐어요.
깨달음을 화성으로 보는 거예요.
깨달음이 목표가 아니다.
그거는 중생들로 하여금 이렇게 유인하기 위해서
힘내라, 저기 목표가 멀지 않았다라고 하기 위해서 만든 거지.
결국에는 해탈이 깨달음,
해탈이 목표다.
그래서 해탈이라는 것은 자유잖아요.
자유는 업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본질의 힘을 가지고
현장에서 업장을 이겨내기
그래서 내가 행복하게 살기
한마디로 말해서 잘 살기.
우리가 하는 공부를 불법(佛法)이라고 해요.
불법이라고 할 때
불법이 불안(佛眼), 법안(法眼)에 준말이에요.
불법이라고 할 때 불법의 뜻이 무엇인가?
불법이란
불안과 법안.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공부는
불안과 법안을 뜨는 거예요.
법안은 본질을 깨닫고, 본질과 하나가 되는 것이 법안이고
불안은 본질을 현장에서 실천하기
이게 불안이에요.
오안 중에서 우리의 공부는 불안이 목표인데
그러려면 법안을 떠야 한다.
그래서 불법 할 때
불안과 법안의 안목
이렇게 말을 하거든요.
그래서 하여튼 불법이 목적이다, 이 말은
우리가 현장에서 나도 좋고 남도 좋게
그렇게 살아가는
그게 목표다, 이 말입니다.
/혜능은 오조에게서 돈교와 의발을 물려받았다.
돈오, 단박에 깨닫는
즉 당장의 깨달음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본질인 자성을
이미 완벽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자 돈오,
돈_ 단박에
오_ 깨달음
단박의 깨달음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본질인 자성을
이미 완벽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서두에
우리가 좋은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본질을 먼저 깨달은 사람한테서 배우면
본질이 어렵지 않다는 거예요.
그리고 돈오, 단박에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딱 한 가지예요.
이미 있기 때문이에요.
다시
지금 이미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게 깨달음이다.
이해되세요?
지금 내가 없고, 미래에 깨닫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깨달음은 당장에 일어나요.
왜냐하면 이미 있는 것을 확인하면 되니까.
그러면 이미 있는 것
우리한테서 이미 있는 것
한마디로 말하면
의식
제가 저의 의식을 어떻게 느끼느냐 하면
이렇게 딱 보면
요 시야 전체
시야 전체 공간
이게 그냥 그대로의 의식인 거예요.
근데 이 의식에
눈앞에만 있는 게 아니고
전체가 다, 360도 전체가 여기...
지금 몸뚱이가 들어앉아 있는
이 투명한 공간 전체가 의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의식 공간에
인연 따라 지금 모든 현상이
이렇게 아름답게, 또렷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이거야.
요 의식이라고 하는 투명한 공간 자체는 안 변하고
항상 이대로고
이거 안에
인연 따라 지금 우리 법회가, 육조단경 강의가
지금 이렇게 펼쳐지고 있어요.
요 의식 공간 속에 나도 들어가 있어.
이 몸뚱이도 지금 들어와 있어요.
이렇게 같이 지금 펼쳐지고 있어.
근데 아뿔싸!
지금까지는, 혹은 일반 사람들은
펼쳐지는 모양만 보고
이것이 펼쳐지고 있는 의식이라고 하는 지금 이 투명한 공간 자체는
이건 꿈에도 이걸 모르고 사는구나.
저도 이거 깨닫기 전에는
나타난 것만 보느라고
모든 것이 나타나 있는 지금 이 의식
이 또렷한 의식, 투명한 의식
지금 이렇게 있는데
이거를 놓치고 살았구나 하는.
그러니까 여러분
꿈꿀 때하고 똑같아요.
지금 생시나
생시의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지금 이 투명한 공간이 있고
여기에 모든 것이 펼쳐지는 거나
꿈꿀 때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꿈이라고 하는 투명한 공간이 펼쳐지는 거나
똑같은 거예요.
그 안에 이렇게 나타나는 거나
구조가 똑같다.
그러니까 지금 돈오한다, 이 말은
단박에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단박에 깨닫는다고 한다.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자기를 깨닫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몸이 자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몸은 보이니까.
자기는 보는 것이다, 이거예요.
따라와 보세요.
몸은 나가 아니에요.
왜냐?
보이니까.
맞아요?
나는 누구인가 하면
몸을 보는 거
이 지금 삼라만상뿐만 아니고
내 몸도 포함해서 다 본다, 이거예요.
생각도 보고, 감정도 보이잖아요.
지각이 되잖아요.
그러면 나는, 진짜 나는 본질은 무엇인가?
삼라만상과 내 몸을 보는 것이다.
그 보는 것이 어디 있는가?
눈의 자리에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잖아요.
투명한, 공간
이게 의식이다, 의식.
이게 본질이다.
그러니까 이거를 그라운드, 필드, 바탕, 모든 것이 일어나는 무대
여기서 지금 삼라만상이 인연 따라
이렇게 모양도 나타나고, 소리도 나타나고, 냄새도 나타나고, 맛도 나타나고
촉각도 나타나고,
나타나는 건 전부 다 각이다, 각.
시각, 청각.
각은 의식을 각이라고 그러잖아요.
각, 깨달음이다, 이거야
그대로 깨달음이다.
나타난 것도 깨달음이다.
의식 속에 지금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생각, 감정까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이걸 또 다른 말로 하면
지금 보여지는 거는
안식
이건 불교 용어니까 불교공부 조금 하셨잖아요.
보여지는 거는 안식
들리는 거는 이식
냄새는 비식
코로 인해서 인식되는 것
눈으로 인해서 인식되는 것 안식
이식, 귀로 인식되는 것, 소리는.
냄새는 코로 인식되는 것
맛은 혀로 인식되는 것
신식 몸에 식은 촉감으로 인식되는 것.
생각은 불교용어로 의식이라고 써요.
육식, 의식.
그러니까 지금 각이라고 표현하건, 시각이라고 표현하건, 안식이라고 표현하든
각, 식, 이 말이
전부 의식이라는 뜻이다, 이거예요.
여기서 제일 좋은 거는
이런 말은 듣다가, 듣다가 점핑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분별심이 이 말을 자꾸 분석을 해.
분석을 하면 나누어지거든요.
그러면 이게 포착이 안 돼요.
분별심이 자꾸 포착하려고 하는데 안 돼요.
허탕이야.
그런데 듣다가, 듣다가, 듣다가 어느 날
탁 퀀텀 점프
요즘 양자역학에서 양자가 퀀텀이거든
양자역학의 점핑
갑자기 양이 축적되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양이 축적되면, 자꾸 이런 말을 들으면
결국에는 질적으로
“실제로 그렇네.”하고 점핑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실제로는
투명한 의식 공간입니다.”
이런 말을 듣다가 듣다가 이런 말을 듣다가 쌓이면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앞을 보고 있는데
“이게 의식이네”
그냥 시야 전체가 통째로 이게 그냥 의식이네.
그리고 이 의식에 삼라만상의 현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지나가고 있는 거예요.
“이거 진짜 그렇네.”
그리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의식이 그런 모양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져서
약견제상 비상즉견여래
모든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양이 실제로는 의식임을 만약에 본다면
여래를, 중도를 보는 것이다.
중도란 말은
현상이 본질이고, 본질이 현상이고.
이게 지금 중도.
이렇게 탁 듣다가 듣다가
통찰이 진짜 딱 일어나면서
“진짜 그렇네” 하고 쑥 넘어온다, 이거예요.
듣다가 듣다가
“진짜 그렇네” 하고 쑥 넘어온다.
그 핵심이 이것이다.
지금 제가
제가 이것 할 때는
제 시야 전체를 말하고 있어요.
제 몸을 포함한 360도 전체.
이것.
이것이 맹탕이 아니고 자기의식
투명한 자기의식.
투명한 자기의식 속에
인연 따라 지금 모든 것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이 모두 나타난 것은
현상으로 나타난 나에게 주어지는 선물
이것을 나에게 주어지는 선물
그런데 내가 분별심의 사로잡혀서
좋다 나쁘다 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느라고 고통받고 있는 것.
선물인 걸 까먹고
나를 성숙시켜 주기 위한 선물인 걸 까먹고
내가 스스로 좋다 나쁘다 하면서 고통받는 것
이게 지금 우리들의 실상이다.
자 오늘도 지금 중요한 이야기했네요.
두 가지 말했어요.
첫 번째는
결국 공부는 본질주의에 빠지지 말고
중도로 회통이 되어서
현상에서, 본질의 입장에서 현상을 잘 살기
물론 깨달음을 확실하게 해야 되는데
깨달음 목적은 해탈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정말 이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기
이 공부가 굉장히 딴딴하고, 균형 잡히고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잘 가는 공부가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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