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부가 유리한 게
이렇게 전체 의식을 무심
현상으로 무심의 입장에서 현상이 드러난 것은 평상심
따라오십니까?
의식 자체는 무심
의식을 모르고 하는 분별심 말고
의식의 입장에서 무분별의 입장에서 평상의 분별을 하는 것
무분별의 입장에서 분별을 하는 것
이게 결국 중도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
그래서 항상 요 중도의 균형 감각
이게 우리 공부의 꽃이에요.
항상 요 중도의 감각.
공에도 치우치지 않고 색에도 치우치지 않고
항상 그 중간에
본질을 발견해도 머물지 않고, 중도로 오고
색에 떨어져도 머물지 않고, 돌아오고.
항상 요 중도의 감각
이게 우리 공부의 아주 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거를 우리가 가지고 공부를 하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내가 현상에 잠시 집착을 하더라도
빨리 알아차리고 놓고 이 자리로 돌아오고
그리고 본질을 또 자각을 해도
거기에 너무 또...
왜냐하면 현상에서 너무 시달리면
텅 빈 본질이 좋아서 자꾸 거기 또 머무르고 싶어.
처음에 발견한 사람은 머무르고 싶어 해요.
이해되나요?
근데 거기도 머무를 수가 없다는 거죠.
항상 이 중도의 감각을...
이게 지금 우리 공부의 꽃이라서
이걸 알고 공부합시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그동안 물을 찾았다”
이런 비유나
“인간이 공기 속에서 공기를 찾았다”
그 비유가 지금 같아요.
그래서 이거를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내가 의식 속에서 의식을 찾았다, 이 말이에요.
또 한 번 비유를 다른 말로 해본다면
“내가 꿈속에서 꿈을 찾았다.”
전체가 꿈이다, 이거예요.
못 찾은 이유는
꿈속에서 꿈을 부분으로 찾았기 때문에 못 찾았다, 이거예요.
보세요.
내가 꿈속에서 꿈을 찾으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있고, 꿈이 있죠?
따로 되잖아요.
그래서 못 찾는 거예요.
내가 있고 꿈속에서
꿈속에 내가 나오잖아요.
근데 그 내가 꿈을 찾아.
그러면 나를 떼놓고 꿈을 찾으니까
온전한 꿈이 안 되겠죠.
깨달음은 전체를 깨닫는 건데
내가 깨달음을 찾으면
전체를 깨달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는 빼놨으니까.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찾으면 안 돼.
찾으면 안 돼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가만히 있으면
안 찾고 가만히 있으면
이 전체가 밝아져.
다시
찾으면 찾는 에고와 주관과 대상으로서의 전체인 객관이
이미 나누어져 있어서
전체를 못 깨달아요.
그럼, 전체를 깨달으려면
찾으면 안 돼.
멈춰야 돼.
그래서 탁 멈춰.
멈추면
멈춘다, 지(止), 스톱한다.
여러분
이러면 이게 무슨 글자가 돼요?
정(正)자가 되잖아요.
선 앞에서 멈추는 게 바른 거예요.
그럼 선은 무엇이 선인가?
이 하나의 선
선 앞에서 선을 넘지 않는다, 이거예요.
이 선이 뭔가?
찾는 것이 하나의 선이야.
그러면 그 선을 넘으면 찾는 거잖아요.
그러면 선 찾는다고 하는
일(一)이라고 하는 것은 찾음이에요, 찾음.
찾는 것 앞에서 멈춘다.
그러면 전체다.
그러면 지관, 전체를 본다.
멈추면 전체를 본다.
이게 깨달음의 원리예요.
왜냐하면 모든 깨달음은
본질을 깨닫는 거고
본질은 전체고.
전체를 내가 찾으면
찾는 주관하고 대상으로서의 전체가 나누어져서
진짜 전체가 아니야.
이해됐나요?
이제 비밀이 하나 나오네, 여기서.
설렌다, 여러분.
이런 말 할 때는 설레요.
비밀을 발견하게 되니까.
연기를 초기불교에서는
연기를 현상계의 법칙으로만 해석해요.
다시
불교 교리에서의 연기는
현상계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하는 해석으로 봐요, 연기를.
근데 대승불교로 넘어오면
그 연기(緣起)가 성기(性起)가 돼요.
초기 불교의 연기(緣起)가
대승불교에 꽂힌 화엄사상에서는 성기(性起)가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기(起)는 일어난 것이 현상
성(性)은 본질
모든 현상은 본질이 일어난 것이다.
초기 불교에서 연기는
본질은 이야기 안 하고
현상에서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연기라고 해석을 해요.
제 말 이해되나요?
근데 이게 부족한 거야.
왜냐하면 현장에서만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대승불교에 들어오면
연기가 성기로 바뀌어요.
더 깊어져요.
본질과 현상과의 관계가
둘이 아니고 하나다는 뜻이에요.
자, 그러면 이 성기의
이게 화엄사상의 핵심인데
여러분 화엄사상의 핵심.
본질이 본질 하는 순간
현상을 배제한 본질은 본질이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가짜잖아요.
그거 그 말이라는 거예요.
현상을 배제한 본질이
그러니까 부분을 배제한 전체가
전체냐 이거예요.
어때요? 여러분
아니잖아요.
부분과 전체가 하나가 되어야 전체지, 그죠?
그래서 본질주의는 이미 본질에서 멀어진 거야.
이해되나요?
그러니까 ‘깨달음’ 하면 깨달음의 반대말인 미혹이 있어요.
맞아요?
깨달음도 없어야 미혹도 없어져.
연기예요, 연기.
깨달음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미혹
무명, 미혹도 있어요.
그러니까 깨달음을 주장하면
미혹을 주장하는 거와 같아
이해되죠?
그러면 깨달음이 없어져야 미혹도 없어져요.
중도가 되어야
깨달음이 진정한 깨달음이지
‘깨달음이다’ 해버리면
이미 그 반대말을 가지고
그 자체가 반대말을 가지고 있어서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점에서 우리가
이 본질이 아무리 중요하고, 깨달음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걸 강조하는 순간 굳어져서
현상으로 떨어져 버려.
그게 지금 아주 예민하게
이게 틀렸는데
“왜 틀렸지?” 하고...
여러분 굉장히 유혹이 들어요.
본질을 깨닫고 나면
본질을 처음 깨달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이게 다 본질이에요, 그냥.
이 공기도 본질이고 물질도 본질이에요.
그러니까 전부 다 본질이라서
아무 때나 살고 싶어.
어차피 본질이니까.
본질의 입장에서는
현상이 정말로 꿈 같아서
“꿈을 어떻게 꾸든 무슨 상관이야?”
이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게 돼요.
그런 유혹이 굉장히 강해.
그런 주장도 해.
그렇지만 본질에서만 살 수 있느냐 이거예요.
더 뒤집어 말하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질은 완벽하기 때문에
손댈 것이 없기 때문에
현상을 잘 살아야지.
뭐가 더 중요하냐 이거예요.
중도는 현상이 더 중요하다는 주의예요.
그래서 저는
부처님이 참 현명하다고 느껴지는 게
부처님이 말씀하신 삼법인, 그리고 사성제,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삼명
깨달음이란 무엇인가가
부처님이 딱 말씀하신 게 삼명이에요.
지난 시간에 제가 잠깐 소개했는데
저는 정말 부처님은 현명한 분이구나 느꼈어요.
삼명이, 깨달음을, 세 가지 밝음
삼명의 반대말은 무명이잖아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은 삼명이에요.
다시 한 번 복습합시다.
1) 천안통(天眼通)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밝음은
천안이라고 하는 신통
천안통의 내용은
12연기의 통달하기
천안이라는 말은
부처님 나시기 훨씬 전에
힌두 사회에서 이미 많이 쓰던 말이에요.
천안이라는 말은
하나의 신통으로서
이미 힌두 사회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언어였어요.
윤회니, 이런 것처럼.
근데 부처님은 그 천안을 12연기에 통달하는 걸로
뜻을 또 바꿔서 썼다 이거예요.
부처님이 천한통 할 때는
12연기를 좌우로 왔다갔다 해도 다 소화되게.
12연기가 부처님 가르침의 그냥 핵심이에요.
근데 거기에 밝아지는 거
그게 천안통이고.
2) 숙명통(宿命通)
숙명통은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
자기를 정말 꿰뚫어 보는 거예요.
다시
지금 있는 대로
자기를 아주 객관적으로 꿰뚫어 보는 거예요.
그런 신통, 그런 안목.
그러면 뭐냐?
지금 내가 있는 걸 보면
나의 과거가 보인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래요?
지금 자기가
“내가 살이 쪘구나” “내가 좀 말랐구나”
왜 이런가 보면 어때요?
자기 먹은 만큼, 에누리 없이
철저하게 한 치의 빈틈없이 그렇게 되어 있죠.
지금 몸 하나만 봐도 그런데
여러 가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격, 나의 취향
온갖 거 있잖아요.
그것이 그대로 나의 과거가 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다는 거예요.
이거를 정말 꿰뚫어 보는 거예요
이건 뭐예요?
저는 부처님이 정말로 현명하시다고 보는 것은
숙명통이 되어야 깨달음이라고 하셨는데
이 숙명통의 핵심은
현상의 법칙에 통달하는 거예요.
숙명통은
현상의 법칙에 통달하는 거예요.
그러면 현상의 법칙은
에누리 없이
지금 내가 어떤 모양인가를 보면
“과거에 내가 어떻게 했구나” 하는 것이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3) 누진통(漏盡通)
누_ 셀 루(‘漏)’ 자, 샌다.
뭐가 새느냐?
욕망이 새요.
욕망이 새면 그 욕망은 번뇌가 돼요.
이해되나요?
대상에 내 마음을 뺏기면
욕망이 새.
그럼 그 새는 욕망은 번뇌가 돼요.
그래서 누, 샌다
이것이 진, 끝나는 통
번뇌가 끝나는 통
열반을 말하는 거죠.
누진통
누가 끝난다?
번뇌가 끝난다.
여러분 번뇌가 언제 끝나요?
죽어야 끝나요?
맞아요.
그래서 제가 배운 선생님들은 거의 한결같이
인간의 최고 지혜는
“살아서 당겨 죽는 거다.”
저는 그렇게 배웠어요.
한결같이 제가 배운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똑같이 말했어요.
“인간의 최고의 지혜는
살아서 당겨 죽는 거다.”
그 분별심이 당겨 죽는 거예요.
이해되나요?
분별심의 다른 이름이 에고잖아요.
그러니까 분별심이 당겨 죽는 거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당겨 죽으면 일어나는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게
“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이게 당겨 죽은 사람의 이야기예요.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이때 내 뜻은 개체의 뜻이죠.
당신 뜻은 전체의 뜻이죠.
그러면 전체의 뜻에 따르면
개체로서의 누(漏)가
번뇌 고통이 끝난다는 거죠.
그래서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깨달음은 전체를 깨닫는 거다.
오케이? 이해돼요?
깨달음은 전체를 깨닫는 거다.
전체를 깨달으려면
반드시 개체가 녹아야 된다.
이해돼요?
개체가 있으면서 전체를 깨달을 수는 없다.
그건 가짜다.
그거는 에고가 오히려 꾀부리는 거다.
전체를 깨달으려면, 깨달음이 되려면
깨달음이 사라져야 돼.
깨달으려면, 바른 깨달음이 되려면
깨달음이 사라져야 돼요.
이것을 십우도에서는 소가 사라진다고 해.
중도라는 것이
현상에도 집착하면 안 되지만
본질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미혹에도 빠지면 안 되지만
깨달음에도 빠지면 안 된다, 이런 말이
얼마나 우리를 경각시키는가.
그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깨달음 뒤에 숨어 있는 그 에고를
경험해 본 사람이 하는 소리들이에요.
결론은 중도다. 이거예요.
중도.
깨달음도 버려야 된다.
그러니까 현상도 아니고, 본질도 아니고
중도에서 현상과 본질이 완전히 하나인 것.
그거를 끝까지 몸에서 감각으로 익히기.
끝까지 이걸 몸에서 감각으로 읽히기.
방법은 화두.
모르는 사람은 질문을 당하고
아는 사람은 스스로 이것을 놓치지 않는 것.
이걸 끝까지 이걸 가져가는 것.
분별님이 우리를 너무나 빨리 속이니까
화두를 들고 있어야 안 속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중생이 알았다고 해서
본질로 살 수 있는가?
천만에 만만에, 택도 없다 이거예요, 택도 없다.
해봐라.
택도 없다.
법문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은데
돌아가면 그냥 도루묵이야, 그냥.
그러니까 화두 하나를 딱 챙겨가는 것.
누가 뭐래도.
저는 이것이 길이라고 봐요.
네 감사합니다.
마치겠습니다.
'김홍근_육조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단경75]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 의단독로(疑團獨路) (0) | 2025.01.23 |
---|---|
[육조단경74] 한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 | 정법안장(正法眼藏) (0) | 2025.01.22 |
[육조단경72] 현상에서 잘 사는 것이 중도다 (0) | 2025.01.15 |
[육조단경71] 내 몸도 포함하는 이 공간 자체 (0) | 2025.01.09 |
[육조단경70] 깨달음이 왜 필요한가? (0) | 2025.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