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91] 의식을 탐구할 때, 벌어지는 일 | 의식으로 깨어서 산다는 것의 의미

Buddhastudy 2025. 3. 27. 19:45

 

 

자기 눈이 있는 자리에

실제로는 이 세계가 지금 들어앉아 있잖아요.

그런데 이 세계가 은현동시다, 이거예요.

하나의 의식이라고 하는

깨어 있는 이 뚜렷한 자각의 바탕 속에

삼라만상이 이렇게 나타나 있어서

은현동시가

지금 정법안장에 이렇게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나누어지느냐? 이거예요.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이것이.

 

실제로는 나누어지지 않지요.

그래서 불법은 불이법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 그 말을 지금 하는 거예요.

 

이것을 발견하는 것을 견성이라고 했는데

견성의 뜻에는

이것을 발견하고 난 뒤에

조금 더 철저하게 밀고 나가야 돼요.

 

우리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견성이라고 하는 것을 작게 볼 때는 초견성

이 정법안장을

정법안장이란 말은

지금 멀쩡하게 눈 뜨고 있는데

내 눈이 있는 자리에 실제로는 이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텅 빈 의식과 거기에 나타난 찰나 생멸하는

이 현상, 삼라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데 여기서

이것이 나누어지지 않는 한 개의 현실인데, 한 개의 실재인데

지금 문제는

이걸 나누면서부터 모든 사단이 벌어진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걸 처음 발견하는 것을 초견성이라고 하는데

견성에는 초견성 + 이 성품을 끝까지 규명하는 것,

 

성품을 끝까지 규명한다, 이 말은

정법안이 의식이구나하는 걸 알아챈 다음에는

알아채도 여전히 습관은, 아무개를 나라고 하는 습관은

여전히 굳건하다 이거예요.

 

근데 거기서 이 의식을 계속 탐구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의식이 이것이죠.

이것이 무엇인가?

이거를 발견해서 끝나는 게 아니고

발견은 정말 시작이고

계속 이 의식을 탐구한다.

 

의식을 탐구하면 할수록

지난 시간에 설명해 드린 것처럼

의식이 지금 이렇게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갈수록 분명해진다, 이거예요.

 

그러면 지금도 보면서 의식이 보니까

김 아무개, 뭐 아무개라고 하는 것은 떨어져 나가고

아예 그냥 흔적도 없고

그냥 한 개의 의식이 꽉 차 있고

그리고 이 안에 의식이 동시에

공간인 법신, 시간인 보신, 그리고 삼라만상인 화신이 동시에

자기를 하여튼 동시에 탁 이렇게 나누어서 나타난다 할까?

하여튼 좀 신기하긴 해요.

 

이 의식을 계속 탐구하면서

그러면서 이 의식의 입장에서 자꾸 살아가는

다시 말하면 의식의 입장이 몸에 체득된다.

 

저는 계속 이거를 스포츠로 비유하고 싶어요.

스포츠를 배울 때 폼을 한 번 배웠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폼을 배웠으면 수없이 이걸 해야 되잖아요.

이거를 쉐도우

쉐도우 프렉티스라고 불렀네. 저희 때는.

그러니까 폼을 한 번 배우면

저 같으면 테니스를 오래 배웠기 때문에

한 번 포핸드 스트로크를 배웠으면

틈만 나면 이러는 거죠.

 

계속 집중을 해서 익혀 나가는

의식을 발견한 다음에는

의식을 익혀 나간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완전히 몸에 붙어서

의식이라고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의식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움직여지는

그렇게 몸을 익어나가는

하여튼 동양에서는 그걸 도()라고 했어요.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이 도를 닦는 거예요.

도를 닦는 방법은

처음에 이것, 이 의식, 혹은 화두

하여튼 어떤 진리 자체인 공적영지 자체인 이 의식을 한번 알아채고

그리고 이 의식을 계속 탐구한다.

계속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면 할수록

몸에 붙어서 그 의식이 체득된다.

 

근데 확실히 처음에 의식을 탐구할 때는 재미있어요.

좀 약간 이렇게 신통해, 신통방통해요, 의식이라는 게.

 

눈에 안 보이는데 이렇게 있어서

크기는 뭐 가늠할 수 없는데

근데 이것이 정말 환하게 눈앞이 가득 차서

그냥 이 의식 속에 모든 것이 인연 따라 들락날락하고 있는데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은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어, 진짜로.

 

그런데 그 실체 없는 것이 일어나고 있는

이 지금 이 뭐라고 할까?

많은 분들이 비유할 때

무대 자체, 바탕 무대, 뭐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핸드폰에 액정 화면

이런 식으로 비유하잖아요.

 

이 텅 빈 의식이 이렇게 꽉 차 있어서

여기에 지금 삼라만상이 인연 따라

지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신기해요.

갈수록 신기해.

 

/오직 견성만을 말한다./

이 말은

의식 하나를 철저하게 연구한다.

의식 하나를 의식이라고 하는 폼을 얻은 다음에는

그 폼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

계속 쉐드오브 모션을 계속 한다, 이거야.

이 뭐꼬?’을 계속 한다, 이거예요.

그리고 그 과정이 재미있어요.

알면 알수록 의식이라는 것이 참 신통방통해.

 

의식이 부처고, 의식이 신이잖아요.

불자 같으면

의식을 연구한다이 말은

부처를 실감나게 이게 부처구나하는 것이 아주 구체화되는 거고,

기독교 신자 같으면

의식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의식을 탐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하고 아주 구체화된다, 이거예요.

정말 재미있는 작업이에요.

 

/오직 전성만을 논한다는 육조의 종지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다.

이런 말은 철저하게 본질인 의식을 깨달은 사람의 안목을 드러내고 있다.

의식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이 오직 의식 하나임을 분명히 자각한다./

 

의식 하나임을 일심이라고 했어요, 일심.

이때 심은 의식, 한 개의 의식

일심이야말로 원효 스님의 사상을 일심이라고 부르죠.

원효 스님도 이 세계가 한 개의 의식이라고 하는 거에 철저했다 이거예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의식의 입장에서 하게 된다./

이거는 제가 자꾸 말씀을 드립니다.

중요한 거예요.

 

자기를 보면

아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 신구의 삼업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어떤 입장에서 하는가?

아무개 입장에서 개체인 아무개 입장에서 하는가?

아니면 전체인 의식 입장에서 하는가?

이걸 자기가 자기를 관찰해 보면 드러나겠죠.

계속 이거 핀트를 맞춰간다, 초점을.

아무개에서 하는 생각, , 행동을

의식의 입장에서 하는 생각, , 행동으로

핀트를 계속 조정해 나간다.

이게 지금 공부다, 이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딱 앉아서

이 의식 자체인 공적영지를 내가 계속 체득해 들어가는 것.

그것이 공적영지로서의

딱 움직이지 않는 입장에서 이 세계를 보는 것.

 

그러면 부처님처럼 삼법인

세계의 진리의 도장, 제행무상, 확실해져요.

의식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보면

이 세계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그리고 일체개고

그리고 이것이 만약에 터득이 되면

열반적정

나는 더 이상 이 현상에 끄달리지 않게 되는 열반적정

이것이 일어난다, 이거예요.

 

아무개라고 하는 그런 입장은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져 없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짱하고 깨어 있는 이 의식이

이렇게 보고 있는.

 

그래서 여기서는 시간, 공간이 사라지는, 해당되지 않는

그래서 부처님도 이랬겠구나

, 지금 내가 이렇게 보는 이 감각

부처님도 이렇게 보셨겠구나

소리가 들리면

부처님도 이렇게 들으셨겠구나

 

그 시공을 넘어서

의식으로 깨어난 사람의 입장이 스스로 자각이 되는

이렇겠구나하는 그 느낌이 분명해진다, 이거죠.

그러니까 그 공부가 지금 꾸준하게.

 

이거는 일종의 습관을 바꾸는 거죠.

에고의 입장에서 하는 그 습관을 바꾸는 거잖아요.

[습관 바꾸기]가 시간이 조금 걸리죠?

대신에 꾸준하게 해야 돼요.

 

좋은 점은 항상 제가 여러분한테

반야심경의 후렴구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게 참 좋아.

진짜 우리한테 아주 희망을 줘요.

 

어떤 식으로 희망을 주는가?

꾸준하게 이 의식을 탐구해 가면

아제아제_간다 간다

바라아제_ 피안으로 간다

아제아제 바라아제_ 간다 간다 피안으로 간다

바라승아제_ 피안에 다 왔다.

 

아 얼마나 좋아요

간다 간다 피안으로 간다.

피안에 어느새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새

바라승, _ 완료형이거든요.

아제 피안에 다 왔다

모지사바하_ 깨달음 만세

 

[꾸준히 가고가고 가면 어느새 다 왔다] 이거예요.

그런 느낌이 갈수록 공부가 익어가서

힘이 딴딴하게 붙어서 간다간다, 언제 다 갈까 하고

꾸준히 간다간다 하면 어느새 다 왔다

아 다 왔네하는 느낌이

이렇게 아주 물밀듯이 이렇게 온다 이거예요.

 

/오직 성품을 철저하게 깨닫는 전성만을 논할 뿐이다./

여기에 한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지금 선정과 도거, 해탈과 미혹이라는 이런 이분법을 말하지 않고

오직 견성, 의식 하나를 밀고 나가는 거다.

 

그래서 불이법을 추구하지

선정, 도거라고 하는 이분법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말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느냐 하면

공부를 해보면, 선정이라고 하면

선정이라는 말이 벌써 도거예요.

 

그러니까 진정한 선정이 된 사람은

선정이라는 관념이 없어.

그럼 아무리 좋은 관념이라도

관념 자체는 벌써 도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선정은

그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게 공부에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 육조 혜능이 이런 식의 말을 하는 이면에는

많은 공부인들이

선정과 도거를 나누어 놓고

선정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도거를 하고 있다, 이거예요.

 

해탈과 미혹

해탈_ 자유고 미혹_ 구속이거든요.

해탈과 미혹을 나누어 놓고 해탈을 추구함으로써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미혹이다, 이거예요.

 

왜 그래요?

의식의 위치 때문이에요.

의식의 위치는 뜻밖에도 뒤에 있어요.

그러니까 바닥에 있어요, 바탕에 있어.

 

우리가 의식하고 하나 되는 방법은

본래 바탕에 가만히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의식하고 하나 되는 방법은

본래 바탕에 가만히 있으면

바탕하고 하나 되는데

여기서 뭔가를 하면

바탕하고 떨어져 버려요.

 

근데 우리가 뭔가 할 때

대부분 자기 관념에 속아서 하게 돼요.

선정을 해야지해탈을 해야지하면서

오히려 선정 해탈 자체인 바탕으로부터

오히려 벗어나 버린다, 이거예요.

 

공부가 좀 익어가면

처음에는 이런 용어를 배워야 돼요.

용어를 배워야 되는데

공부가 익어가면 용어를 버리는 때가 와요.

 

왜냐하면 용어를 쥐고 있는 한은

진정한 것으로부터 환경이 막혀버려요.

 

나중에 가면 깨달음도 버려야 되고

번뇌 망상만 버리는 게 아니라, 반야 지혜도 버려야 되고

미혹만 버리는 게 아니라, 깨달음도 버려야 되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런 관념을 쥐고 있는 한은

관념을 쥐는 놈이 에고이기 때문에

관념을 내가 쥐고 추구하는 한은

추구하는 그놈이 에고라서.

어느 것도 추구하지 않으려면

그런 관념을 놓는 것이

공부에 또 중요한 하나의 고비예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오직 견성만을 말한다, 할 때는

견성은 나누어지지 않는 불이법이기 때문에

이건 탈이 없는데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으로 간다든지

또 번뇌 망상은 버리고 반야 지혜로 간다든지

이렇게 되면

이분법이라서 이것이 끝이 없어지는 거예요, 공부가.

 

그러니까 여기 지금 비밀이 거기에 있어요.

이분법의 구조 안에서 하면

끝없이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돼요.

 

우리가 피안으로 갈 때는 뗏목을 타고 가지만

피안에 도착해서는 뗏목을 버려야 한다, 할 때

이 뗏목이 우리로 하여금 피안르로 건네다 주는 진리를 말하는 거예요.

법이라고 하는 거.

법도 나중에는 버려야 한다.

이런 말이 깊은 말이에요.

 

/자성을 철저하게 깨달았다면

매사에 임제의 말대로 수처작주 하게 된다./

수처작주가 임제의 말인데

여러분 은미해 보세요.

수처작주 할 때 주가 의식이에요.

임제가 주인과 손님

주빈, _ 주인과 빈_ 손님

주인과 손님 가지고 법문을 많이 했어요.

 

이때 보세요.

주인은

주객은 착각이고

이때 주객_ 주는 주관, 에고

그리고 객관_ 이건 착각이고

실제로는 주빈이 맞아.

 

주관과 객관은 모두 빈_ 손님이고

그리고 실제 주인은 의식.

지금 차이점 아시겠습니까?

주객이 아니라 주빈이 맞아요.

이해되죠?

 

그러면 수처작주

어디를 가더라도 의식의 입장이 된다, 이 말이잖아요.

수처작교라는 말은

어디를 가더라도 의식의 입장에 선다, 이 말이잖아요.

맞아요?

이게 팔정도의 내용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수처작주가 되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수없이 자기가 시뮬레이션을 계속 해본다, 이거예요.

 

지금 내가 의식을 보고 있는가?

의식을 자각하고 있는가? 이게 정견이고

그리고 의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가?

달라요.

의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 하고

에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하고 달라요.

 

그리고 생각, , 행동, 생활

그리고 바른 깨어 있음, 바른 정진, 바른 선정

이것이 의식의 입장에서 초지일관되고 있는가? 하는 걸

끊임없이 자기를 살펴서

그게 되어야 수처작주가 된다, 이거죠.

 

수처작주의 뜻은

내가 의식으로서 깨어서 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의식의 입장에서 산다.

이거 쉽지 않죠?

의식을 깨달아도 수처작주가 되려면

훨씬 더 많은 세월을 우리가 갈고닦아야 돼요.

 

자 그런데 여러분 희망적인 것은

이거를 수처작주 입처개진을

에고가 하려면 까마득해요.

 

하나의 반전이 있어요.

에고가 자기가 정견을 갖추고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념, 정정진, 정정을 하려면

에고가 하려면 까마득해

언제 하나 싶어.

 

그런데 어떤 반전이 있느냐 하면

그 생각 하나만 없으면

이미 의식이 하고 있어요, 모든 걸.

 

그러니까 에고가 하려면 까마득한데

이미 의식이 하고 있기 때문에

맡기면 바로 그냥

바로 맡기면 계합이 돼 버려.

이게 지금 무서운 또 하나의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점수 하려면 까마득한데

처음부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식이 하고 있다는 것을 딱 자각을 해버리고

그쪽으로 믿고 들어가 버려서 맡겨버리면

내가 아무리 잘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전부 다 의식이 하는 것이 되어서

수처작주가 된다, 이거예요.

 

지금 방법이

내가 주체가 되어서 뭘 하겠다 하면 에고다 이거예요.

그게 아니라

힘 빼기

이미 의식이 모든 걸 하고 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뒤집어 말하면.

 

여러분 보세요.

뒤집어 말하면

의식이 하지 않기가 어렵다, 옵니까?

뒤집어 말하면

이미 의식이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의식이 하지 않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저절로 수처작주가 되고 있는 거지.

그쪽으로 가야 돼요.

우리가 우리의 공부가.

 

내가 의지를 가지고 팔정도를 닦아간다가 아니고

이미 팔정도를 하고 있다.

그럼 나는 딴 짓만 하지 말자.

 

그래서 지금 육조 혜능의 가르침이 소중한 게

나누어 놓고 하나 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미혹과 깨달음을 나누어 놓고

미혹은 없애고 깨달음을 성취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누어지지 않는 쪽으로 집중한다, 이거예요.

그게 오직 견성만을 논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공부는 할 수 없이 말한다면

2단계라고 할 수 있죠.

 

처음에는 본질이 있다.

본질을 발견해라 해서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1단계라면

두 번째는 현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본질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중도에 서기

정말로 본질을 버리기

그래서 중도에 서기

 

부처님께서 뗏목도 버려라그런 말들이

요긴하게 올 때가 있다, 이거죠.

우리 공부상에서

그리고 지금이 그럴 때 같아요.

한 번 확인하고 난 다음에

쉴 때.

쉴 때는 불이법, 불이 중도에서 쉬자, 이거예요.

 

그러려면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나도 모르게 추구하고 있는 진리, 깨달음, , , 선 이런 말들이

전부 다 관념이라는 거지.

본질도 관념이라는 거죠, 결국에는.

왜냐하면 불이법이기 때문에

 

현상을 떠나서 따로 본질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현상은 버리려고 하고, 본질을 추구하려고 한다, 이거예요.

이거는 첫 단계에서의 방편이다.

여기에 끝까지 가면 안 된다.

 

본질을 발견한 다음에는 본질을 버려버려야 돼요.

그래야 현상이 본질이 된다고.

그래서 이렇게 공부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피안으로 가자 해놓고

다음에는 피안은 없다.

이 차안이 그대로 피안이다, 이렇게 된다 이거예요.

공부 구조가

 

그러니까 이런 말을 우리가 소화를 해야 되고

이 한 번 의식이 이거구나하고 자각한 다음에는

의식이 있니 본질이니 하는 모든 것을 늘어놓으면 놓을수록 더욱더

지금 이것이 그대로 통으로 한 게 의식이 된다, 이거예요.

 

이 불이에 계합해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두 번째 공부이기 때문에

그때는 진리니 뭐니 하는 걸 버려버리고

뗏목을 일단 건넜으면

뗏목을 머리 위에 이고 가는 어리석음은 하면 안 된다.

뗏목 자체를 놓아버리자.

 

그러니까 번뇌망상도 놓아야 되지만

반야 지혜라는 것도 놓는다.

이런 말들을 소화할 때가 온다.

그게 이제 두 번째 공부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라도 쥐면 안 된다.

이게 지금 백척간두에서 진일보라는 소리예요.

백적간두는 본질을 깨달은 상태

본질을 깨달았으면 본질도 놓아버려라.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해라.

허공으로 완전히 나와버리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현상도 놓지만 본질도 놓아야

완전한 중도자리에 서게 된다.

그게 지금 우리 공부의 과정이에요.

 

우리 도반 여러분들이 지금 도달..

말귀는 거의 알아들으시잖아요.

그리고 어느 정도 본질에 대한 감각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언어를 놓는 게

관념을 내려놓아서 실제에 우리가 도달하기.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관념을 세워서

본질이 있다, 본질을 깨닫자, 체득하자, 말을 해놓고

어느 정도 도달한 사람한테는

이제 버려서

완전히 불이의 세계로.

 

이걸 쥐고 있으면 이분법이니까

본질 의식, 이걸 쥐고 있으면 이분법이니까

이걸 내려놓고

완전히 통으로 하나의 세계로 완성하자.

이제 그런 메시지가 오늘 담겨 있어요.

 

이제는 어느 정도

우리 전체가 수준이 좀 올라왔기 때문에

이런 말을 또 소화할 때가 돼서

마침 진도 여기까지 나와서 그렇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