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
자아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생이 어정쩡하게 끝날 수 있습니다.
*불법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불성을 밝게 보는 것이 불법이며,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해답:
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상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을 없애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상은 더 이상 상이 아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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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분법을 논하면 그 주어는 아상이다.
제가 이 말에 흥분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다른 이야기를 했네요.
지금 무언가를 논한다면
여러분 무언가를 논한다면
논하는 주체가 아상이다.
이거 돌아보는 데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자기 아상을 돌아보는 건데
그것이 참 돌아보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그걸 다 풀어야, 결국은 풀어야 돌아오지
중간에 어정쩡하게 멈춰서는
결국 이 문제를 못 풀고
어정쩡하게 그냥 인생이 끝나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문제이므로
그러니까 아상이 문제이므로
의식으로서는 당연히 선정과 해탈은 논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정 해탈을 논하면 논하는 순간, 그건 아상이니까
/사실상 생각을 움직이거나
입을 열면 곧바로 이분법에 떨어지므로
오직 견성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불이법은 곧 일심법이다./
불리법은 곧 일심법이다 이 말은
오직 의식이라는 것밖에 없다.
그러면 그 의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 현상 자체가 의식이다.
그래야 일심이 돼요.
/인종이 다시 어떤 것이 불이법인지를 묻자
혜능은 당시 인종이 바로 그 순간에
인종법사가 설하던 열반경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불성을 밝게 보는 것이 곧 불법의 불이법입니다.”
명견불성, 밝게 불성을 보는 것이
시, 불법의 불이지법입니다.
불법의 둘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불성이라고 하는 것을 밝게 보는 것.
그러면 최종적으로 불성을 밝게 본다는 것은
이 현상 자체가 불성임을 보는 거예요.
다시
최종적으로 견성이 완성되려면
이 성품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현실을 벗어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이
현실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라는 걸 보는 게
그게 불이법의 최종적인 뜻이다
지금 논리가 그렇게 되죠?
예.
그래서 이제 그 점을 우리가 잘 이렇게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성품인 의식을 제대로 보면
모든 것이 의식이어서 둘이 아닌 법, 불이법이 드러난다.
불이법이 드러나면
견성의 주체도 성품이어서 곧 성품을 본다.
견성이 ‘성품이 본다’로 바뀐다./
견성이 성견이 된다.
그러니까 이 말은 참 저는 이런 말을
이런 대목을 볼 때는
항상 이 대목을 가지고 당신의 깨달음의 내용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선생님이 생각이 나요.
그분은 목사님이셨어요.
그래서 그분은 이걸 가지고
견성이라는 말은 기독교 용어로 바꾸면
‘견성은 내가 하나님을 본다’가 되잖아요. 견성.
근데 그분은 견성이 완성되려면
‘하나님이 나를 본다’로 되어야 이게 제대로 된 뜻이다.
왜냐하면 에고의 입장에서
처음에는 성품을 발견하는 거지만
막상 발견하고 나면
24시간 나를 통해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성품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실제로 이 순간에도 성품이 보는 거지.
내가 성품을 보는 게 아니고
이 순간에도 성품이 이 세계를 보는데
이 세계 안에 내가 있는 거죠.
이게 사실이다, 이거죠.
팩트는 내가 성품을 보는 게 아니고
성품이 지금 이 세계를 보고 있는데
이 세계 속에 내가 있다는 거죠.
성품이 이 순간 나를 보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그렇게 되어야
나의 이제 아이덴티티랄까?
정체성이 나가 아니고 성품밖에 없다.
성품이 모든 것을 지금 다 하고 계신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본질로 돌아오면
처음 시작할 때 0도하고 360도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0도에서는 곧 죽어도 내가 하려고 해요.
모든 일을
죽어도 내가 하려고 해요.
근데 돌아오면 모든 것을 이제는 맡겨버려요, 성품에.
나는 힘이 빠지고 성품에 맡기는 게 최선이라고.
모든 사람이 내가 좀 더 발전하고
좀 더 창의적인 인간이 되고
사업도 좀 더 잘하고 싶고
인간관계도 잘 맺고 싶고 그렇잖아요.
그 비결을 물어본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비결은 뜻밖에도
내가 하는 그것이 지금 문타를 일으키고 있다.
그것이 창의성을 막는다.
그래서 정말로 맡기면
참 맡긴다는 게 기가 막힌
그러니까 지혜의 정수예요. 정말
맡긴다.
근데 맡겨집니까? 여러분?
잘 안되죠.
그래서 속이 텅 비어야 된다 이거예요.
내가 하려고 하는 그것이
내가 모든 일에서 내가 나서서 하려고 하는
그 나의 의도, 시도, 욕망, 결국은 아상인데
그것이 힘이 빠져서
이제 정말로 불성한테, 자성한테 맡기는 삶
이게 지혜의 정수예요.
인간의 목적은 행복이지 않나요?
이게 지금 행복의 비결이에요.
맡기는 거, 맡겨서 사는 거
모든 답은 자기한테 있는 거죠.
그 자기를 만나서
사실은 여러분
현실이 자기예요.
자기는 작은 존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0도에 있는 게 아니고
180도를 돌아왔기 때문에.
180도에서는 모든 게 툭 터져서 전체가 이거 하나잖아요.
그런 자기이기 때문에, 그런 자기로서 돌아왔기 때문에
사실은 현실이 자기예요.
있는 그대로 100%.
그래서 지금 우리가 육조단경의 마지막 시간에
여러분 우리 육조단경을 공부하게 되면 숙제가 생겨요.
저한테는 생기더라고.
어떤 숙제냐 하면
현실이 나라면, 내가 나를 받아들이려면
내가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내가 완성될 거 아니에요.
현실이 진리니까, 현실이 나니까.
그러면 안팎이 내외가 명철하려면
내가 중생상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 과제로 정말로 대두된다면
밖에 중생이 사라져야 되잖아요.
그래야 증명을 해 주잖아요.
뭘로 증명해요 자기 내면을?
밖에가 없어야 되잖아요.
근데 밖에가 뭐가 문제냐 하면 감정이라니까
그 감정적인 상처 같은 것들이 오래 함께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또 부모도 얽혀 있고 이렇게 있잖아요.
제가 정말로 중생상이 없어졌다면
그것이 해소되어야만이 증명해 주지.
제 공부를 밖에서 증명을 해 준다, 이거예요.
그러면 우선 밖에서 증명하기 전에
내가 먼저 누구를 떠올렸을 때 뭔가가 꺼림칙하면
이건 아직까지 해소가 안 되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진정한 공부는
현실에서 자기 감정이 해소되어야만이
진정한 공부다 이거죠.
그러니까 지금 육조 스님이
마하반야바라밀을 제가 여러분에게 설법을 하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해놓고
이것을 반드시 현실에서 마하반야바라밀을 공부했으면
현실에서 이거를 실현해야지
이렇게 법문을 듣는 걸로 그치면 안 됩니다.
하는 걸 계속 강조해서 이야기를 해요, 육조 스님이.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육조단경을 공부하면서
이런 결국은 상이구나, 아상, 인상.
인상은 인의예지신이,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5가지 덕이에요.
인-의-예-지-신
인을 가지고, 유교사상을 가지고
정도전이 한양을 정할 때 유교 사상을 가지고 이걸 정했어요.
그래서 서울에는 5가지 문이 있어.
동서남북중
그래서 이 문의 이름을 인의예지신으로 붙였어요.
인_ 숭인문, 의_ 창의문, 예_ 숭례문, 지_ 홍지문, 신_ 보신각,
사대문에다가 한가운데 종각에
보신_ 넓은 믿음
이렇게 해서 그런 식으로 짠 거예요.
이게 전체 다 그 유교 사상에 의해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의예지신은 인간의 5가지 덕목이에요.
근데 무서운 이야기는 어느 선사가 그랬어요.
인의예지신이 인상이라고 그랬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
이 본질의, 진짜 더 높은 차원에서 본다면
인간 노릇이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인상의 내용이라고, 그렇게 해설한 분도 계세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유교가 인상을
인간 노릇을 잘 하자고 한 것이 유교잖아요.
근데 그것이 일종의 인간 노릇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지은
자기는 툭 터져 있는 이 현실 전체인데,
현실 전체인데 이 중에 인간만 따서
인간이라고 하고
나를, 나의 정체성을, 인간으로서 묶으려고 했던 게
이게 유교 사상이었는데
역시 노자가 이걸 아주 치열하게
‘도둑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스스로를 묶는 밧줄’이라고
그렇게 노자가 비판했잖아요.
당대의 중국에서.
그것처럼 이 조금 더 깊은 우리 불성의 입장에서, 중도 입장에서 보면
인간노릇 잘한다는 것도 자기를 속박하는
하나의 틀이 된다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지나가는 김에 얘기를 하면.
그래서 결국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수자상의 정확한 내용은
나한테 영혼이 있어서 그 영혼이 윤회한다는 뜻이에요.
수자라는 것은 영혼을 이야기해요.
그러면 내 몸은 죽어도 영혼이라는 게 있어서
그 영혼은 수자, 계속 반복해서 윤회를 한다, 하는 그런 식의 영혼관
그것도 하나의 상이라는 거죠.
결국 우리 공부는
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런 공부예요.
근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지금 우리 공부의 목적은
‘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라는 말은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면 상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상을 인정해야 돼요.
내가 아상이 있다, 인정해야 돼.
인상이 있다, 인정해야 돼.
중생상이 있다, 인정해야 돼.
수자상이 있다, 인정해야 돼.
인정하면 어떻게 돼요?
상이 더 이상 상이 아니야, 그냥 그거야.
상을 없애려고 하니까
스스로 이것이 계속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아이러니컬한 말이에요.
우리 공부는 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건데
근데 진짜 상을 없애려면
나의 상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상대방의 상도 있는 그대로 인정을 해주는 것
왜냐, 상도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정해 주면 어떻게 되는가?
상이 더 이상 상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상이 계승이 돼.
결국에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돼.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지려면
그 상조차도 본질이 그렇게 나온 거라는 거지.
그래서 정말로 여러분께 간곡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말씀은 뭐냐 하면
진짜 Everything이 법이에요.
이때 Everything에는
그렇게 꼴보기 싫은 상도, 나의 상도, 상대방의 상도 포함돼
그러니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는 방법은
상을 없애는 게 아니고
상을 사랑하는 거다, 이거예요.
그래서 인정하고 수용하는 거다, 이거죠.
그러려면 상이 더 이상 상이 아니라
상은 그 이름이 상일 뿐이다.
그러면 보세요.
금강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
나오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생략된 게 뭐냐 하면
그렇다면 중생의 실체는 무엇인가?예요.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
그러면 그 중생의 실체는 무엇인가?
또 다른 거
번뇌는 번뇌가 아니라 그 이름이 번뇌일 뿐이다.
그러면 번뇌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러분, 무엇에 무엇이 들어갈까요?
답이 뭘까요? 무엇의 답이?
요 꼬라지,
요꼬라지가 요 꼬라지가 아니라 그 모양이 요꼬라지일 뿐이다.
그러면 요꼬라지가 뭘까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 본질이라고도 하고
이렇게 답을 하시잖아요.
거기에 대한 정확한 불교 용어는 ‘법’이라는 거예요.
법이라는 말 자체에 Everything 할 때 thing이
진짜 그대로 나를 말하는 거.
왜냐하면 이거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의식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전부 다 의식이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이기 때문에.
그래서 상을 없애는 방법은
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상이 법이라는 것을
우리가 정말로 안목이 터져서 상을 법으로 볼 수 있을 때
그때 더 이상 상은 상이 아니게 된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육조스님께서 이게 일상에서 공부가 되어야지
아무리 입만 가지고, 머리만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마지막 결론은 이거예요.
/성품이 본다.
성품을 본다가 성품이 본다로 바뀐다./
그래서 성품이 본다의 뜻이 수처작주예요.
무엇을 해도 이것이 한다, 이거예요.
여러분, 무엇을 해도 이것이 한다.
이걸 정말로 믿고 맡겨버린다.
다시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것이
이걸 확인하고 난 다음에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뭐가 해요?
이것이 하죠.
이것이 아니잖아요.
이것을 정말로 확인하게 되면
내가 할 일이 없어져 버려
그냥 맡기는 거지.
뜻밖에도 맡기면 너무너무 잘해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공부가 시작이 돼요.
이때 공부의 시작은 어떤 거냐 하면
지금 상황이 벌어졌는데
얘가 맡겨서 하느냐? 내가 하느냐?에서
내가 하면 뭔가가 좀 이렇게 아닌 것 아닌데라고 하는 감각이 생긴다.
경계에서 맡겨서 하는 게 수행인데
나도 모르게 내가 끼어들어서 조작하려고 하는 것이 오면 불편해진다, 마음 자체가.
그 에고가 보인다, 불편해진다.
이게 이제 수행의 지금 일종의 진정한 수행인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공부를 하면서
하나하나 견성이 성견이 되면
실제로는 내가 보는 게 아니고 성품이 보고 있고
모든 것을 다
이미 하고 있어서 맡기게 되면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수처작주가 이루어진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
이 말은 이때 주는
여러분 수처작주는 임제 스님의 용어예요.
임제가 주하고 빈을 많이 용어를 많이 썼어요.
빈주 빈주 주와 빈
주는 본질인 의식이고
빈은 에고의 끼어듦이에요.
에고가 끼어드는 거, 그걸 손님이라고 했고
임제 스님한테는 모든 것이 주인이 하고 있어, 이미.
근데 에고가 끼어들 때는 손님이 끼어든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수처작주는 ‘가는 곳마다 주인이 한다’
이 말 지금 들어옵니까?
‘가는 곳마다 주인이 한다’ 이 말은
가는 곳마다 이미 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걸 자각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없어진 상태
이게 수처작주의 깊은 뜻이에요.
견성이 아니라 성견이 된 사람한테는
수처작주가 느껴진다, 이거예요.
가는 곳마다 진짜 주인은
본질인 의식이 지금 이미 하고 있는 이 상태.
/그리고 견성이 실제로 성견으로 바뀌는 과정이
사성제의 도성제인 팔정도다.
불이법을 정확히 보면
일심을 정견하고, 일심을 한 개 의식을 정견하고
그리고 이 한 개의 의식이
나를 통해서 지금 모든 걸 하고 있죠.
따라서 정견하면 성품의 입장이 된다.
수처작주가 된다./
수처작주가 된다, 이 말은 의식의 입장이 된다.
의식의 입장이 된다.
/그러면 의식의 입장에서 바로 생각하고/
의식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여러분 의식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모든 게 자기 분신이죠.
그렇지 않나요?
이 몸뚱이만 나의 분신이 아니고, 모든 게 자기 분신이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나의 분신이 되면 무상이 돼요.
분별이 없어져요.
무상(無相)
그러니까 지금 팔정도가 정견이 되면
정견이 된다, 이 말은
한 개 의식이 되는 걸 본다. 이 말이잖아요.
지금 한 개의 의식을 보고
또 지금 나를 통해서 하고 있는 게
의식이라고 하는 자각이 된다.
이 말이거든요.
정견이 되면
첫 번째가 정사유가 되잖아요. 바른 생각이 되잖아요.
이때 바른 생각의 내용은
상이 없어지는 거예요.
이게 다 한 개의 의식이니까
모양은 다 달라도
다 이거 하나니까
그 분별해서 취사 선택하는 그 상이 떨어지는 것
그러니까 지금 팔정도는 어려워요.
이거 만만하지 않아요.
정견이 되면 정사유가 된다.
사유, 사유의 내용은 상이 없는 것
그러니까 참 아름다운 것 같아
팔정도는 굉장히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까? 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이게 그냥 단순하게 말이 아니라
바로 본다.
전체가 의식인 것을 본다
그러면 생각은 상이 떨어지는 거지.
생각을 하되 생각의 상이 떨어져.
지금 따라오십니까?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자, 그래서 바로 생각한다.
정사유 이거는 상이 없어진다.
여러분 상이 없어지면 어떻게 돼요?
상이 없어진다는 걸 다른 말로 하면
무상을 다른 말로 하면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 돼요.
있는 그대로 본다.
그러니까 그전에 분별해서 취사 선택하던 그런 관습이, 그런 관념이 떨어지면
그런 관념이 상이 떨어지면
‘있는 그대로 본다’
/그러면 있는 그대로 말한다./
따라옵니까?
/정어_ 있는 그대로 말한다.
또 있는 그대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 행동한다./
자동으로 지금 진행되죠?
/그리고 있는 그대로 행동하면 있는 그대로 생활한다.
그리고 이렇게 바로 생활하면 바로 깨어 있게 된다./
생활하면 할수록 깨어 있는 힘은 더 강화된단 말이에요.
이걸 하면 할수록 깨어 있는 힘은 더 강화된다.
/그리고 바로바로 깨어 있으면
그것 자체가 항상 정진하는 것이 되고
항상 정진하면 바른 선정을 이루게 된다/
바른 선정은 부동심이에요.
부동심은
여러분, 바른 선정, 부동심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요.
이 최종적인 마지막이 부동심이에요.
바른 선정
언제 이루어지는가?
나는 안 움직이고, 일체 현상은 움직이는 걸 볼 때
나는 안 움직이는 부동심이 확립돼요.
다시
나는 안 움직이는데
의식은 안 움직이는데
의식 안에 나타나는, 의식이 나타나는 이 현상은
전체가 다 움직여요.
내가 안 움직이는 입장에 서서
모든 움직임을 보니까
움직이는 것은 꿈 같고, 영화 같고
당연히 집착이 줄어들고
대신에 나는 여여부동한, 움직이지 않는, 이 감각
딱 중심이 잡힌 감각
움직이지 않는 부동심의 감각
그게 선정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요 선정은
본래 선정에 현상 선정이 합치된 모습이에요.
우리의 본질은 본래 선정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현상도 본질에 합치된 선정
본질과 현상이 하나가 된 선정
그래서 이것이 확립되는 모습은
현상은 모든 것이 흘러가는데
흘러가는 걸 나는 흐르지 않는 자리에서
딱 이렇게 보는 자각
그것이 확립될 때 부동심이 확립돼요.
그러면 정말로 나는 한정되지 않는 자이언트고
나는 정말 마하고,
마하_ 완전히 열린 상태고
그 안에 정말 모든 것이
나가 온갖 꽃으로 피었다가 졌다가, 피었다 졌다가 하는 것이라서
모든 것이 분별되어서
이렇게 취사하는 것보다는
다 있는 그대로의 가치가
있는 그대로의 개성이 빛나서
진짜 화엄경
화_ 꽃 화(花)자예요.
음_ 피어난
꽃이 피어난 법계, 법의 세계
화엄법계_ 꽃이 피어난 화엄법계로 보이는 요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거예요.
이 화엄법계가 너무나 아름답게 피고 있어서
정말 흐름 따라 흐르는 거지
여기에 내가 조작할 필요가 없구나.
무위, 무상, 이런 것들이 아주 딱 이렇게 수처작주가 이렇게 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지금 수행의 지금 모습이에요.
항상 팔정도가 수행이라고 하거든요.
그리고 이걸 줄이면 계정혜에요.
계_ 바른 행동과
정_ 바른 선정과
혜_ 바른 지혜와
계정혜, 이게 지금 수행이다, 이거예요.
팔정도를 수행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이걸 하게 되면
정견이 되고, 정사유가 되고, 정어가 되고, 정업이 되고, 정명이 되고, 정염이 되고,
정정진이 되고, 정정이 되는 거,
이거를 자꾸 자기한테서 자꾸 해본다, 이거예요.
해본다.
지금 정견이 되는가?
해본다, 이거예요.
그래서 하여튼 우리가 공부가 이렇게 익어서
결론은 뭐냐 하면
현상에서 증명되지 않으면
아직 내 공부는 멀었다.
현상에서 증명하는 것은 가까운 가족부터
상대를 바꾸려고 하면 안 돼요.
상대가 법이라는 걸 봐야 돼.
그러니까 이게 오늘의 최종적인 메시지예요.
상대가 상덩어리인 채로 법이라는 것
그걸 바꾸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
내 눈이 상도 예쁘게 보는 눈을 가져야 돼.
그전에는 상덩어리 있는 사람 보면
막 “아이고, 저 상덩어리를 어떡하나” 했는데
그걸 바꾸려고 했는데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을 다 바꾸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내 눈 하나만 바뀌면 되는 거더라.
이런 말 많이 들었잖아요.
결국에는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내 눈 하나가 바뀌는 거구나.
내 눈 하나는 뭐냐 하면
내 딴에는 잘해보려고 모든 걸 잘해보려고 하는 그 눈
그것이 모든 사단의 원인이었다는 것.
그래서 결국 인간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말이에요.
오늘 하여튼 육조단경은 이 정도에서 마치고
오늘 제가 한 말에 여러분
제가 한 말에 상을 또 깰게요.
최종적인 목표는
정말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가 풀어지는 것
이것이 내 공부의 증명이다.
이거는 최종인 건데
중간에 공부 단계에 있는 분들은 섣불리 흉내 내면 안 돼요.
해도 안 돼.
상처만 도져.
그러니까 중간에 있는 분들은
이 궁금증을 의심을 끝까지 가져가야 돼요.
그냥 뜨뜻미지근하게 하지 마시고
아주 끝까지 밀고 가야 돼요.
의심이 끝까지 밀고 가서
의심이 사라져야지, 의심이 녹아야지
그 의심이라고 하는 얼음덩어리가 녹아야 되는 거지.
그걸 가진 채로 내가 잘하겠다?
안 돼요.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이런 공부의 결말을 배워서
내가 흉내내려고 하지 마시고
현재 있는 자리에서
지금 자기한테 미적지근한 거 있잖아요.
석연치 않은 것
그걸 끝까지 한번 해결한다, 이거예요.
그러면 가장 기본적인 석연찮은 건 뭐예요?
우리 공부하는데
우리 모두 공통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이 뭐꼬’예요.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이것이 무엇인가?’ 에서
내가 스스로 통쾌한가? 이 문제야.
통쾌한가? 석연치 않은가?
딱 하나잖아요.
석연치 않으면 석연치 않은 걸 가지고 끝장을 밀고 나간다 이거죠.
왜 이런지를
알려고 해서 밀고 나가는 거고
통쾌할 때 ,이거 정말 통쾌할 때
그때는 저절로 이제는 지금 말씀드린 정견, 정사유
이 말이 저절로 진행이 돼요.
결국에는 에누리 없이
겪을 건 다 겪고
걸어가야 할 길은 다 걷고
그래서 한번 이 원을 한번 다 돌아와야 돼.
이게 에누리 없이
공짜가 없는 것 같아, 결국에는.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는데
스스로 스스로 이걸 돌았구나
이게 인생이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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