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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4)치욕의 삼전나루 ... 삼밭三田나루, 임금이 아홉 번 머리를 찧은 치욕의 나루터

Buddhastudy 2022. 7. 21. 19:40

 

 

 

치욕의 삼전나루

삼밭三田나루, 임금이 아홉 번 머리를 찧은 치욕의 나루터

 

 

조선 경제의 대동맥이던 한강

그 중심인 한강나루 가운데 가장 빨리 개설된 나루들은

노들 나루(노량진), 한강 나루(한남대교 북단), 삼전 나루(삼밭나루), 광나루였다.

삼전 나루는 세종 21(1439)에 처음 열렸다.

 

흥인지문(동대문)을 나와 왕십리를 거쳐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의 두모포에서 배를 타고 건너면

잠실도 뒤편의 삼전 나루에 도달한다.

도성 중심지로부터 약 30리 지점이다.

 

삼전 나루에서 송파를 지나면 남한산성까지 이르게 된다.

한강을 건너 경기도 광주와 여주 방면으로 나가거나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병자호란을 맞은 못난 임금인조는

강화도 길이 청나라 선봉대에 의해 막히자

도성을 빠져나가 한강변 두모포에 이르렀다.

 

배다리(주교)가 아니면 한강을 건너가지 않는 임금의 체면도 버린 채

작은 나룻배를 타고 겨울 한강을 건너 삼전나루에 이른 인조 일행은

얼어붙은 산길을 헤매다 겨우 남한산성에 피신한다.

그리고 47일 만에 맥없이 청태종에게 항복한다.

 

항복한 인조는 푸른색 죄인 옷을 입고, 백기투항을 상징하는 백마를 타고

정문인 남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왔다.

못난 임금 인조는 항복한 댓가로 목숨을 구했지만

남한산성에서 나와 수항단(항복식이 열린 제단)이 차려진 삼전나루에서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의식)를 행하며 치욕의 목숨을 이어갔다.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삼전나루에 높이 5.7m, 무게 32t짜리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대청황제공덕비라는 황금색 글자를 새겼다.

치욕의 삼전도비.

 

조선 건국 후, 200년을 번성하던 삼전나루는

삼전도의 치욕 이후 시름시름 쇠락했다.

오랑캐에게 항복한 나루라는 오명 때문에

조선백성 누구나 여기를 드나드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래서 조정은 삼전나루의 동편에 송파나루를 새로 조성했다.

겸재 정선이 1741년에 그린 진경산수화 송파진을 보면

그림 가운데 기와집을 중심으로 송파나루가 보이고

오른쪽 초가집들이 모인 곳이 쇠락한 삼전나루다.

 

초가집 위로 보이는 단칸 기와 건물이

삼전도비가 세워진 비각으로 추정된다.

송파나루 뒷편의 산은 남한산성의 남한산이다.

 

박정희 정권이 1971년 잠실 지역 공유수면 매립사업을 시행했다.

송파강을 메워서 잠실섬과 부리섬을 육지로 만들었다.

오늘의 잠실이다.

송파강의 흔적은 석촌호수로 남겨놨다.

석촌호수의 서호 끝에 삼전나루터 작은 표지석을,

동호에 송파나루터 큰 표지석을 남겨 옛날의 역사를 기록해뒀다.

 

하지만 치욕의 삼전도비는

삼전나루터 표지석과는 동떨어진 서호 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삼전나루터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석촌호수 가운데라고 한다.

 

그렇다해도

삼전나루터 표지석과 삼전도비는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치욕의 역사도 우리 역사의 일부이니 말이다.

 

 

# 한강걷기 코스 : 잠실나루역잠실역 석촌호수

2호선 잠실나루역에서 한강둔치로 진입한 후

걸어가다 잠실역으로 향한다.

잠실역을 지나 석촌호수에 접어들면

삼전도비를 마주치게 된다.

석촌호수를 한 바퀴 둘러보면서

삼전나루와 송파나루 표지석을 찾아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