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전우용의 픽 4화 - '한국과 베트남의 닮은꼴 역사'

Buddhastudy 2019. 5. 7. 19:59


전우용의 사담속 코너 픽입니다.

우리 얼마 전에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의 활약상을 지켜보기 위해서 마치 우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듯이 비슷한 심정으로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응원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2차 북미정상회담 장소로 베트남의 하노이가 결정되면서 다시 베트남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오늘 전우용의 픽은 전 세계에서 한국과 가장 흡사한 역사를 겪어온 나라 베트남에 관한 이야기 <한국과 베트남의 닮은꼴 역사>로 준비해 봤습니다.

 

먼저 문서 하나를 읽어보겠습니다.

이 성은 1397년에 건립되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축조되어 아름다운 경관 속에 있다.

이 성은 동아시아에서 발달한 새로운 도시 설계와 건축 기술을 대표한다.

그 건축 요소들은 중앙집권 국가의 도시에 걸맞게 공간을 관리하고 장식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는 당시에 지배적이던 불교문화에 융합된 유교 사상의 토대 위에서 왕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무엇에 대한 설명일까요?

제가 읽어드린 글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에서 베트남 호 왕조의 요새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호 왕조의 요새: 14세기 풍수지리에 따라 건축한 호 왕조의 요새는 14세기 후반 베트남에서 번성하고 다른 여러 나라와 확산되었던 성리학의 증거를 보여준다)

 

한양도성은 풍수지리설과 유교 사상을 결합하여 중앙집권적 왕권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도성이었고요, 그 보다 3년 후에 국제적으로 같은 요소로 인정받는 성곽이 베트남에 건설되었던 것이죠.

 

베트남 사람들은 자기들의 역사가 한국의 단군조선이 시작되기보다 한 600~700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독립된 베트남 국가가 한나라에 의해서 멸망한 것이 기원전 111년입니다.

(* 베트남 건국신화: 락 롱 꿘과 어우 꺼 사이에서 태어난 백 명의 아이들이 산과 바다로 흩어져 나라를 세우고 다스렸다는 이야기)

 

이 단군 조선은 우리 기록상으로 보면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조선이 한나라에 의해서 망하고 그 자리에 그 영역에 한사군이 설치되기 3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한사군: BC108~BC 107년 중국의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린 뒤 설치한 4개의 행정구역)

 

그뿐만이 아닙니다. 기원후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고구려가 멸망했고요, 또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라는 것을 설치합니다.

(*안동도호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평양에 세운 통치기관으로 여섯 도호부 중의 하나. 후에 고구려의 옛 땅, 요동 쪽으로 옮김)

 

그로부터 정확히 11년 후인 679년 현재 베트남의 수도이자 북미정상회담 장소인 하노이에 역시 당나라에 의해서 안남도호부가 설치됩니다.

(*안남도호부: 당나라가 변경(현재의 베트남 하노이 지방)을 통치하기 위하여 두었던 여섯 도호부 중의 하나)

 

당시 당나라는 평양을 동쪽으로 안정시키는 곳, 하노이를 남쪽을 안정시키는 곳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름부터가 안동과 안남, 이렇게 비슷하게 만들어져있었던 것이죠.

상당히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고 보이지 않으십니까?

 

베트남은 한자 越南(월남)’의 일본어 발음입니다. 원래 현지에서는 비엣남정도로 발음하죠.

이름도 19세기 청나라에서 붙여진 이름인데요, 19세기 말까지 이른바 청나라가 스스로 자국의 외세로부터의 압력을 막아주는 병풍, 한자어로는 번병이라고 합니다만, 번병으로 인식한 나라는 바로 조선과 베트남 두 나라뿐이었습니다.

 

1884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됩니다.

베트남이 겪은 이 시련은 우리나라 당시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84년 베트남이 망하던 해에 우리나라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갑신정변, 1884: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사건으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으나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최초의 개혁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은 청나라가 베트남 문제에 신경을 쓰느라 여기에 개입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청나라는 베트남을 프랑스에 빼앗긴 마당에 조선에서도 영향력을 잃으면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다고 하는 위기의식에서 갑신정변을 막는 것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 국권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베트남의 망한 역사를 정리한 <월남망국사>라는 책이 우리나라에서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이 됩니다.

(*을사늑약: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월남망국사: 월남의 망명객 소남자와 양계초의 대화를 기록한 책, 월남이 처한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국민의 의식을 향상하기 위해 저술하였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베트남처럼 되지 말아야 하겠다라고 하는 생각을 했었죠.

 

1936년 그해가 다산 정약용 서거 100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이때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간행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조선학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이 땅에 본격화합니다.

(*여유당전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저술을 총정리한 15476.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이에 속한다)

(*조선학운동: 1930년대 후반에 형성된 국학운동, 정인보와 안재홍이 다산 적양욕의 서거 99주년을 기념하여 정약용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면서 시작)

 

얼마 전에 큰 관심을 모았던 큰 성원을 받았던 영화, ‘말모이의 소재가 된 것이 바로 조선학운동이었죠.

그런데 다산 정약용 서거 100주년이 되기 3년 전인 1933년 당시 소련에 망명해있던 이른바 베트남의 사회주의 지도자 호찌민은 한국 사회주의자 한사람에게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선물 받습니다.

(* 목민심서: 조선 후시의 실학자 정약용이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치민에 대한 도리를 논술한 책)

 

그것을 밤새워 탐독하고 호찌민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내가 펴고 싶었던 정치가 이 책 안에 다 있다

그 이후로 호찌민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기일만 되면 평생 묵념을 드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어떻게 보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각이 우리에게도, 그리고 베트남 사람에게도 같이 공유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1939~1945) 종전 직후에 우리도 해방을 맞았고, 베트남도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분단되었고 베트남도 분단되었습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1975년 이후에도 또 나왔죠.

베트남이 이른바 사회주의 월맹에 의해서 통일되면서 월남 패망의 역사를 이 땅에서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하는 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적도 있습니다.(* 월남패망: 1975430. 월남은 평화협정을 체결한 지 3년 만에 월맹에 의해 패망했다)

 

이 사건도 사실 우리와 베트남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만들어버렸죠.

베트남 전쟁에 우리가 참전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이 전쟁을 통한 월남특수라는 이름으로 한국 경제 성장의 하나의 계기를 얻었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베트남에 대해서는 우리가 마음의 빚을 졌다라고 표현을 했었죠.

 

베트남 내에서도 전쟁 이후에 상당히 그리고 대단히 큰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나라 곳곳에 지뢰가 묻혀있었고요, 전시 부상자들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에도 그 지뢰 폭발로 인해서 불구가 된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또 전쟁 이후에 고립된 상황에서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 베트남 난민들이 보트피플이라는 이름으로, 태평양, 아세안 일대를 방랑하는 그런 시련을 겪기도 했었죠.

(*보트피플: 망명을 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도는 사람. 1974년 베트남전을 전후로 발생한 난민들이 조국을 떠난 것이 시초)

 

그런 와중에 대략 베트남에서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성장이 진행되기 시작한 초기에 한국에도 베트남 여성들이 결혼을 목적으로 와서 함께 살면서 자녀를 낳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베트남에는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 병사들과의 사이에서 나온 라이따이한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어떤 경위로든 현재 베트남과 한국은 많은 사람이 말하는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2차 북미정상회담 장소가 베트남 하노이로 결정됐습니다.

이제껏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베트남의 하노이는 한반도의 평양과 그 역사가 대단히 흡사한 도시입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북베트남의 수도로서 존재하면서 마치 지금 한반도에서 북한의 중심도시가 평양인 것처럼 그런 역할을 해왔습니다.

모든 정치 행위, 특히 국제 외교는 장소의 상징성도 고려하기 마련입니다.

 

미국과 베트남이 국교 정상화를 한 것이 199524년째 되는 그런 시점입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나라들끼리 회해하고, 미국과 베트남의 경제교류는 급속히 확대되었고, 또 그와 관련해서 베트남은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뤘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하노이에서 만난다면 그리고 하노이가 걸어온 역사를 함께 화제에 올리거나 함께 생각하게 된다면, 양국이 미국과 베트남이 화해한 절차를 참고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베트남은 전쟁, 다문화가정, 박항서 감독 등입니다.

이번 회담으로 한반도 평화정책을 위한 큰 물꼬가 터진다면 남북 화해는 물론 남북한 각각과 베트남 사이의 교류는 더욱 확대될 것이고요,

또 이것이 이른바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 전체와 북한 사이의 선순환 교류와 상호이익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아마 우리로서는 처음 겪는 그런 시범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까, 또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 전우용의 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