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았기에
눈물 흘린 지
십년도 이십 년도
더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
목 메이는 이름입니다.
어머니
세상의 아픈 사람들
다 모여 불러보는
이름입니다.
안녕하세요? 정목입니다. 사바세계에서는 부르기만 해도 목이 메는 그 이름, 어머니이지요? 그렇게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은 만 중생을 그 넓고 큰 품으로 다 끌어안습니다. 이번 설날은 고향이 없는 분이거나, 고향이 있어도 찾아갈 수 없는 분들, 그 모든 분들 다 한자리에 모여서 손에 손잡고 우리 불성의 고향을 향해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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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여성이 지금까지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목소리가 이토록 절절하게 아름답다는 걸 느낄 수 있었을까? 싶어요. 그렇게 우리는 소중한 것들이 이미 내 곁을 떠나고 난 뒤에 비로소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소중함을 발견하기도 하죠. 고향이라고 찾아갔는데 떡국을 끓여주실 어머니가 안 계시는 집안도 있을 테고요, 떡국은 끓여놓았지만 먹어줄 자식이 없는 집도 있겠지요? 자식이 세상을 먼저 떠난 집도 있을 테고요. 그래서 떡국이 맛있다기 보다는 마치 입안에 모래알처럼 그렇게 설을 맞이하는 집도 있을까? 싶어요.
설 모습은 집집마다 다 사연을 가지고 다 다르게 맞이할 듯합니다. 그래도 설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마음도 몸도 한걸음 더 성장한다. 하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니까, 오늘은 이런 시름, 저런 시름, 다 곁에 내려두고 온전히 설을 맞이하셨으면 합니다.
만암 큰스님은 지금처럼 겨울이 되어서 온 산에 눈이 쌓이고, 또 산하대지가 꽁꽁 얼어붙으면, 들짐승이나 날짐승들의 먹이부터 걱정하셨다고 합니다. 산중 절에 추위라고 하는 것, 요즘과 비교할 수가 없죠. 요즘이야 오리털파카에 따뜻한 옷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불도 솜이불 덮고, 실내에 들어가도 따뜻하죠. 그래서 그런지 조금만 추워도 “아, 추워 추워”하잖아요. 그런데 하여튼 이 만암 스님께서는 그렇게 산중에 찾아 온 강추위 속에 날짐승이나 들짐승들이 혹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지는 않는가? 그런 걱정까지 하셨다고 그래요.
산중에 폭설이 내려서 눈이 많이 쌓이면 스님께서 빗자루를 들고 나가셔서 미리 다 길을 내는 거죠. 그럼 사람 오라고 길을 낸 다기 보다, 노루 산토끼 이런 여러 짐승들이 내려와서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길을 터주신 거예요. 그래서 만암 스님의 그런 행동을 보고 후학들은 참 자비의 화현이시다.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스님께서 흉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다 굶어죽어 가게 생긴 거죠. 사찰에 있는 곡식을 다 꺼내서 먹도록 베풀어 주신 거예요. 그러나 그 곡식 가지고는 감당이 안 되죠? 그래서 한번은 가마니에다가 자갈을 잔뜩 채워가지고 부잣집을 찾아 가셨데요.
부잣집에 가서 당신 창고에 있는 곡식 안에 있는 벼 좀 나한테 좀 주고 이것 좀 맡겨달라고, 그 창고에 맡겨달라고 그랬대요. 그랬더니 이 부자가 이 속에 든게 뭐냐고? 그러니까 자갈이라고. 어차피 당신에 저 창고 안에 쌓아놓는 거 아니냐? 몇 해가 지난 벼를 저렇게 쌓아두는데, 쌓아두는 것이 목적이라면 기왕이면 자갈을 쌓아놓고 그리고 저 볏짚단의 벼를 좀 내놔라. 쌀을 좀 줘라. 이 벼라고 하는 건, 쌀은 삶아서 백성이 먹고 살 수 있지만, 자갈은 삶아서 먹고 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스님께서 왜 자갈을 가져오셨는지 부자가 꽤 괜찮았던 사람인가 봐요. 지혜가 있었겠죠?
금방 말길을 알아듣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곳간의 문을 열고 그 안에 쌓아둔 벼를 다, 벼 가마니를 스님에게 드려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했다 그럽니다. 그렇게 스님께서 법당에서 그냥 단순히 기도만 하고 목탁만 치고 이렇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굶주리는 백성이 있을 때 직접 먹을 수 있도록 곡식을 베풀 수 있도록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 그게 곧 보살심이고, 그것이 진정한 정진이 아닐까? 하는 걸 몸으로 보여주셨던 거 같습니다. 이번 설에는 여러분들이 집에서 키우고 있는 그런 동물들에게도 먹이를 주지만, 혹시 여러분이 계시는 주변 가까이에 들짐승, 날짐승들에게도 먹을 것을 조금 베풀어보면 어떨까요?
사실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자기 털 하나 의지해서 신발을 신은 것도 아니오, 양말을 신은 것도 아니고, 그 딱딱하고 차가운 땅위를 걸어 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이 그것이 목숨을 연명하는 전부입니다. 그들에게 새해에 이 설날에 떡국을 주지는 못할지 몰라도, 무엇인가 먹을 거, 하다못해 새들에게 쌀이나 좁쌀을 뿌려서 작은창자를 배를 채울 수 있도록 그 만 생명에게 자비를 베푸는 설이 되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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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소리가 나라마다 어쩌면 저렇게 다르죠? 음색이? 인도의 피리는 인도의 음색이 뭍어 있고, 네팔은 네팔, 티벳은 티벳. 그 각 나라마다. 우리나라 대금 같은 것을 불면 한국의 산천, 우리나라의 산천과 기와집, 처마 끝에 낙수 떨어지는 지는 거 같은, 그런 음질이 그 속에 다 묻어 있는 게 신기하잖아요. 대나무가 그걸 다 빨아먹나? 아무튼, 그 음색들이 들어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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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사람들의 삶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굉장한 위안을 주죠. 티벳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훨씬 더 수승해지는 쪽을 나날이 나날이 계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삶의 특징인 거 같아서, 어쩌면 서방세계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티벳을 바라보고 티벳 바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티벳을 다녀왔지만 야크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어요. 수미산 아시죠? 성산 카일라스를 많은 여행자들이 순례를 갑니다. 그럼 그 카일라스 산 주변에 천막을 치고, 그날 천막 속에서 유숙을 하는 거죠. 그럼 천막 속에서 잠을 잘 때, 잠을 자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 소변을 보러가거나 그러기 위해서 나온 데요.
그러면 사람이 자고 있는 천막 주변을 삥 둘러서 야크가 서로서로 몸과 몸을 의지해서 기대고 이렇게 천막 주변을 에워싸고 있데요. 그래서 티베트사람들에게 물어봤다고 그럽니다. 야크들이 이 천막 주변에 둥그렇게 서로서로 몸을 부비고 둥그렇게 진을 치고 있느냐? 그랬더니, 티벳 사람이 하는 말이, 천막 속에 잠자고 있는 그 사람을 야크가 보호하고 있데요. 와, 그 말만 들어도 가슴 찡하지 않아요? 어떤 분은 그러겠지? 에이, 무슨 그런 소리, 야크가 무슨 사람을 보호한다고 천막을 빙 두르겠어? 이럴지 모르겠지만, 우습게보지 마세요. 야크는 인간보다 훨씬 더 정말 수승한 종류의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만이 최상이다 생각하는 것도 교만이거든요. 정말 사람이 야크보다 못하고, 소보다, 그 어떤 동물 짐승보다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천막 안에 자고 있는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밤새, 그 추위 속에 서로서로 몸을 맞대어 둥그렇게 강강 수월래 하듯이 천막을 에워싸고 있다는 그 한마디의 말이 얼마나 감동이고, 그 어떤 말 보다, 그 어떤 가르침보다, 정말 찐하게 가슴에 와 닿잖아요. 야크,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대보살이오, 관세음의 자비요, 지장보살의 대원력이 아니고, 어떻게 그 천막 주변을 애워 싸고 있을 수 있을까? 콧잔등이 시큰해지더라고요. 그 야크에 성스러운 행동 하나.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명색이 내가 부처님 법을 만났고 삭발을 하고 이렇게 먹물 옷을 입고 살아가는데, 내가 하는 말이 일반인과 똑같이 쏟아내는 말이라면 그것이 어찌 부처님의 제자라 말할 수 있겠나? 내가 하는 행동이 일반인과 똑같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부처님의 제자라 말할 수 있겠나? 제 자신을 다져 가리라. 또 다짐해 봅니다.
오랫동안 소식 끊어졌다고 어느 날 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 하고 안부 전해오면 굉장히 반가울 때 있죠? 제가 얼마 전에 한동안 연락 두절되었던 문형렬 시인이 시집을 보내오면서 자기 어디 살아있다고 딱 소식을 전해오는 거예요. “아, 어디서 숨 쉬고 있구나. 이 하늘아래서.” ‘해가 지면 울고 싶어라.’ 오늘 바랑속의 책 한권에서 해가지면 울고 싶다. 이 책을 꺼내봤습니다. 시집을 보다보니까, 망설춘사. 라고 하는 시가 있어요. 바랑 망, 눈 설, 봄 춘, 절 사. 눈을 바라보는 봄절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될까요? 하여튼 망설춘사.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몸에
절하나 지었네.
내 가슴을 절개했던 그 자리에
오래 미워하고
오래 그리워했던
저 눈보라 속에
저 우주 속에
절 하나 지었네.
한없이 눈이 멀어서
홍수처럼 약속처럼
내 운명을 절개했던 그 자리에
봄날처럼
당신을 기다리는 절하나 지었네.
망설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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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이었던 거 같네요. 제가 노블카운티에 60대 이상이신 거 같았는데, 연세드신 분들을 강의를 하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에서 다 한자리들 하신 분들이죠. 대학총장을 지내시고, 법원장을 지내시고, 또 대학병원원장도 하시고, 이런 분들이 모여서 사는 곳인데, 강의를 한번 해 달라 해서 간적이 있어요. 그런 분들 앞에 사회에서 다 배워보셨죠? 다 가지셨죠? 다 이루신 분이잖아요. 강의를 짤막하고 제가 그리운 금강산을 한번 불러드렸어요. 그렇게 많이 우시더라고요.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서 남자여자 할 것 없이 눈물을 적시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그리운 금강산은 언제나 그리운 그런 산이구나.
정말 우리가슴에 이 한이 언제쯤 녹여 나갈 수 있고, 언제쯤 남북이 통일이 되어서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체코까지, 그렇게 한번 여행을 해 볼 수 있을까? 부산에서부터 출발한 열차가 체코까지 도착하면 50일인가? 55일 걸린다 하더라고요. 제 살아생전에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래 보네요. 여러분도 그런 마음이시죠? 그리운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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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이런 편지 이렇게 읽고 있으면 내 가슴이 져며 오네요. 수행자의 길 위에 서 있다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참 대단한 동생 두셨어요. 동생 이름 좀 쓰시지 그랬어요? 동생동생 하지 말고 아무개 이렇게 말이에요. 그 동생이 이 방송을 언니와 함께 꼭 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언니가 동생을 위해 기도한다 라는 그 말 한마디가 제 가슴에 확~ 범종소리처럼 사무쳐 오네요. 정말 훌륭하십니다. 자기 자신의 몸이 아파도 우리는 인생을 탓하죠? 그만 살고 싶다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시부모님 잘 모시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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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마음의 발원문 이 노래를 공양 올린 것으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힘게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정말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겁니다. 저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당신과 내 안의 거룩한 빛, 신성한 불성에 경배 올리며 이 시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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