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나무처럼
고난을 딛고
일어서도록
고난의 끝, 비옥하고
검은 존재의 토양 깊이 뿌리내려
자양분을 흡수하고
당당히 스스로를 지탱하도록
언제나 연결되어 있도록
태양을 향해 자라나도록
안녕하세요? 나무아래 앉아서 정목입니다. 오늘이 봄의 일주문으로 들어서는 바로 입춘입니다. 아직은 대지에 손을 대어보면 땅이 좀 차갑고 냉랭한 기운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깊숙한 대지의 저 밑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솟아오르고 생명의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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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을 듣고 있다 보니까 제가 입고 있는 이 누비가 굉장히 묵직해 보이죠? 그래도 봄은 겨울과 봄, 그 사이에는 냉랭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품고 있어서 겨울옷, 그리고 좀 가벼워지는 봄옷, 교차되는 그런 시기인 거 같아요. 저도 얼마 안 있으면 이 누비를 벗고 가벼운 무명옷을 입을 날이 가까워 온 거죠? 설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옷을 가볍게 입으면 감기 걸리는 거 아시죠? 특히 봄에 감기 조심해야 합니다. 환절기라는 거 있잖아요. 계절이 바뀔 때 옷을 더 따뜻하게 입는 것이요, 보약한재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요.
괴테와 같이 한 시대에 같이 살았던 시인 중에, 독일의 시인 중에 에케르만이라는 사람이요, 괴테를 만났을 때 이런 이야기를 했데요. “나는 말이야. 내가 잘 모르는 사람, 낯선 사람, 내가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을 잘 이해하지도 못해. 그런 사람하고 별로 사귀고 싶지 않아. 말하자면 우리가 살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이 얼마나 짧은데,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과 이해하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면서 살기에도 시간은 참 짧은 거 같은데,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하고 시간을 보내느라고 에너지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 이런 식의 얘기를 한 거 에요.”
사실 맞는 이야기지요. 아마 여러분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래. 사랑하는 사람? 만나면 좋은 사람? 차를 한잔 같이 마셔도 기분이 좋은 사람, 그런 사람과 밥도 먹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고, 산책도 가고 싶고, 등산도 하고 싶은 것이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 사랑은 고사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리고 아주 골치 아프게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가까이 하고 싶어. 라는 사람은 없죠. 괴테가 그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 했데요. “그래. 자네 말이 옳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말이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좀 만나기가 껄끄러운 사람, 불편한 사람 있잖아요.
좀 불편한 사람. 사랑하지는 않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함으로서 배워지는 게 더 많지 않나?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라고 얘기했데요. 괴테의 이야기에 저는 더 한 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어디에다가 포인트를 주고 싶으신지요? 사실 인생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서 사는 건, 참 쉬운 일이에요.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한다는 것. 굉장히 행복하죠. 그런데 어떻게 보자면 우주적인 눈으로 보자면 그건 굉장히 작은 하나의 소우주에 불과한 거예요.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 그렇잖아요. 학연. 지연. 혈연. 굉장히 중요하죠. 가족단위가 굉장히 중요하고요, 지금도 대도시를 벗어나서 오지 쪽으로, 외곽 쪽으로 들어가면 아직까지도 그 지역 출신이냐? 아니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가족적인 분위기, 가족이라는 단체에서 동네지역으로 나아가서 다시 그 지역을 넘어서서 민족주의적으로도 가잖아요. 그런데 우리 민족끼리라고 하는 차원을 이제는 또 넘어서면 세계 중심적으로 또 나아가죠. 사실은 그 세계중심도 넘어서면 범 우주적인 중심으로 나아가게 되잖아요. 내가 말 상대하기 좋은 사람, 서로가 마음이 통하는 사람, 이걸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나, 그 경계를 넘어서서 좀 잘 이해 안가는 사람이지만, 상대하기 조금 불편하고 껄끄러운 사람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사람도 똑같이 행복 하고 싶어서, 그 방향을 보고 있다는 거죠. 그런 경험 혹시 있으세요? 여러분? 저는 그런 경험이 가끔 있습니다.
제가 아주 낯설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어느 날 그 사람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보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그저 겉껍데기 형식 밖에 몰랐구나. 정말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디서 태어나 어떤 삶을 걸어왔는지, 내가 모르는 게 참 많구나. 그러면서 그 사람이 살아온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가 몰랐던 것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그걸 통해 또 한 사람의 우주를 만나는 거죠. 낯선 사람과 가까워 진다하는 건 단순히 내가 배우는 차원을 넘어서서, 내 안에 드넓은 또 하나의 우주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2014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벌써 이렇게 1월이 훌쩍 지나가고 2월을 맞이했어요. 벌써 입춘입니다.
봄은 굉장히 짧게 지나가는 거 잘 아시죠? 봄이 왔어요. 봄이 왔어요. 하는 사이에 봄은 어느 결에 여름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지금 여러분 눈앞에 함께 하는 그 한사람, 여러분에게 아주 낯선 사람,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 그 사람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 심연 속에 그 사람은 정말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한번 눈뜨고 귀 열어 듣고 보고 싶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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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뿐만 아니라 날아다니는 새, 그리고 짐승들, 모든 동물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그 개미 한 마리까지, 미물들 하나하나도 삶은 참 고달픈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도 모두 왠지 봄을 기다리고 있을 거 같아요. 따뜻한 봄이 오면 부지런히 또 먹이를 찾아 짝을 찾아 또 날아다니겠지요? 그 모든 생명들에게 두 손 합장하고 경배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대구로 부산으로 포항으로 지방을 좀 많이 다니게 되었어요. 강의도 하고 책 사인도 해드리고 그랬는데,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제가 거기서 누구 드리려고 빵을 한 조각 사려고 삽 앞에 있는데, 왠 남자분이 열심히 이렇게 오시더니 고개를 탁 숙이더니 “정목스님 안녕하세요.” 이러시는데, 낯이 굉장히 익는 거예요. 예전에 어디서 꼭 본분 같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 예.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했어요. 그랬더니 이분이 “TV에서 봤어요.” 이러시더라고요. 이제 제가 세상을 다니다보면요, 횡단보도에 서 있어도 인사하는 분들이 많고, 길 건너갈 때도 쫓아와서 인사하는 분들이 있고,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많다보니까,
아, 참 세상 속에 내가 어느 곳에 있어도 사방에서 이렇게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구나. 그런 생각하면요, 그게 남들은 불편하다.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알아봐주고 달려와서 인사해주고, 그런 분들을 뵐 때마다 가슴속에 참 깊이 그 기도하게 되더라고요. 우리가 언제 어느 생에선가 한번쯤 만나지 않은 사람 있었을까? 우리가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른다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지구촌 안에 어느 누구 한사람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 없었을 거라 생각해요. 한때 우리 가족 아니었던 사람 없고, 한 때 내 부모형제 아니었던 사람 없다. 그러면 반갑게 인사하고 반갑게 서로가 손잡고 악수하지 못할 일이 없는 거죠?
세상 곳곳에서 저를 보기만 해도 그저, 그냥 이 승복 옷자락 한번 펄럭하기만 해도 그냥 눈물을 흘리시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분들, 한 분 한 분 뵐 때마다 모두가 우리가 다 한 형제라는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저처럼 이렇게 출가수행자의 길을 가고 싶어 했던 사람들, 세상엔 참 뜻밖에 많더군요. 수행자의 길을 걸어가 봤으면. 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어떻게 어떻게 세파에 떠밀려서 결혼도 하고 직장도 가지게 되고 그런 분들이 꽤 많아요. 오늘 바랑 속에 책한 권, 특별한 책 한권을 꺼냈습니다. 현재는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분인데, 한때 수행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사람, 그 분이 쓴 책에 ‘이제 마음이 보이네.’ 백성호 기자입니다. 이 백성호 기자는 오랫동안 종교기자를 하면서 스님이나 신부님이나 목사님, 또 수녀님, 이런 분들을 만나 뵈며 종교적인 그 심도 있는 깊이 있는 공부를 많이 해 오셨던 분 같아요.
오늘 그 백성호 기자가 쓴 책, <이제 마음이 보이네.> 라는 이 책에는 몇 년 전에 나온 책이긴 합니다만 경전이나 성경 속에 담겨있는 말씀들이 하나하나 생활 속에 살아 움직이는 활구 같은 그런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오늘 그 책 가운데서 ‘저울로도 못다는 무게’ 라고 하는 부분을 하나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시인 소동파를 아세요?
당송 구대문장가 중의 한 사람이죠?
당시에는 매우 서정적인데
그의 시는 매우 철학적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의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듣는 인물입니다.
학식이 높았던 소동파는 왠만한 스님은 거들 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쥐뿔도 모르면서 대사라는 소리만 듣는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소동파가 당대의 큰 스님이던 승호스님을 찾았습니다.
승호스님이 물었죠.
“그대의 존함은 무엇인가?”
소동파는 저울 칭자를 쓰며 대답하죠.
“저는 칭가입니다.”
사실 중국의 칭이라는 성씨는 없습니다.
잠시 후 소동파가 말하죠.
“세상에 내로라하는 도인들을 달아 보는 저울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승호스님은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할~”깜짝 놀란 소동파 뒤로 벌렁 나자빠졌습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승호스님이 물었죠.
“그렇다면 이 소리는 몇 근이나 되는가?”
천하의 소동파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동파는 이렇게 읊었다고 합니다.
“산색 그대로가 법신이요,
물소리 그대로가 설법이다.”
이 일화는 스님들의 한판승입니다.
그럼 소동파의 급소는 뭘까요?
바로 저울입니다.
소동파의 저울은 뭔가요?
학식, 그 배움과 앎입니다.
소동파는 내가 배운 것과 내가 아는 것으로 상대의 무게를 쟀던 것입니다.
할.
이 소리가 몇 근이나 되느냐? 하는 물음에
소동파는 무언가를 깨쳤던 것입니다.
그게 뭘까요?
저울로도 달 수 없는 무게가 있음을 직감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무게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이 우주입니다.
봄에 새싹은 어디서 돋아납니까?
또 봄에 꽃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여름에 소낙비는 어디서 오고
또 어디로 돌아갑니까?
소나무 가지위에서 울어대는 까치의 울음은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돌아갑니까?
이 우주에 날숨은 어디서 왔고 들숨은 또 어디로 돌아갑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나옵니다.
그 모든 무게가 얼마이겠습니까?
그래서 소동파는
“산색 그대로가 법신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나라고 하는 이 저울을 빼고
있는 그대로 봤더니 보였던 것입니다.
거기서는 졸졸졸 하는 물소리가 그대로 설법이니까요.
어디 물소리뿐이겠습니까?
새소리 바람소리 빗소리 모두가 우주의 음성이고
부처님의 음성이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부처님이 눈에 보이는 부처님으로 몸을 바꾼 겁니다.
그럼 소동파의 저울만 급소일까요?
우리에 저울도 급소입니다.
세상에 모든 저울은 급소입니다.
어떤 저울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를 달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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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올해는 눈사람도 만들어 볼 기회도 없이 겨울이 다간 거 같아요. 눈이 오기는 왔는데, 좀 겨울답게 눈이 좀 많이 쌓였다. 이런 느낌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적어도 한 10번 정도 눈이 오면 그래도 겨울이 왔었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제 기억으로는 올해는 한 3~4번? 2~3번이었나요? 그런 정도로 눈이 좀 오는 듯 마는 듯 했던 거 같아요. 그런 눈 속에서도 사건과 사고가 많았죠? 빙판에 넘어지신 분들, 빙판 때문에 목숨을 잃은 분들도 있어요. 겨울은 겨울대로, 여름이 되면 폭우는 폭우대로. 참 사람이 날씨하고 관련해서 사는 것도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
이렇게 음악을 들으면서 여러분과 오늘은 작별 인사를 해야 되겠네요. 오늘 내 마음의 발원문은 우리 효빈이의 발원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한 분 한분이 효빈이의 말처럼 200세 동안 건강하시기 바라면서 저는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 당신과 내 안의 신성한 빛, 거룩한 불성에 경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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