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는 것인가?
그 답은 매우 단순하다.
그냥 있지를 못해서이다.
그들은 무언가에 着이 되어 그냥 있지를 않는다.
着을 떼어 무애한 경지로 나아가는 수행자들도 그렇다.
무애로 간다지만 실상은 거기서도 또 着에 붙어 버린다.
싯다르타 자신도 그러지 않았는가.
가아에서 떨어져 진아에 붙었고
다시 불이를 가지고 절대에 가서 붙었다.
이것저것 모두 떼어내고는 끝내 해탈에 가서 붙었다.
당시 그는 모든 着이 없어졌다고 믿었지만
심연에는 자신도 인지하기 어려운 着이 작동하고 있었다.
着은 너무나 교묘하여 앞선 세 스승마저 속였다.
어느 무엇을 이루려는 마음이 일모라도 있으면 着은 발생한다.
그렇다고 무아로 가서도 안 된다.
무아엔 着도 없지만, 깨달음을 인지할 알아차림도 없다.
깨달음의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깨닫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어느 무엇에도 붙지 않은 상태, 일모의 왜곡됨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이것 외의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재차 확인했다.
이렇게 되자 그의 마음 화두는 자신이 이룬 경지를
어떻게 수행자들에게 전해줄지에 대한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여러 방향으로 생각을 일으켰다.
먼저 모든 것을 바쳐가며 수행에 매진하는 도반들의 얼굴이 스쳤다.
저들에게 자신이 이룬 법을 기꺼이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깨달음을 이룬 것은 법이 없는 법이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건 법이 아니게 된다.
왜냐, 언어에는 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말로 전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방관할 수도 없고
싯다르타의 고심이 깊어져 가는 대목이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화두에 잠긴 후
싯다르타는 마침내 가르침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했다.
자신이 입을 열면
그건 또다시 앞선 세 명의 스승이 했던 가르침을 되풀이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토록 침묵하며 지내리라 다짐했다.
<불설보요경>에 보면 싯다르타가 불법의 마음을 접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기니 저것도 생기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중략-
이 법은 매우 심오하여 파고들면 한량이 없다.
내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이 텅 비어서 있는 바가 없다고 하면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잠자코 있는 것이 낫겠구나/
위의 내용에 나오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연기론과 무아론이다.
그런데 그건 당시 힌두교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기초 과정이다.
그 이상의 경지인 진아와 절대와 해탈을 들고나온 것이
앞선 세 명의 스승들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싯다르타는 수행의 첫 단추에 해당하는 연기론과 무아론을 들먹이고 있다.
싯다르타가 어쩔 수 없이 전법을 포기하자
다음 장면에선 범천왕이 등장한다.
당시에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최고의 신으로 알려진 범천왕의 등장은
어쩌면 불교라는 신흥 종교의 입지를 닦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불본행집경>에 보면
범천왕은 세존의 전생을 상기시키면서 중생들을 위해 설법할 것을 촉구한다.
세존의 깨달음이 지극히 오묘하지만
세상 사람들 중엔 그 법을 이해하고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며
전법의 자비를 바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물론 후대에 꾸며진 내용이지만
범천왕의 설득에 의해 전법을 결심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건 정말 우연한 발견이었다.
계속해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싯다르타는 따사로운 햇볕을 쬐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하체는 나무토막처럼 굳어 감각이 없었다.
한 시간을 주물러 겨우 피가 통하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아직도 감각이 둔한 발, 그것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한 발을 떼어 땅에 붙였다.
발에 찌릿한 느낌이 오면서 자신의 발이라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다시 한 발을 떼어 조심스럽게 옮겼다.
조금 전보다 발의 감각이 더 생생했다.
이 순간 싯다르타의 뇌리를 스치는 한 줄기 생각이 있었다.
자신의 깨달음을 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발은 디딜 때 비로소 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나의 깨달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이 구절은 불경을 통틀어 가장 쓸모없는 구절로 치부되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만일 불경에서 한 구절만 빼고 모두 불사르라고 하면 단연코 이 구절만 남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존의 득도와 중도, 그리고 전법의 원리가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보리수나무 아래에 좌정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법이 아닌 법을 전하는 법에 대한 그의 화두는 깊어만 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먹을 쥔 상태로 태어나서 평생 동안 그대로 있다면 어떻겠는가.
그에게 주먹을 느껴보라고 하면 그는 결코 주먹에 대한 감각이 없을 것이다.
그냥 주먹을 느끼면 되지만
원래부터 쭉 같은 상태로 지내왔기에 그것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원래부터 실존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있지만
그것이 너무 당연하다 보니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자신이 실존이고 깨달음 자체라는 사실을 모르니
생각을 일으켜 왜곡된 허상에 푹 빠져 지낸다.
생각 속에서 중생을 자처하고
생각 속에서 생각을 없애 탈출하려 한다.
생각 속에서 진아를 만들고 절대와 해탈을 그려낸다.
그리고 생각 속에서 자신이 이룬 경지를 만끽한다.
이렇게 왜곡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참된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렇다!
그냥 깨닫게 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왜곡 없이 바라보면 깨달음이 열린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먹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손가락을 폈다 다시 쥐면 주먹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실존에 왜곡을 주어야 한다.
다만 왜곡을 잘못 주면 그것이 정도인 줄 알고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꼭 필요한 것들만 추려서 해야 한다.
손가락을 모두 펴는 대신 엄지손가락만 올렸다 내리면
주먹의 감각을 찾는 데 충분하다.
엄지손가락 정도의 변화, 이것이 내가 언어로써 전해줄 불법이 될 것이며
이후 나는 그것을 철저히 부수고 부정함으로써
수행자들로 하여금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리라.
엄지손가락이 펴지면서 불법은 생하고
엄지손가락이 접히면서 불법은 멸한다.
엄지손가락이 제자리로 돌아옴으로써 주먹을 느끼는 것처럼
불법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목도하게 되리라.
이제부터 나의 모든 법은
생과 멸을 반복하며
수행자들의 무명을 흔들어 깨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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