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누가 질문했는지는 모르지만 나하고 비슷한 거 같은데. 법문 들은 대로 안 되는 게 정상입니다. 아시겠어요? 안 되는 게 비정상이 아니고 안 되는 게 정상이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그럼 안 되니까 포기하면 업대로 사는 게 되고, 안되지만은 되는 쪽으로 향해서 계속 하게 되면 수행자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 저는 해 보니까 잘 안되던데요. 이 말은 이 사람 해 봤다는 얘기요 안 해봤다는 얘기요? 이 사람 하고 있다는 거요? 안하고 있다는 거요? 그러니까 안 하는 사람 보다 나아요? 안 나아요? 낫지? 그러니까 안 되도 안 하는 거 보다는 낫다.
그러니까 사실 안 된다 하는 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에 속하는 거요. 안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데 안 되기 때문에 ‘아이고 나는 왜 이리 안 될까?’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게. 안 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나는 왜 이리 안 될까?’ 해서 그만두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사람 얘기한 데로 열등감에 젖는 게 문제다. 안 되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러면 불교인은 인과법을 믿지 않습니까? 어떠한 결과든지 그러한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과를 만들은 뭐가 있다? 원인이 있다. 그렇게 배웠죠. 세상 원리가 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래. 다만 우리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우연히 일어난 거 같기도 하고 또 억울하고 분하기도 한 거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렇고. 반드시 그런 결과가 나오려면 그런 원인이 있다. 이건 이미 물리학에서도 나온 얘기에요. 어떤 물체가 속도가 변했다. 즉 가속도가 생겨났다 하면 반드시 뭐가 작용했다? 힘이 작용했다. 배우셨죠? 그래서 그걸 공식으로 뉴튼이 만든 게 뭐요? F=ma 이렇게 공식으로 만들었단 말이오. 옛날에는 모르면 하느님이 하나 봐. 기적이다. 이렇게 말했다 이거야. 원인을 모르니까. 그런데 그런 결과가 나려면 반드시 그런 결과가 날만한 원인이 있어서 그런 결과가 난다.
그럴 때 불교인들은 억울하거나 분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억울하고 분하지만 참아라. 이런 얘기가 아니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은 그러한 지은 인연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거야. 그러니까 심리적으로 어떤 생각이 일어난다?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일어난다. 만약에 그러한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지은 원인을 알게 되면 억울하고 분한 생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은 어디서부터 일어난다? 모르는 데서 무지로부터 일어난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우리가 뭐가 안 될 때는 안 되는 뭐가 있다? 원인이 있다 이거야. 그러니까 노력도 안 해놓고 결과가 되기를 원하는데 안됐다. 그럼 이 사람 노력을 안 했다 이거야. 그리고 노력을 해야지 열등감에 젖는다고 해결이 될 일이 아니다. 즉 열등감에 젖는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거나 또는 욕심이다. 이런 얘기요. 열을 해야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데 둘만 해놓고 그런 결과가 나타나길 쳐다보니까, 안 나타나니까, “이이고 난 해도 안 되나 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욕심이다. 이거요.
그러면 왜 법문을 들을 때는 알겠는데 실천하면 안 되는데 스님은 그걸 정상이라고 그러느냐? 우리가 자전거를 탈 때 제일 처음에는 자전거 가져와서 탄다. 그러면 가르쳐주죠. 어떻게 탄다고? 일단 올라타고 페달을 밟는 거 가르쳐 주는데. 제일 자전거 탈 때 중요한 건 뭐냐? 넘어지는 거요. 넘어지는 거. 어떻게 하면 안 넘어 지느냐? 딱 타면 처음에 뒤에서 좀 잡아주죠. 넘어 지는 거 뒤에서 잡아 준단 말이오. 손 놓는다 하고 탁 놓으면 탁 넘어지잖아. 그죠? 그럴 때 뭐라고 가르치느냐? 이게 왼쪽으로 기울면 핸들을 왼쪽으로 틀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오른쪽으로 틀어라. 이렇게 가르쳐 준단 말이오.
그러니까 왼쪽으로 이게 넘어지려면 핸들을 왼쪽으로 틀어야 균형을 잡아주고, 오른쪽으로 넘어가려면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어야 이게 이렇게 해가지고 균형을 잡아 준단 말이오. 그래서 왼쪽으로 넘어질 때는 왼쪽으로 튼다. 오른쪽으로 넘어질 때는 오른쪽으로 핸들을 튼다. 이렇게 배웠다 이거야. 안다 이거야. 그런데 타보면 100명의 1명이나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 100명의 99명은 왼쪽으로 넘어지면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어서 타탁~ 해가지고 좀 사투리로 말하면 때기장을 친다. 팍 넘어져버린다 이 말이야. 살 넘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 오른쪽으로 넘어지려고 기울 때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왼쪽으로 탁 꺾어 가지고는 오른쪽을 팍 넘어진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 바퀴가 이렇게 있는데, 오른쪽으로 넘어지면 핸들을 오른쪽을 꺾어 줘야 이게 넘어가는 걸 막고, 왼쪽으로 넘어지려면 왼쪽으로 꺾어야 이게 넘어지는 걸 막는데. 사람이 우리들의 이 무의식적인 행동이 어떠냐 하면 오른쪽으로 넘어가려면 핸들이 왼쪽으로 꺾어진다. 이 말이야. 나도 모르게 왼쪽으로 탁~ 꺾어져가지고 그냥 넘어 져버린다 이거야.
그러니까 가르쳐 주는 대로 행이 안 되더라. 가르쳐주는 데로 해보니 안 되더라 가 아니라. 가르쳐준 데로 안 된다 이거야. 알기는 알겠는데 이게 안 되는데요. 그런데 이럴 때는 몇 번 해 봐야 된다. 다른 수가 없어. 그러니까 넘어지면 “아이고 난 자전거 못 타겠다.” 하는 사람은 아직도 못 타는 거요. 그러니까 “아이고 다시 한 번 해 봐야지. 이 탁 오른쪽으로 꺾어야 되는데 왜 이게 왼쪽으로 꺾어져서 넘어질까? 에이 다시 한 번 해 봐야지.” 벌떡 일어나 다시 하는데 똑같이 또 탁 반대로 꺾어 딱 넘어진단 말이오.
그러면 세 번까지 해보고 “아이고 난 자전거 하고 인연이 없나 봐.” 이렇게 하는 거는 중도에 포기하는 거요. 그러니까 그 자꾸 시도를 해봐야 돼. 넘어질 때 마다 어떤 오기가 생겨야 된다? 으음. “이게 정말 뭐 이런 게 다 있어 이게.” 이렇게 오기라는 게 뭐라면 원력이다 이거야. 그때는. 될 때까지 해 보겠다. 이게 원력이다 이 말이오. 하다가 “하이고 다섯 번이나 해도 안 되니까 나는 인연이 없나 봐.” 이거는 퇴굴심. 물러나는 마음. 그럼 이 퇴굴심은 왜 생길까? 욕심 때문에 생긴다.
저 사람은 잘 타고 이미 그 수도 없이 넘어져서 그 딛고 일어나서 타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잘 타는데 나는 왜 안 될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지어진 인연의 그런 거를 자기는 생각 안하고 그 사람처럼 나도 한번만 탁 하면 되기를, 두 번만 탁 하면 되기를, 이렇게 바라는 마음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는 생각을 안 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그러니까 중도에 포기하면 안 돼.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은 넘어지기 때문에 다시 하는 게 있다. 수행은 이치를 알고 나서부터 수행이라 그래. 그래 자전거를 손을 안 되는 사람은 그 자전거 타는 연습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거는 축에도 안 들어간다. 그러니까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이 이치도 모르고 수행한다고 덤비는 것은 그것은 수행 축에도 안 들어간다. 그건 혼자서 망상 피우는 거다. 이치를 딱 알고부터 수행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수행한다 이 말은 된다는 얘기요? 안 된다는 얘기요? 안 된다는 얘기요.
자전거 타기 연습한다 이 말은 자전거가 잘 타진다는 거요? 안타진다는 얘기요? 안타진다는 얘기요. 자전거를 잘 타면 사람들이 자전거 타는 연습한다는 소리를 안 한다니까. 수행이라는 거는 연습한다. 이 얘기란 말이오. 그러니 넘어지면 또 하고, 넘어지면 또 하고, 넘어지면 또 하고, 넘어지면 또 하는데. 막연히 그냥 넘어지면 또 일어나 타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 타고. 이러면 안 된다. 넘어 질 때마다 아~ 또 안됐구나. 요래야지. 다시 해봐야. 요번엔 정말 왼쪽으로 넘어질 때 왼쪽을 팍 한 번 꺾어봐야지.
자꾸 이렇게 안 되는 시도에 대해서 넘어질 때일수록 더욱더 두 번 넘어지면 세 번은 더 세고, 네 번 넘어지면 다섯 번째는 더 세고, 열 번 넘어지면 열한 번째는 더 세야 되는데 우리는 두 번 세 번 넘어지면 약해진다. 그래서 보살은 이게 실수를 할 때마다 원이 더 커진다 이 말이오. 그렇게 해서 열 번 시도해서 한 번에 팍~ 돼. 열 번 넘어지고는 무르팍 깨고 나서는 무르팍 깨면 포기하는 게 아니라 반창고 붙이고 또 한다 이거야. 피 줄줄 흘리면서 또 해. 열 번만 한 번에 탁 되면 기분이 억수로 좋다. 야~ 됐다 이런단 말이오. 됐다 하고 고 다음에 딱 하면 또 팍 넘어져. 아시겠어요?
우리는 됐다 하면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해. 그렇지 않아. 됐다 하고 그 다음에 팍 넘어져서 ‘에이 또 안되네.’ 또 하면서 그 다음에 열 번해서 한 번 됐으면 그 다음에는 두 번해서 한 번 되고, 그래 그 다음에는 비틀비틀 왼쪽으로 넘어지려면 탁 틀어막고, 오른쪽으로 넘어지려면 틀어막으니까 이게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전거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넘어질 듯해서 아슬아슬하게 간단 말이오. 그러다 탁 넘어져. 그건 무슨 얘기다? 열 번 됐는데 한번 뭐다? 안돼서 넘어진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열 번 안 되가지고 한번 된다는 거는 아예 못 타다가 딱 타졌다 이 말이오. 그런데 조금 더 지나면 어떠냐? 열 번 되는 중에 한 번이 안 돼서 타다가 넘어지고 타다가 넘어진다 이 말이오. 처음엔 아예 못 타고 그 다음에는 타다가 넘어지고 타다가 넘어질 때, 열 번 되다가 한 번 안 되고, 스무 번 하다가 한 번 안 되고, 10m가다 한 번 넘어지고, 50m가다 한 번 넘어지고. 그럴 때 ‘아이고 난 넘어지니까 자전거 안 된다.’ 이렇게 아니잖아. 이게 지금 되가는 과정이잖아.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공부를 할 때는 중심을 딱 잡아야 된다 이거야. 내가 기도문이 남편에게 숙이겠습니다. 이런 기도문을 받았다 이거야. 그러면 숙여지나? 안 숙여지나? 안 숙여지지. 숙여지는 사람 여기 어디 있노? 손들어 봐라. 나도 안 돼. 그런데 이 기도문이 없을 때는 어떠냐? 자기가 안 숙여지는지도 모른다 이거요. 내가 왜 숙여야 되느냐? 숙일 필요도 없고 어떤 사람은 늘 숙이고 있다 이리 생각해. 그런데 기도문을 딱 받아가지고 숙이겠습니다. 하는데 안 숙이면서도 안 숙이는 줄도 몰라.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절을 하면서 숙이겠습니다. 숙이겠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어~ 어제 안 숙였잖아.’ ‘어~ 그때도 안 숙였잖아.’ ‘어~ 그때도 안 숙였잖아.’ 그것 때문에 안 숙인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거야. ‘캬~ 안 숙였으니까 나는 안 되는 거야.’ 이게 아니라. ‘어~ 정말 내가 안 숙였네.’ 자전거를 타니까 넘어지는 것처럼 ‘숙이겠습니다’ 하는 기도문이 있으니까 안 숙여지는 자기를 안다 이거야. ‘자전거 안타지는데요’ 이 말은 이 사람 자전거 타려고 시도 하고 있다는 거요? 안하고 있다는 거요? 하고 있다는 얘기야. 자전거 안타고 있는 사람은 안타진다는 얘기도 안 해.
‘아~ 저 안 되는요’ 이 말은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이 말이오. 그런데 처음에는 내가 왜 숙여야 되는지. 내가 뭣 때문에 숙여야 되는지. ‘지가 나한테 숙여야지 내가 왜 지한테 숙이냐?’ 이런 식으로 그저 기도는 해도 반감만 생긴다 이거야. 입으로는 ‘숙이겠습니다’ 해 놓고는 속으로는 ‘내가 뭣 때문에 숙여. 기도문이 내꺼 아니야. 남편 거야.’ 이러면서 내 반감만 생기다가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어쨌든 안 숙여 지는 자기를 보게 된다. 숙이는 거는 고사하고 안 숙이는 자기도 모르다가 한참 지나야 ‘야~ 난 진짜 하루에 한 번도 안 숙이네.’ 그럼 자기도 문제의식이 좀 있잖아. 어떻게 자기가 백번이면 백 번 다 잘할 수가 있어.
그런데 한 번도 안 숙이는 자기를 보게 된다. 이거야. 그러면 조금 나도 좀 문제가 있는 거 같다. 이렇게 자각이 되는 거요. 그러면 한번만 숙여. 하루에 한번이라도 숙여 봐야지.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평소에 남편이 아내한테 좋을 때 잘 숙여지죠. 좋을 땐 나도 잘 숙여. 그런데 숙이겠습니다. 이건 안 좋을 때를 말하는 거요. 안 좋으면 숙이나? 안숙이나? 안숙이지. 좋으면 기도문 없어도 수행 안 해도 다 숙여. 나도 기분이 좋으면 조그마한 애한테도 숙인다니까. 나도 기분이 좋으면 여러분들 와도 다 인사해.
그런데 기분이 딱 나쁘면 오든지 가든지 인사해도 안쳐다 보고 그냥 가버린다니까. 그러면 기도문은 안 될 때를 기도문이라는 게 필요로 하지 되는 거는 기도가 아니오. 수행도 아니고. 그건 저절로 되는 거요. 좋으면 다 저절로 되는 거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분이 좋아가지고 스님 오늘 기분이 좋아 108배 하라는데 300배 했습니다. 그건 수행이 아니야. 기분이 좋으면 누구나 다 하는 거요. 그건 뭐하고 같냐? ‘스님 오늘 술 한 잔 먹고 아가씨가 하도 잘해서 팁을 십만 원 팍 줬습니다.’ 이거나 똑같은 얘기요.
그건 보시가 아니오. 아시겠어요? 보시가 아니라니까. 그 기분이 좋아서 자기 기분풀이 한 거에 속한다 이거요. 기분이 나빠서 줄려고 가져갔던 돈도 호주머니에 팍 집어넣어 와 버렸어. 이런 식으로 안 될 때 기도문이 생각이 나가지도 배 풀겠습니다. 하는 기도문이 생각이 나가지고 ‘오 베풀어야지.’ 안될 때 기도문이 작용을 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안 될 때는 생각이 나나? 안나나? 안나. 안될 때는 생각이 안나. 그런데 여러분은 기도할 때 ‘숙이겠습니다.’ 하면 자기가 기분이 좋아 남편한테 숙인 거. 그걸 뭐라고 한다? ‘아 어제는 두 번 숙였다.’ 이러면 그건 공부가 아니야. 기분이 나빴을 때도 숙였느냐? 이 문제란 말이오. 왜? 기분이 나쁜 게 안 숙이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 이 말이오.
그런데 기분이 나쁠 때 탁 숙이면 기분 나쁜 게 탁 없어진다. 이 말이오. 그래서 열 번 열 번 다 안 돼. 그러면 이제 ‘햐~ 또 놓쳤네.’ 처음에는 하루 지나서 생각해도 뭐를 안 숙였는지도 처음에 기도할 때 모릅니다. 참회를 하려고 그래도 뭘 참회를 해야 될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요. 내가 뭣 때문에 참회해야 되나? 그런데 이게 한 열흘하고 이십일하고 삼십일 해야 참회할게 조금 기억이 나요. 참회도 그냥 절한다고 참회가 되는 게 아니라. 집중을 해야. 기도문에 집중을 해야 그 기도문대로 안 한 자기를 참회한다 이 말이오. 큰 죄 지었다 이 말이 아니오.
‘숙이겠습니다’ 그랬는데 안 숙여지는 자기를 보고 ‘오~ 내가 안 숙였네.’ ‘내가 숙여야 되는데 거꾸로 내가 잘났다고 고개 쳐들었구나. 그래서 내일은 내가 안 숙여질 때 고개 빡 쳐들 때 고 때 기도문이 딱 생각나 팍 한번 숙여봐야 되는데’ 하면 그때는 생각이 안나요. 그래서 열흘하고, 20일하고, 30일 하고, 50일 하면서, 한번 만 딱 해보려고요. 어떻게? 딱 고개를 쳐들어서 ‘이게?’ ‘이 새끼’ 하다가 딱 기도문이 생각나서 ‘이 새~’자 들어가기 전에 딱~ 생각나서 ‘아~ 예. 선생님.’ 요렇게 나왔다. 기도문이 생각나서. 그럼 요건 뭣 때문에 요렇게 마음이 바뀌었다? 기도문 때문에 바뀐 거요. 고게 한 번 해 본거요.
여기 아직 한 번도 못해본 사람 천지일거요. 아시겠어요? 그냥 지가 기분 좋아 숙인 거 그거 숙였다 그러고, 기분 나빠 안숙인거 그거보고 난 안됐다 그러고.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한다 이거요. 그 고걸 딱 한번 해 보면 아~ 요거야 말로, 딱 그 기분이 나쁘던 게 열흘 가고 한달 갈게 순간에 딱 사라지니까 ‘야~ 일체유심조구나.’ 이제 느꼈다. 고건 깨달음이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가 반야행을 하는 거요. 깨달음이 뭔지에 대해서, 놔 버린다는 게 뭔지에 대해서, 돌이킨다는 게 뭔지에 대해서 알았다 이거야. 딱 돌이켜 보니까, 딱 놔 보니까, 고걸 딱 알아차리니까, 고 감정이 들끓든 게 딱 없어지는 걸 느끼니까. 야~ 소위 말하면 담배한대 피울 때 기분보다 더 좋다 이거야. 은단 먹고 똥구멍이 샤한 기분이다 이거야. 야~ 고참.
아직 고래 한 번도 못해본 사람도 있지. 그건 수행이 아니야. 요렇게 되면 요렇게 되도 예를 들면 100일해도 한 번 됬다해도 이건 자전거 타다 처음 한번 안 넘어져본 사람이야. 그래도 이 사람은 굉장한 거요. 왜? 업장의 벽을 망치로 갖고 백일을 쳐도 금도 안 갔어. 금도 안 갔다는 말은 벽이 무너질 낌새도 안 보인다. 그런데 딱 치니까 벽이 금이 짝 갔어. 그러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있다는 거요. 요게 한 번 딱 됐다는 거는 가능성이 있다. 이 얘기에요. 그 다음부터는 막 쳐재끼면, 그렇다고 벽에 금이 갔다고 다음번에 딱 때리면 무너지나? 아니요. 그러고도 백 번 더 때려도 안 무너져. 그러나 딱 금이 갔다는 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이거야.
금도 안 가면 이게 무너질지 안 무너질지 모른단 말이오.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안 무너지는 거를 내가 하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오. 그러니까 딱 한번 됐다 하면 다음에 그럼 또 하면 되느냐? 안 돼. 그 다음날도 또 한 번도 안 돼. 그 다음날도 또 한 번도 안 돼. 그런데 처음부터 여기까지 오는 데는 백일해서 한 번 됐다면 그 다음에 고거 딱 될 때는 사흘이나 닷새 만에 한 번 된다 이 말이오. 그럼 많이 줄었나? 안 줄었나? 줄었지. 그 다음에는 하루에 한번은 된단 말이오. 하루에 백 번 기회가 있는데 한 번 된단 말이오. 그 다음에 하루에 두 번 된다.
그렇게 해 가면서 어떠냐? 일상적으로 어느 정도 된다. 그 다음에 가다가 내 되다가 안 될 때가 있다. 그거는 자전거 타다가 넘어질 때가 있다 이런 얘기요. “그런데 저는 가끔 가다가 안 됩니다.” 그 말은 잘된다는 얘기요? 안 된다는 얘기요? 잘된다는 얘기지. 그런데 여기 욕심이 앞서면 어때요? “왜 나는 백 번해도 한 번도 안 됩니까?” 이게 욕심이 앞서기 때문에 열등감이 생겨. 열등감은 지잘 났다 이거요. 꼴에 못난 게 이게 잘난 척하니까 열등감이 생기는 거요. 자기가 백 번해서 될 사람인데 자기 업장의 두께로 보면 만 번해야 무너질 사람인데. 이게 열 번해 놓고 스무 번 해놓고 ‘나는 왜 안 되노?’ 이런 사람이다. 이 말이오.
열등감은 뭐냐? 과대망상에서 생긴다. 우월의식에서 생긴다. 인연을 모르는 데서 생긴다. 어리석은 데서 생기는 거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열등감은 뭐라고? 지 잘났다. 여기서 생긴다 이 말이오. ‘아이고 나는 뭐 열등감이다’ 이러고도 뭐라고 그래? ‘아이고 니 똥 굵다’ 이래야 돼. 남은 백 번해도 지는 열 번 만에 탁 돼야지. 이렇게 망상을 피우기 때문에 열등감이 생기는 거다. 보살은 안 되면 다만 할 뿐이다. 언제까지? 될 때까지. 막연히 하는 게 아니라 안 될 때마다. ‘야~ 안 되네. 다시 해봐야지’ 다시 해 봐야지 하는 원이 갈수록 커지거나 안 되는 원인을 ‘아~ 이래서 안됐구나.’ 이렇게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여기 숨고 싶다. 이 무슨 얘기냐? 숨고 싶다는 남하고 만나기 싫다. 남보기 싫으면 우리가 어때요? ‘쨔식. 커져.’ 이러잖아. 그죠? ‘꺼져.’ 이건 뭐야? ‘보기 싫다’ 이 말이거든요. 자기 마음에 안 드니까. 그럼 자기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어때요? 숨고 싶어. 동일한 심리란 말이오. 그러니까 상대를 내가 생각하는 상대는 이런 사람이어야 된다고 정해 놨는데 이거하고 틀리는 이런 사람이니까 ‘보기 싫다.’ 이런 것처럼. 나는 이런 사람이야 된다 라고 자기 머릿속에 허상을 그렸는데, 실제의 자기는 그래 안 되니까 부끄럽다. 이렇단 말이오.
나도 ‘내가 법문을 잘해야 된다.’ ‘잘해야지.’ 수준이 요만큼 밖에 안 되는 게 지는 요만큼 인기를 얻고 싶다 이 말이야. 그런데 막상 떡 해서 반응을 보니 신통치 않아. 그러면 나갈 때 뒷골이 근질근질하고 부끄럽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그럼 이 부끄러운 게 왜 생기느냐? 자기가 허상을 실제의 자기를 안보고 자기는 이래야 된다 하는 데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현실의 자기가 보기 싫은 거요. 그래서 어떤 의식이 일어난다? ‘아이고 부끄러워’ 이런 의식이 생긴다. ‘아이고 부끄러워’ 이거는 ‘저 자식 보기 싫다.’ 이런 거 하고 비슷한 심리다.
그래서 이 보기 싫다는 게 자꾸자꾸자꾸 가서 극한에 가면 어떤다? 죽여 버려요. 보기 싫은데 또 없어져 라는 데도 안 없어지면 없애버리는 방법이 뭐다? 죽여 버리는 거요. 이게 살인이란 말이오. 자기가 보기 싫어. 그래서 숨고 숨고 숨고 숨고. 우울증으로 빠지죠. 그래서 극한적인 상황에 가는 게 뭐다? 자살이오. 똑같이 살인이잖아. 이거는 허상에 사로잡혀서 실제의 자기를 파괴하는 거다. 지 잘난 척 하는 거나, 열등의식이나, 우월의식은 동일한 거다. 이 말이오. 그래서 정신병이 나면 늘 두 가지가 피해망상증하고 과대망상증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아시겠어요?
남이 쑥덕쑥덕해도 다 뭐라 그런다? 자기 욕한다. 다른 사람 얘기하고 쳐다만 봐도 째려본다고 그러고 욕한다 그러고 피해망상증이오. 그건 동시에 과대망상증이죠? 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한테만 관심 있는 줄 알아. 거 얼마나 웃기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현실의 자기에 깨어 있어야 된다. 어떻게 열등의식을 없애느냐? 열등의식이 하나의 자기는 이래야 된다 하는 어떤 허상의 자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현실의 자기가 보기 싫은 데서 뭐가 생긴다? 열등의식이 생긴다. 그러니까 현실의 자기를 어떻게 바꿔야 되는 게 아니고, 허상의 자기를 뭐해야 된다? 놔 버려야 돼.
그러면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된다. 잘못하면 잘못하는 데로, 틀리면 틀리는 데로, 넘어지면 넘어지는 데로. ‘오~ 넘어졌구나.’ ‘오~ 틀렸구나.’ ‘오` 잘못했네.’ 이렇게 자기를 받아들여야 됩니다. 또 잘못하거나 틀린 거나 못하는 게 꼭 나쁜 거 아니에요. 법륜스님도 다 잘하면 여러분들이 아마 못살 거요. 못하는 놈은 반쯤 죽일 거란 말이오. 나도 못하니까 어때요? 못하는 나도 늘 보니까 그래도 구박을 덜 하는 거요. 아시겠어요?
내가 지난번에 단식을 하면서 안 먹어도 건강이 크게 이상이 없고 조금 먹어도 이상이 없는데 안 먹으니까 너무너무 심심해요. 처음에는 배가 고파가지고 문제지만은 시간이 지나 버리면은 배고픈 것은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라는 건 이래요. 조금 있으면 법문 끝나고 나가면 차도 한잔 먹어야 되고, 과일 갖다 주면 과일도 먹어야 되고. 또 밥 먹고. 밥 먹고 난 다음에 뭐 나온다? 과일 나오고, 차 마시고 이런데. 밥을 안 먹어 버리니까 과일 먹을 일도, 차 마실 일도, 약 먹을 때가 없어지잖아.
그러니까 사람들 밥 먹을 때도 심심해. 시간이 늘 부족하다 밥 안 먹으면 시간이 남아돕니다. 다른 사람 밥 먹을 때 할 일이 없잖아. 그죠? 그러니까 밥 먹을 때 되면 나도 모르게 저녁 6시가 되면 저녁 먹으러 나와요. 나왔다가 그냥 들어가요. 그럴 때 내가 뭘 이해하느냐 하면 담배 피운 사람 이해하게 됐어. ‘아~ 이 담배 끊는 사람도 이런 문제도 있겠다.’ 내가 생각할 때 ‘뭣 때문에 안 피우면 되지.’ 이러지만은 사실은 안 피우면 맞는데. 이 사람이 이게 업이, 그 습이 있으니까. 꼭 그것이 없어서 되는 게 아니고. 그게 습이 있으니까 허전하니까 그냥 자기도 모르게 숟가락 쥐듯이, 자꾸 그렇게 되니까. 옆에서 어때요? ‘아` 오늘 뭐 특별 식이니까, 오늘 뭐 손님 왔으니까, 드세요, 드세요’ 하면 시구지 젓가락 들고 설친다 이 말이야. 그런 것처럼 친구 만나가지고 이렇게 ‘한 대 피우지 뭘 그래? 술 한 잔 할 땐 한 대 피워도 돼, 아이고’ 이래 싸면 자기도 모르게 피우게 된다.
그러면 그게 한번 두 번 되면 어떻다? 마~ 일상적으로 먹게 됩니다. 아시겠어요? 기도도 마찬 가지오. 이런 저런 핑계로 한번 두 번 빠지면 그 다음부터 안 하게 되요. 그러니 안되는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안되므로 해서 자기가 안 된다는 거를 자각하고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을 이해하는 큰 계기가 된다. 그런데 뭣 때문에 열등의식을 가져. 그런데 스님은 열등의식이 없습니까? 스님도 열등의식 있을 때 있어. 나보다 법문을 더 잘하고, 나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 보면 조금 열등의식 생기지만은. 그게 무슨 얘기다? 과대망상이다. 아시겠어요? 별 볼일 없는 인간이 지가 사람들이 아이고 ‘법륜스님, 법륜스님’ 그러니까 지가 뭐 대단한 척 공중에 붕 뜨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거요. 아시겠어요?
그런데 인도 같은데 살면 이런 게 좀 없어져요. 왜? 여기서는 ‘스님, 스님’ 해서 여기 있는 법사님도 와서 절하고, 신도님도 와서 절하고, 돈도 주고, 음식도 늘 특별히 차려다 주고, 차를 타도 문 열어주고, 이렇게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뭐 되는 줄 알고 이래가지고 신경질 내쌓고 이러는데. 인도에 가서 이렇게 살면 어떠냐? 기차를 타면 내가 열 시간을 서가도 앉으라는 놈이 한 놈도 없어. 여러분들이 옆에서 보면 그래 놔두겠어? 우리 법륜스님이 그 밑도 빠지는 주제에 이래 붙잡고 서 있는데 아무도 앉으란 소리도 안 해. 예를 든다면.
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관념 속에 스님이라는 관념, 이게 우리들이 생긴 업으로 인해서 법륜스님이 높은 거지. 내가 똑똑해서 높은 게 아니다 이 말이오. 여러분을 떠나서 내가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국 같은데, 여행 같은데 가면, 스님을 얼굴색깔이 노랗다는 동양인 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마치 이슬람사람처럼 딱 찍혀서 무조건 찍힙니다. 내가 가도. 아시겠어요? 그래서 쭉 가는 사람 중에 세 명당 하나 찍는데, 나는 백% 찍힙니다. 무조건. 찍혀서 어떻게 하느냐? 신발 다 벗어, 발바닥까지 그 뭡니까? 이 뭐라노? 대는 거 있잖아. 그거 다 대요? 스님한테 그게 예의요? 한국서 생각하면. 성질대로 하면 마. 발로 차버리고 안 가버리고 낫고, 총 있으면 쏴버리는 게 낫지.
그래가지고 오버도 다 벗고 이래가지 완전히 신발까지 다 벗어가지고 앉아 그 순서대로 들어가다 붙들려 나와 저 구석에 가서 잡혀가지고. 완전히 범죄인 취급당한다 이거야. 그런 주제에 여기 와서 잘난 척. 그러니까 요런 물에 오래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돼. 그래서 그렇게 수모를 몇 번 당하면 여러분들이 고맙게 생각이 돼. 여기 있을 때 평소에는 고마운 거 잘 몰라요. 아시겠어요? 당연한 것처럼 이렇게 살다가. 그렇게 수모를 몇 번 당하면 내가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알고, 또 수모라는 게 어때요? 내가 여기서 잘난 척했기 때문에 수모라는 게 있지. 그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당하는데. 이슬람사람이 당하거나 뭐가 당하면 ‘저 당하는 게 당연하다’ 이렇게 생각할거 아니오. 그죠? 나는 그냥 쑥 지나가니까.
그런데 나도 거기서 꼭 집혀서 당하면 ‘아 아랍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겠구나.’ ‘그 놈의 새끼들 왜 총은 쏘고’ 그러지만은 나도 아마 그렇게 계속 당하면 성질이 발동하면 ‘니 죽고 나 죽자’고 덤빌지도 모른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게 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자기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데도 도움이 되고. 또 한편으로 여기 떡 도착하면 공항에서부터 스님 오시니까 짐도 받아주고 이러면 고마운 생각도 들어. 평소에는 받아줘도 고맙다는 생각도 안 들어요. 아시겠어요?
그러다 그런 꼬라지 좀 당하고 들어오면 어때요? ‘아이고 사람들이 너무너무 고마워.’ 그러니까 이게 다 인생사는 데서 자기를 잘 알면 이게 다 도움이 되요? 안 돼요? 도움이 돼. 안 되는 것도 도움이 되고, 이 우리가 말하면 고통을 당했다, 수모를 당했다 하는 것도 사실은 보면 자기 잘난 맛에서 생기는 거고, 또 설령 그렇게 당했다 하더라도 그게 돌이켜서 자기가 늘 일상적으로 고마움을 모르고 살다가 ‘아~ 내가 참 이 사람들이 고맙구나’ 하는 것도 느끼는 계기가 되고. 그러니까 우리는 잘한 것만 잘하는 게 아니라 못한 것도 잘한 것만큼 인생에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적어도 뭐는 가질 필요는 없다. 우월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별로 잘난 주제도 아닌 게 잘난 척 하는 것도 그래서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처럼. 이 ‘못났다’ 하는 열등의식도 못나서 못난 게 아니라, 잘난 척하고 싶은데 안 되니까 뭐다? 열등의식이 생기는 거다. 이해는 되세요? 이 사람 말하는 데로는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래도 밖에 나가면 지보다 예쁜 사람 보면 괜히 그냥 얼굴 붉어지고 못나 보이고, 지보다 돈 많은 사람 보면 괜히 쭈그러들고, 높은 사람 보면 괜히 그냥 그렇게 되고. 이렇게 되는 건 현실이오.
왜 그럴까? 담배를 끊겠다고 결심해서 끊어도 담배 피우는 무리 속에 가면 늘 피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왜? 이게 업이기 때문에. 이게 습이기 때문에. 그러나 수행하는 사람은 그렇게 일어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어나는 걸 보면서 그게 뭔 줄 안다? 업식인 줄 알아. 이게 일어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어나는 걸 보면서 아~ 여기 끌려가면 어때요? 계속 똑같은 인생이 육도윤회를 반복하게 된다. 이 말이오. 아~ 이게 이렇게 일어나는 걸 보면서 거기로부터 우리가 벗어나야 되겠다는 원을 어때요? 더 강하게 가져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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