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고유하고 멋진 한국어가 어디서 왔을까?
역사적으로 아시아권의 최강대국이었던
중국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 왜 이렇게 언어는 다를까?라는
의문점 가져보신 적 없으신가요?
본 영상으로 한국어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함께 이해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고대 한국어의 기원을 알아볼 텐데
사실 선사시대의 기록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보니
정확한 답을 내리긴 어렵습니다.
학계에선 퉁구스어, 몽골어, 튀르크어가 포함된
알타이어 계통에 속한다는 ‘알타이어족설’과
한국어가 다른 어족에 속하지 않고
독립된 언어로 보아야 한다는 고립된 ‘한국어족설’이 있는데
과거엔 알타이어족설이 상당히 받아들여졌으나
최근엔 알타이어족설을 증명하기엔 근거가 부족하고
언어의 유사성은 관련 어족 간의 상호 간 영향 때문이지
알타이어 계열의 언어로까지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더 주류가 되며
알타이어 적설의 위상은 점차 낮아졌죠.
그러다 2021년에 약 40명의 연구진이
언어학, 고고학, 유전학을 바탕으로
기존의 알타이어족에 일본어와 한국어를 포함해서
알타이어족보다 더 큰 개념인 ‘트랜스- 유라시아어’라는 개념을 만들고
이 언어들이 동계어라는 주장을 하는데,
언어학을 중심으로 접목한 유전학 부분이 흥미로워
이 부분을 잠깐 언급하려고 합니다.
이 연구에선
고대 유라시아인 149명, 동아시아인 45명의 유전적 정보를 분석하고
각 유전자들의 주 성분이
어느 지역의 유전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지 분류하였는데요.
유전자 분류는 중국 황하강 쪽 중원계인 ‘양샤오’
그리고 좀 더 위쪽으로 올라와 한반도 북서쪽에서 조금 떨어진 ‘요서 지역’엔
신석기 때의 ‘홍산’과 청동기 시기의 ‘하가점 상층’
2개의 유전자 그룹이 속해 있고
더 위쪽으로 가면
중국과 러시아 사이, 아무르강 주변의 북방계 유전자인 ‘자라이눠월’
그리고 일본 지역의 ‘로크츠-조몬’까지
총 5개 그룹, 4개 지역으로 나누어집니다.
한국 지역의 유전자 정보만 본다면
중기 신석기에 발견된 여수 안도의 유전자는 ‘홍산’
통영의 연대도, 부산 장항의 유전자는
대부분 ‘홍산 유전자’에 약간의 ‘일본계 유전자’가 섞여 있죠.
후기 신석기 시대에 욕지도의 고대인 유전자는
대부분 ‘조몬 유전자’에 ‘홍산’이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에 천안 대정리의 유전자를 보면
‘화가점 상층’으로
역시 요서 지역의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연구에서 사용된 고대 한반도인들의 유전자는
한반도 북서쪽, 요하강 서쪽의 요서 지역 유전자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죠.
이 결과를 포함한 이 연구의 결론으론
지금으로부터 약 6,500년에서 7,000년경 전 정도에
요서 지역에서 한반도로 기장 농업이 전해지며 언어도 함께 전해졌고
3,500년경 전엔 ‘중국- 티베트 언어’가
쌀 농업 전파와 함께 넘어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반도의 초기 언어가 형성되어 갔고
또 이후엔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것이죠.
근데 사실 이보다 훨씬 더 이전인 기원전 13,000년경 정도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의 흔적인 볍씨가
한국의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되었거든요.
또 연구의 내용만으로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가설을 입증하기엔 부족하다는
언어학계의 여러 의견들도 나왔기에
언어학적 가설 자체를 그대로 수용하긴 어려울 것 같고
다만 언어 연구와 관련된 유전학적 분석 자료니
한국어가 생성되고 전파된 흐름을 이해하는 부분에서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해 드린 부분이니
잘 구분하여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본다면
한국어의 기원은
중국- 티베트어족, 크라다이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등
넘방계 어족들보단
아나톨리아와 볼가 분지에서부터
시베리아 북동부 해안까지 이르는
아시아 북부 쪽에서 부터 시작된 언어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기본적인 언어가 넘어왔을 확률이 더 크고
이후 주변 지역들과 오랜 문화적 접 접촉을 통해
광범위하게 서로의 언어가 사용되며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초기에 한국어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한국이 중국과 인접해 있고, 역사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언어 방면에서는 꽤나 다르고 독자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이해가 조금 더 되는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우리의 역사에 대입하여 그 흐름을 볼 텐데요.
고대 한반도 지역의 언어는
부여어, 한어, 2개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부여어는 부여어, 고구려어, 옥저, 예,
4개 세력이 사용을 했고
4개의 세력이 언어적으로 비슷하고 약간의 차이만 있다고 표현됩니다.
그리고 남쪽의 한어는
마한, 진안, 변안이 사용하는데
훗날 각각 백제, 신라, 가야가 되는 지역들이고
삼한간 언어의 유사성은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나
기본적으로 서로 유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차이점도 분명 존재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맞습니다.
한반도의 삼국 시대가 되며
우선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고구려는
부여어족 세력들의 지역들을 차지해 나가다
494년엔 북부역까지 고구려가 합병하며
부여어족의 언어는 고구려어가 되어 이어졌습니다.
이후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이 통일되지만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핵심 지역인
만주를 중심으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주변 지역에 준 영향력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알타이어와 비슷한 단어는 물론이고
일본어와 매우 유사한 단어들도 발견되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숫자인데요.
고대 고구려와 고대 일본어의 숫자를 뜻하는 말 중
3, 5, 7, 10이라는 단어가 기록으로 보존된 유일한 숫자인데
서로 상당히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죠.
언어학자들도 이런 유사성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며
당시 고구려어는
한반도를 넘어 일본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또 통일신라의 언어와도 비슷한 단어들이 많은데
그만큼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즉 고구려는 고대 북방민족의 언어
한국어, 일본어 사이를 연결하는 언어였다, 보시면 되겠습니다.
백제는 마한 지역에서 탄생했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며
또 부여어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도 보는데요.
그 이유는 백제의 건국자가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인 온조이고
이는 지배층의 경우엔
고구려 출신들이 상당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백제어는
고구려보다 신라어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아
백제어는 기본적으로는 한어에서 왔으며
백제를 건국한 통치자들의 부여어족 언어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라어는 국가가 시작될 당시
서라벌이었던 현재의 경주 인근 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신라어가 중세 한국어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보는 시각들이 많은데요.
다만 당시에 고구려- 백제- 신라어는
한반도에서 교류를 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밀접한 관계였기에
3개 언어 모두가
한국어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보는 의견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실제로도 입증된 고구려 어휘의 3분의 1 정도인 30개의 단어가
신라어의 형태와 매우 유사하고
백제어와 신라의 유사성은 더욱 높습니다.
그리고 676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데요.
이로 인해 일어난 정치적, 문화적 통합은
언어의 통일로도 이어지고
이때 통일된 언어가 한국어로 직접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신라어가 중심이 되었으며
백제어와 고구려가 영향을 주어
통일 신라어가 되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지금처럼 TV 같은 매체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단기간에 언어가 통일될 리는 없었을 것이고
통일신라가 된 후에도 각 지역마다 고구려어와 백제어의 잔재가
상당 기간 방언의 형태로 남았다가
점차적으로 하나의 언어로 통합되어 갔겠죠?
그리고 통일신라가 멸망하고, 918년 고려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이듬해 고려의 왕건은 수도를 개성으로 옮기는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언어 기반이 구축됩니다.
사실 개성은 과거엔 고구려 땅이었잖아요.
그럼, 이때 개성의 사람들은 신라어를 썼을까요? 고구려를 썼을까요?
답은 둘 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구려어의 잔재가 남아 있는 신라어였겠죠.
또 고구려 멸망 이후에
고구려어가 지도 속에서 바로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며 대조영이 발레를 세우는데
이때 발해는 고구려어를 계승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죠.
이렇게 고구려어는 발해의 또 다른 민족인 말갈인들의 말갈어와 함께
발해의 언어로 사용되며 부여어족의 명맥이 이어졌지만
926년 멸망하며 발해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죠.
하지만 그때까지도 부여어족의 고구려어는 발레어로 계속 남아
한반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또 과거 한때 고구려어를 사용했던 공동체들이 개성에 살며
당연히 지역 방언에도 영향을 주었겠죠?
실제 문헌학적으로도 고려어에
고구려적 요소들이 남아 있는 부분들도 일부 존재합니다.
그래서 고려 초기 경주에서 개성으로 수도를 옮기며
개성 방언이 중심이 된 체계로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자, 이렇게 고려시대까지의 흐름을 보았는데
현재의 한국어를 보면 한자의 역량도 상당하잖아요?
당연히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중국어의 영향은 고대 한국어부터 조금씩 들어왔는데
우선 삼국 시대엔 고구려에 먼저 영향을 주었고
백제와 신라, 그리고 일본까지 점차 내려갔죠.
그러다 중국식 한자의 영향력이 확대된
몇 가지 사건들이 신라에서 발생했습니다.
우선 503년 신라는 국가의 지도자를 뜻하는 말을
중국어식 호칭인 왕으로 공식화하고
통일신라 시기 ,당나라의 제도들을 받아들이고
757년 경덕왕 때는 국가의 모든 지명을
두 글자의 한자로 표준화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한자의 영향력이 더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이후 점차 사람들의 이름도 중국화가 되며
기존 순우리말의 이름에서 지금처럼
한자어로 이름을 쓰는 게 일반화되었죠.
또 신라 때부터 한자를 빌려 이뤄진 한국어 표기법인
‘이두’와 ‘향찰’ 같은 표기법이 나타나게 됩니다.
당시 당나라의 제도나 문화가 더 우수하다고 여겨졌었고
또 한국어를 쓸 수 있는 문자 자체가 없었기에
한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하다 생각이 되기도 하면서
가정이긴 하지만
이 시기에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우리의 역사, 언어, 이름, 지명 등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또 고려 시기에도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광종 시기 중국의 후주로부터 과거 제도를 받아들여
중국식 과거 시험을 도입한 것이죠.
다만 이 과정에서 한자 어휘가 당연히 많이 유입되었고
일부 토착어들은 한자로 대체되기도 했죠.
이후 고려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지만
경주에서 옮겼을 때만큼 지역적 이동이 크지는 않았기에
언어에서 큰 차원의 변화는 없었죠.
그리고 조선 초기까지도 문자를 읽고 쓰기 위해
향찰이나 구결 같은 형태로 한자를 활용했는데
당연히 한국어에 딱 맞지 않고 매우 불편했죠.
그러다 조선의 세종대왕 시기
쉽게 배울 수 있고, 읽고, 쓰기 편하며
우리의 소리에 딱 맞춘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널리 보급되며
지금의 한국의 공식 문자로 이어졌습니다.
중세 한국어에 특이할 만한 점이라면
언어에 ‘높낮이’를 주어
어휘의 의미를 구분하는 성조가 있었는데요.
현대의 경상도 방언 같은 것이
성조의 흔적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조도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1600년대 이후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성조가 사라져 갔고
남아 있더라도 성조를 나타내는 방점 형태로는 표기되지 않았죠.
그리고 개화기를 거치고, 안타깝게도 남북이 분단되며
남한은 서울 방언 중심의 한국어
북한은 평안 방언을 중심으로 한 문화어가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언어가 북방계 쪽에서 흘러와
고유한 언어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확실해지고 있기에
이런 사실들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에도
괜찮은 부분이라 생각되기도 하는데요.
다만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움직임에선
아예 북방 문화 자체를 중국 것이라고 주장하는 쪽으로 가고 있더라고요.
즉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죠.
실제로 한반도 북서쪽 요서 문화권의 고대시대 유적들을 발굴하고 보존하는데
중국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죠.
예를 들면
고구려 문화 유물을 전시하는 ‘지안 박물관’이나 ‘요녕성 박물관’ 등이 있는데
이런 곳들에서 역사를 왜곡하는 전시들이 계속되고 있죠.
또 우리도 잘 대응해야 할 것 같은게
2014년 강원도 한 공사 작업 중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청동기에 대규모 촌락 유적이 발굴되어 큰 이슈가 되었는데
여기서 고구려 유물들도 다량 출토되었죠.
그런데 현재 이곳엔 최근에 여러 가지로 이슈가 되었던
‘레고랜드’가 건설되어 있습니다.
만약 중도 유적지를 보존하고 연구했다면
앞으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할 유물이나 자료가
훨씬 풍부해졌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앞서 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국보다도 수천 년 앞선 볍씨가 발견되어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을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소로리 유적지는
주변 땅들이 사유지화 되어 있어
공장에 둘러싸여 있고
상당히 떨어진 곳에 기념탑 하나만 있는 실정입니다.
언어든 문화든
그 가치를 지키고 잘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선
보다 긴 시각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잘 접근해야 되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 영상으로
한국어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 되셨으면 좋겠네요.
긴 시간 시청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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