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
파리에 처음 들르게 된다면, 누구나 가보는 곳이죠.
그런데 에펠탑을 누가, 왜 지었는지에 관해서는 들어보셨나요?
오늘은 에펠탑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에펠탑을 짓기로 결정한 이유는
1889년 파리에서 열릴 세계박람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세계박람회는
2012년 여수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로 잘 알려져 있죠.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는
그 전신으로서 역사적으로 봤을 때 10번째로 열리는 세계박람회였습니다.
당시의 세계박람회는
주로 당대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거나
세계의 진귀한 물품들을 보여주는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는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에펠탑은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프랑스의 최첨단 기술을
전 세계에 자랑스럽게 보여주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그런데 에펠탑에는 왜 에펠탑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이는 엔지니어였던 구스타프 에펠이 소유한 회사가
에펠탑의 디자인과 공사를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박람회가 개최되기 4년 전인, 1885년 3월 30일
자신의 디자이너들이 완성한 계획을 정부 관계자들에게 보여주면서
이 건물이 현대적 엔지니어링의 예술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과 과학의 세계를 상징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건물이
이런 세기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준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감사의 표현물이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건물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높이로 지을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건물에
프랑스의 과학자, 공학자 및 수학자들의 이름을 새겨놓을 예정이었죠.
결국 에펠탑 제안은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채택되었고
에펠은 공사비로 추정되는 650만 프랑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150만 프랑만을 지원받는 대신
향후 20년간 에펠탑을 통해 거둬들이는 수익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펠은 이후 1887년 1월 28일에
에펠탑의 공사를 시작했는데요.
당시까지 낯선 구조의 건물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사 도중
에펠탑이 얼마나 안전할 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에펠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에펠은 미쳐버려서 양로원에 갇혀버렸다’라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신문까지 있을 정도였죠.
이러한 시선을 의식해서 에펠은
공사 도중 안전에 극도로 신경 썼습니다.
300명이 넘는 공사 인원 중 단 1명만이 사망했는데요.
비록 1명이 사망하긴 했지만
이는 당대의 기준으로는 매우 안전하게 진행된 공사에 해당했습니다.
한편 에펠탑은 당대의 디자인적으로도 논쟁의 중심에 섰습니다.
수많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에펠탑의 디자인을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300인 위원회’를 구성해서
에펠탑 건설 반대 운동을 벌였는데요.
이는 300m의 높이인 에펠탑에 대응하는
30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든 것입니다.
이들은 공사가 막 시작된 직후인 1887년 2월 14일에
‘에펠탑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이라는 제목의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그리고 에펠탑이 쓸모없고 기괴할 뿐만 아니라
노트르담 성당, 개선문, 루브르와 같은
파리의 역사적 문화재들을 짓뭉갤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반대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작가 모파상이
훗날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장소라는 이유로
매일 에펠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그러나 진위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죠.
어쨌든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에펠은 뚝심 있게 공사를 진행했고
결국 1889년 3월 31일 에펠탑이 완성되었습니다.
공사 직후까지만 해도 아직 엘리베이터가 완성되지 않아서
관람객들은 당대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걸어서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초의 우려와는 달리
박람회 기간 동안, 180만 명이 넘는 입장객이 에펠탑에 입장함으로써
에펠탑은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런 성공은 박람회 이후에도 이어졌는데요.
원래 에펠탑은 세계박람회 개최 20년 후인 1909년에 철거될 예정이었지만
이런 성공 때문에 파리 시는 이 계획을 철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철거 계획이 취소된 이후 에펠탑은
관광 명소로서뿐만 아니라
역사적 장소로 프랑스 현대사를 함께합니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 도중에는
에펠탑에 위치한 라디오 통신기가
독일군의 전파를 교란시킴으로써
독일군의 파리 진군을 방해하고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된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상징하듯
일반인이 입장할 수 없었고
엘리베이터의 케이블 또한 프랑스인들에 의해서 제거되었습니다.
독일군이 아직 파리를 점령하고 있던 1944년에는
프랑스인들이 에펠탑의 꼭대기에 꽂혀 있던 독일 국기를 제거하고
프랑스 삼색기를 꽂아 넣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히틀러는 점령된 파리의 통치를 담당하던 디트리시폰 콜티츠에게
에펠탑을 비롯해 파리 시를 파괴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이 명령에 불복했죠.
폰 콜티츠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히틀러가 전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말은
이후 이 시기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한 유명한 말입니다.
지금까지 에펠탑이 지어진 이유와
프랑스 현대사와 함께한 에펠탑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나중에 에펠탑에 들를 일이 생기신다면
한 번쯤 이런 에펠탑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시사 - 역사 > 역사,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께하는 세계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어떻게 지어지고 파괴되었을까? (0) | 2024.09.19 |
---|---|
[함께하는 세계사] 디즈니 성의 원조,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만들어지게 된 이야기 (0) | 2024.09.18 |
[함께하는 세계사] 루브르는 어쩌다가 박물관이 되었을까? 루브르 박물관의 역사 (0) | 2024.09.11 |
[함께하는 세계사]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알아보는 독일의 역사! (0) | 2024.09.05 |
[함께하는 세계사] 세계문화유산 특집! 바이마르는 어떻게 독일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을까? (0) | 2024.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