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5년, 당시 잉글랜드 군주였던 찰스 2세가
적법한 아들 계승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형제인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사실 제임스 2세의 즉위 과정이 아주 순탄치는 못했는데요.
이는 그가 개인적으로 영국 성공회나 개신교가 아니라
가톨릭을 믿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16세기 초반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잉글랜드 사회에서는
줄곧 가톨릭에 대한 불안감과 혐오감이 강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잉글랜드 군주가 가톨릭을 믿는 경우
그가 가톨릭을 믿는 또 다른 외국 국가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귀족들을 탄압할 것이라는 음모론이 매우 강했죠.
따라서 헨리 8세 이후 잉글랜드 귀족들은
가급적이면 가톨릭을 믿는 군주를 피했고
군주가 가톨릭을 믿는다는 소문이 퍼질 경우
왕과 의회는 긴장 관계에 빠지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즉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우선 제임스 2세가 즉위할 무렵 52세로
당시로서는 고령에 속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게다가 제임스 2세는
즉위 당시까지 아들이 없었고,
딸인 메리는 개신교를 믿는 데다가
1677년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 지도자인 오라녜의 빌런과 결혼을 한 상태였죠.
그러니까 제임스 2세는
짧게 지나가는 왕쯤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잉글랜드 의회가 제임스 2세의 즉위를 인정했던 데에는
이러한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즉위하자 제임스 2세는
즉위 전 의회의 걱정이 기후가 아니었음을 직접 보여주게 되는데요.
즉위한 이후 그는 대놓고 기존의 잉글랜드 사회에서 탄압받던 가톨릭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테스트 액트,
곧 심사법을 둘러싼 의회와의 갈등이었습니다.
1673년 제임스 2세의 선임 왕이었던 찰스 2세의 통치 당시
의회에 의해서 통과된 이 법은
잉글랜드 성공회를 믿는 자만이
잉글랜드의 관직이나 군대에서 복무할 수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사실 이 법을 엄격히 따르자면
성공회 의외에 개신교 신자도 잉글랜드에서 관직을 맡을 수 없었지만
실제 이 법은 무엇보다도 가톨릭을 향한 법이었습니다.
이는 심사법의 실제 적용 과정에서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많은 경우 예외가 인정되었지만
카톨릭에게 만큼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됩니다.
제임스 2세는 즉위 이후 바로 이 심사법을 폐지하고자 했는데요.
혼자 힘으로 법을 폐지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이 법을 폐지해 달라고 의회에게 요청하게 되죠.
그러나 잉글랜드 의회는
이 요청을 들어줄 이유가 딱히 없었기에 거부했고
이후 제임스 2세와 의회의 갈등은 본격화됩니다.
의회가 자신의 요청을 거부하자 그는 의회를 해산했는데요.
게다가 의회를 해산시켜 버린 상황에서
혼자만의 판단으로 기존의 심사법을 무시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관직에 임명하죠.
뿐만 아니라 제임스 2세는 의회 없이 통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관리들을 무작위로 해임합니다.
제임스 2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군대에서도 기존의 성공회 장교들을 가톨릭 장교들로 대체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군대의 규모를 기존에 비해서 강화시켜 나가죠.
이렇게 의회를 대놓고 무시하는 제임스 2세의 통치 방식은
의회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의회는 크게 토리파와 휘그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요.
제임스 2세가 즉위할 때까지만 해도
둘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토리파는 제임스 2세의 즉위를 옹호했으나
이후 의회는 토리파와 휘그파를 막론하고
제임스 2세에 대한 반발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자신을 지지해 줄 왕당파를
자신의 지지 기반인 가톨릭을 중심으로 만들어내고자 했으나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신자는 1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의회파로 하여금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 내에서 가톨릭의 강화뿐만 아니라
전제 군주제를 꿈꾼다는 의혹을 품게 만드는 데 충분했죠.
이런 상황에서 의회가
더 이상 제임스 2세를 두고 보기만 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바로 1688년 제임스 2세가
왕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제임스 2세에게 아들이 없고
딸인 메리는 개신교를 믿고 있었기에
의회는 노령인 제임스 2세의 통치를 그나마 참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죠.
만약 제임스 2세의 밑에서
가톨릭을 믿는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게 될 경우
잉글랜드 왕조 자체가 가톨릭화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2세가 가톨릭 왕조를 꿈꾼다는 의심은
개신교를 믿는 딸인 메리에게 수 차례 개종을 권유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죠.
이러한 개정 권유는
제임스 2세가 노령인 데다가
딸인 메리가 개신교였기 때문에
일단 제임스 2세의 즉위를 받아들인 잉글랜드 의회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 1세를 몰아냈던 것에 이어서
다시 한번 왕을 몰아내고자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왕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해도
30여 년 전 크롬웰을 경험한 이후
공화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선택할 수 없었는데요.
따라서 잉글랜드 의회는
제임스 2세를 대신할 새로운 왕을 물색하게 되는데
이때 의외의 눈에 띈 것이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와
그의 남편인 오라녜의 빌럼이었습니다.
만약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면
왕조를 교체한다는 부담 없이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왕의 종교만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지도자인 빌럼의 입장에서도
이는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는데요.
당시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충돌하고 있었는데
네덜란드에서는 프랑스의 군주 루이 14세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을 믿는 제임스 2세가 프랑스를 지원해서
네덜란드를 위협에 빠뜨리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문은 주로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2세의 박해를 받아
네덜란드로 망명을 온 이들에 의해서 더욱 퍼졌습니다.
이들은 메리와 빌럼이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다시 권력에 가까워질 수 있었기에
이 둘로 하여금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도록 더욱 설득했죠.
그러나 빌럼은 가볍게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잉글랜드 의회 측으로부터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라는 제안을 비공식적으로 받기는 했지만
더 확실하고 공식적인 보장을 원했죠.
그래서 그는 잉글랜드 의회 측에게
공식적으로 초대장을 보내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잉글랜드 측은
귀족 7명이 공동으로 작성한 초대장을 빌럼에게 보내게 되는데요.
1688년 6월 30일 빌럼이 받은 초대장에는
만약 빌럼이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게 된다면
그와 그의 군대가 잉글랜드 측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져 있었죠.
그리고 이 편지를 받은 빌럼은 잉글랜드 상륙을 준비하게 됩니다.
같은 해 10월, 약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항하게 되는데요.
사실 이때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4세는
이미 빌럼의 계획을 알고 그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빌럼이 생각보다 빠르게 군사 준비를 마치고 출항하게 돼서
그의 계획을 저지하는 데 실패합니다.
빌럼이 잉클랜드에 상륙한 이후에도 루이 14세는
제임스 2세에게 군사를 지원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게 될 경우
안 그래도 불만이 많은 자국민들로부터
더욱더 원성을 들을 것을 걱정하여
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게다가 제임스 2세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이를 수습하고자 즉위 초기까지
자신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토리파에게 접근하지만
지금이라도 심사법을 인정하라는
토리파의 요구를 또다시 거부하고 맙니다.
결국 빌럼의 잉글랜드 상륙과 함께 잉글랜드 귀족들이 보낸 초대장에 적힌 대로
잉글랜드 각지에서 왕과 가톨릭을 몰아내고자 하는 군사 움직임이 벌어지자
제임스 2세는 12월에 런던을 탈출하고자 시도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죠.
도주 과정에서 그는 옥새를 템즈강에 버려버리는데요.
이는 옥새 없이는
의회가 합법적으로 소집될 수 없다는 것을 노린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시도들이 실패하고
빌럼과의 협상도 실패하자
제임스 2세는 12월 23일
결국 소수 카톨릭 지지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미 잉글랜드가 장악당한 상황에서
제임스 2세가 안전하게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빌럼이 이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단 원래 계획대로 잉글랜드를 장악하긴 했지만
막상 제임스 2세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 40년 전 찰스 1세를 처형한 이후
또다시 잉글랜드에서 왕을 처형하기란
정치적 부담이 따랐던 것이죠.
이렇게 제임스 2세를 프랑스로 보내버린 이후
빌럼은 잉글랜드 의회로부터
메리와 함께 잉글랜드의 공동 군주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제 메리는 메리 2세,
빌럼은 영국식 발음대로 윌리엄 3세로 즉위하게 되죠.
이렇게 잉글랜드에서 17세기 내내 반복되었던 왕과 의회의 갈등은
이제 일단은 의회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과정이
상대적으로 유혈 충돌 없이 끝났다는 점에서
이를 명예혁명이라고 흔히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688년의 명예혁명은 단순한 왕 교체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잉글랜드 의회는 제임스 2세를 몰아낸 이후
1689년 권리장전을 채택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왕권에 대한 의회의 견제와 제약이 분
명하게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예를 들어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을 적용하는 것
과세를 하는 것
그리고 평시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을
불법으로 분명하게 명시했죠.
게다가 선거의 자유, 의회에서 발언의 자유와 의회의 면책 특권
그리고 국민의 청원권을 인정하는 등
이후 현대 민주주의에서 중요하게 인정받는 내용들을 담았습니다.
명예혁명이 비록
처음부터 현대 민주주의를 목표로 벌어진 투쟁은 아니었고
그보다는 좁은 의미에서의
왕과 의회의 권력 충돌의 결과가 빚어진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음에도
오늘날 명예혁명을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과 함께
세계사의 3대 시민혁명으로 꼽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제 유럽 사회는 중세 시대를 지나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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