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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세계사] 마침내 세계사에 등장한 미국! 미국은 어떻게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을까?

Buddhastudy 2024. 10. 16. 19:41

 

 

1492년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인들은 점차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6세기까지만 해도

신대륙 진출에는 약탈의 동기가 강했고

영구적인 정착을 목적으로 하는 이주의 비율은 적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변하기 시작했는데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신세계로 이민을 떠난 이들이 있었습니다.

버지니아 회사가 오늘날의 미국 버지니아 주에 건설한 제임스타운은

이러한 이유로 건설된 식민지들 중 최초의 사례에 해당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이유로 이민을 떠난 이들이 있었는데요.

17세기 초 영국 내에서 발생한 종교적인 갈등을 이유로

일부 영국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예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오늘날 미국의 동북부 끝쪽의 6개 주에 이주하여

뉴잉글랜드를 건설했죠.

이주 초기 이들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과

인디언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안정적으로 정착해 나갑니다.

 

그 결과 18세기 초에는 북아메리카에 13개 식민지 정착지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

이렇게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던 상황에 변화가 생깁니다.

 

이 변화의 원인은

애초에는 아메리카 식민지 자체와는 관련이 없었는데요.

다름 아니라 식민지의 모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7년 전쟁이라 일컬어진 이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 등

당대 유럽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전쟁이 북아메리카 지역으로 확전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북아메리카 대륙의 영국 출신들뿐만 아니라

프랑스도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요.

 

그러니까 식민지 정착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과는 관계가 없는 유럽 대륙의 전쟁에

자신들이 휘말리게 된 셈이었죠.

 

그러나 당시까지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엄연히 모국인 영국의 지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동원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은

각각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원주민들과 손잡고 전쟁을 벌이게 되죠.

 

1756년부터 63년까지 이어진 7년 전쟁의 일부에 해당하는

이 대프랑스 인디언 전쟁은

식민지인들에게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해줬는데요.

 

우선 이때까지 일반적인 식민지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평생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쭉 지냈지만

전쟁 때 동원된 이후로는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다른 식민지 정착지들을 경험하게 되었죠.

 

게다가 전쟁의 와중에는 강한 행정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전까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13개 식민지들 간의 정치적 협력이 강화됩니다.

 

그리고 이런 영향은

이후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화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런데 7년 전쟁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이 하나 더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식민지 모국인

영국과의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영국의 전쟁 전략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군대에 필요한 인력의 대부분은 식민지에서 충당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자금은

모국에서 충당하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이 전략은 전쟁의 와중에는 매우 효율적이었죠.

그런데 막상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쟁을 벌이면서 썼던 돈을

가급적이면 식민지에서 다시 벌어들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씨앗이 되고 맙니다.

 

당시 식민지의 모국이었던 영국이

식민지로부터 돈을 거둬들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영국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765

[인지세법]을 도입했는데요.

 

이 법은 식민지의 신문, 팸플릿, 각종 증명서, 허가증 등의 문서에

영국으로부터 수입한 인지를 붙이는 것을 의무화한 법입니다.

 

영국은 이 외에도 [병영법]을 시행하여

영국 군인들의 주둔을 위해 필요한 집과 음식을 식민지인들이 제공하게 했죠.

 

이러한 법률은 식민지인들의 동의 없이 제정되어 시행되었던 것이었기에

식민지인들로부터 매우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게다가 당시 식민지 지식인들은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퍼지고 있는 계몽주의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기에

영국의 정책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었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는 구호 역시

이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토마스 페인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작성한 팜플릿인 [상식] 역시

이러한 사상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어쨌든 영국이 각종 법을 도입해서 식민지로부터 세금을 걷으려고 하자

당연하게도 식민지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는데요.

이러한 갈등의 와중에 터진 사건이

1773년의 [보스턴 차 사건]이었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은 영국이 홍차법을 시행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는데요.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소모되는 차의 대부분은

정식으로 수입된 차가 아니라

네덜란드로부터 밀수업자들이 밀수해 온 차였습니다.

 

이에 영국은 자국의 동인도 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차를

식민지로 수출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가 애초 본국에 내야 할 세금을 일부 면제해 주었죠.

 

간단하게 말하자면

차를 팔 때 기존의 식민지에서 거두는 세금은 유지하고

나머지 세금은 줄여줘서

기존보다 저렴한 가격에 차 판매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줬던 것입니다.

 

일반 식민지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는 기존보다 싼 가격에 차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니까

가격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손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식민지로부터 거두는 세금은 유지하면서

가격을 낮추는 이러한 방식은

장기적으로 식민지인들을 더욱 종속시키려는 것으로 여겨졌기에

많은 식민지인들이 이에 반대했죠.

 

게다가 당시 식민지에서는

밀수업에 종사하는 이들 역시 많았기에

홍차법이 시행되기 전 네덜란드로부터 차를 밀수해서 팔던 이들 역시

이에 반발하게 됩니다.

 

결국 인디언들로 변장한 식민지인들은

보스턴 항구에서 동인도 회사의 선박들에 잠입해

300상자가 넘는 차를 바다에 버려버립니다.

 

식민지인들의 이러한 행동에 영국 의회는

식민지인들이 보스턴 차 사건에 대한 배상을 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보스턴 항공법을 비롯해

식민지인들로부터 [참을 수 없는 법들]이라 불리는

일련의 법안을 제정합니다.

 

참을 수 없는 법들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반항이 거센 상황에서

1775년 영국군이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식민지 민병대의 무기고를 탈취하고자 하는 작전이 벌어지는데요.

 

이때 식민지 민병대가 영국군에 저항한 끝에 이들을 물리침으로써

본격적으로 [미국 독립전쟁]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이제 13개의 식민지들은

대륙회의를 소집해 177674[독립선언문]을 통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에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의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데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에 있어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선언이 이에 해당합니다.

 

여기에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식민지의 지식인들이

이미 당대 유럽에서 퍼지고 있는 계몽주의 사상을 접하고 있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독립을 단순한 정치적 해프닝이 아니라

세계사적 혁명으로 보는 시선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는 식민지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영국 의회는 오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초기까지만 해도

식민지인들의 행동을 단순한 반란으로 여기고

군대로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실제로 전쟁 초기까지만 해도

영국은 명확한 군사적 우위를 지니고 있었죠.

 

당대 가장 강한 군대 중 하나였던 영국군에 비해

미국의 군대는 막 조직되어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으로부터 미국의 독립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사령관으로 취임한 [워싱턴의 전략]이 큰 역할을 했는데요.

그는 영국군과의 전면전을 최대한 피하고, 시간을 끄는 전략을 선택했는데

이는 물자 보급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영국군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었죠.

 

 

그런데 미국과 영국이 이렇게 싸우고 있을 때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미국이 결국 독립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외국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프랑스가 그러했는데요.

전쟁이 발발하자 벤저민 프랭클린은

프랑스로 파견되어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막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는 영국을 견제하려는 목적 아래 참전을 결정했고

프랑스의 지원은 미국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가 참전을 결정하자

당시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스페인 역시 영국에 맞서 참전하게 되죠.

 

프랑스는 미국에게 군사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각종 차관까지 제공했는데요.

훗날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한 것은

이러한 프랑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국을 견제하려는 목표 아래 참전을 결정했지만

정작 프랑스는 이 때문에 큰 재정적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때의 누적된 피해가

10여 년 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때 루이 16세가 프랑스 시민들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역사의 오묘함이 느껴지지 않나요?

 

결국 1783

영국은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