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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세계사] 영국 귀족들, 찰스 1세의 목을 치다! | 청교도 혁명 혹은 영국내전?

Buddhastudy 2024. 10. 17. 19:16

 

 

17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신하들에 의해 왕이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오늘은 왕의 통치가 당연시되던 시대에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자

영국의 왕위는 엘리자베스 1세의 사촌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이어받게 되는데요.

 

스코틀랜드에선 제임스 6세였지만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로 불렸던 그는

개인적으로 [왕권신수설]

즉 왕권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믿음을

강력하게 견제하던 왕이었습니다.

 

왕권이 신으로부터 부여되었다는 말은

곧 왕이 자신의 통치에 대해서

의회나 백성이 아니라 신에게만 책임을 지면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영국의 귀족들과 의회는

제임스 1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되었죠.

 

제임스 1세는 1625

그러니까 약 20년간 통치를 하고 사망하게 되는데요.

그가 사망한 이후, 왕위는 그의 아들이었던 찰스 1세가 이어받게 됩니다.

 

차일스 1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아버지의 믿음을 이어받아 왕권신수설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당시 의회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 의회는 오늘날의 의회와 같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의회는

오늘날과 같은 강력한 입법 권한은커녕

정기적으로 소집되지조차 않았는데요.

당시 의회는

왕이 의회를 소집할 필요성을 느낄 경우에만 소집되었죠.

게다가 소집된 후에도 왕이 명령하면 곧바로 해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의회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긴 했지만

당시의 의회와 지금의 의회는

성격과 권한이 많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의회가 가지는 중요한 역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있었는데요.

이는 세금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왕이 통치를 위해 자금이 필요할 때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새로운 세금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경우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의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각 지역의 유지였던 젠트리들이었고

지역에서 세금을 거둘 때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생겨난

암묵적인 의회의 권한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의회 구성원들이

찰스 1세의 새로운 통치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불안과 불만감은 찰스 1세가

프랑스의 공주였던 앙리에타 마리와 결혼식을 올리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영국은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교황과 카톨릭으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성공의 길을 가고 있었는데

강력한 카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을

영국의 귀족들이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찰스 1세가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벌이자

영국 의회는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찰스 1세에 대한 불만을 보여주는데요.

 

이는 바로 전쟁 비용의 충당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세금의 도입에

동의해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찰스 1세는 홧김에 의회를 해산했지만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1628년 다시 의회를 소집하죠.

 

이때 의회는 찰스 1세에게 [권리청원]이라는 이름의 문서를 제출하는데요.

법률에 의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구속되거나 구금되지 않는다와 같은

현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권리 청원을

찰스 1세는 급한 사정에 따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찰스 1세는 이때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이후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통치를 해 나갑니다.

당시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통치를 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세금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는데요.

이는 극히 제한적인 재정으로 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죠.

 

이렇게 제한적인 자금으로 통치를 하는 찰스 1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과의 전쟁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전쟁을 한다는 것은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찰스 1세는 이 기간에

그동안 계속 갈등을 빚어왔던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와 화해를 하죠.

그러나 이러한 찰스 1세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는데요.

바로 잉글랜드와 더불어 자신이 왕으로 있던

[스코틀랜드에서의 반란]이었습니다.

 

찰스 1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교회를 통합하려는 계획에

스코틀랜드인들이 반기를 든 것이었습니다.

1638년 에덴버러에서 시작된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찰스 1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국경지대로 군대를 파견했지만

그의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기는커녕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서 뉴캐슬을 점령당하기까지 했죠.

 

결국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교회에 관여하지 않기로 동의하는 동시에

스코틀랜드인들의 전쟁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반란을 일단 진정시킵니다.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의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던 데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재정이 극히 제한되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찰스 1세는 1640413

무려 11년 만에 의회를 다시 소집합니다.

그러나 이때 소집된 의회는

찰스 1세가 필요했던 세금 문제를 논의해 주기는커녕

그동안 쌓인 왕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는 데 집중합니다.

 

결국 찰스 1세는 화를 참지 못하고

11년 만에 소집한 의회를

채 한 달도 안 지난 55일에 다시 해산시키게 되죠.

이 때문에 당시 소집된 의회를 흔히 [단기의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겪으며 피폐해진 재정을

의회의 도움 없이 해결할 수는 없었고

결국 찰스 1세는 같은 해 11월에 다시 의회를 소집하죠.

이때의 의회를 [장기의회]라고 부르는데요.

 

장기의회는 찰스 1세의 실정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그의 심복이었던 스트레포드 공작에 대한 사형을 진행하고

앞으로 왕의 명령 없이도

최소 3년에 1번 의회가 소집될 것

의회의 동의 없이 왕이 의회를 해산시킬 수 없다는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법들을 통과시킵니다.

 

이러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찰스 1세에 대한 의회의 성토가 계속되자

찰스 1세는 16421, 결국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400명의 군인과 함께 의회에 쳐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가장 강한 비판을 쏟아냈던 5명의 의원을 체포하고자 했지만

이들은 소문을 듣고 이미 도망친 상태였죠.

 

이때 찰스 1세가 의회의 의장이었던 윌리엄 렌트할에게

도망간 5명의 행방에 대해 묻자

그는 저는 제가 섬기는 의회가 명령하는 것 이외에는

보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이는 국회의장이

자신이 섬기는 대상이

왕이 아니라 의외임을 명확히 한 선례를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찰스 1세가 군인들을 대동하고 의회에 쳐들어온 이 사건 이후

의회는 왕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소집했고

이 소식을 들은 찰스 1세는

런던을 탈출하여 의회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결국 영국은 내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는데요.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도시 지역에서 의회에 대한 지지 세력이 강했던 반면

농촌 지역에서는, 왕에 대한 지지가 강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봤을 때 내전 초기까지는

찰스 1세의 군대가 급조된 의회의 군대에 비해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의회파가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죠.

 

여기에는 의회파의 크롬웰과

그가 조직한 [신형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신형군의 군인들은

기존의 군인들과 달리, 단기적인 용병이 아니라

크롬웰의 지휘 아래 직업군인으로 훈련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더불어 크롬웰은

신형군의 장교들이 의회의 의원이 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신형군의 군인들이 자신 외에

의외 특정 정파와 손잡는 것을 미리 차단합니다.

 

결국 16456, 네이즈비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 이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피신하지만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스코틀랜드인들은

돈을 받고 그를 다시 잉글랜드 의회에 넘기죠.

이로써 내전은 잠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에도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의회 몰래

수차례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외부와의 동맹을 통한 재기를 노리는데요.

이로 인해 잠시 2차 내전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승패가 결정될 때까지 수년이 걸렸던 1차 내전과는 달리

단기간에 의외의 승리로 끝나게 되죠.

 

그러나 찰스 1세가 1차 내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의회를 무마시킬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은

일부 의회 의원들로 하여금

과연 찰스 1세에게 왕의 권력을 다시 주어야 하는지

그 자체에 대해서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왕을 폐위시킨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이 사안을 두고는

의회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히 크롬웰과 그의 신형군은

찰스 1세의 권력을 뺏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지지했는데요.

크롬웰의 뜻을 따르는 신형군은

1648년 의회로 진군하여

뜻이 다른 의원 45명을 체포하고 146명의 의회 입장을 차단하죠.

결국 남은 75명의 의원들은

찰스 1세에 대한 재판을 진행할

최고법원을 열 것을 표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재판에서 찰스 1세는

폭군, 반역자, 살인자, 그리고 공공의 적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에 처해집니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든 가운데

1649130

공개적으로 진행된 처형에서

찰스 1세는 마지막 말로

자신 역시 백성들과 신하들의 자유를 원했다고 주장하며

그러나 피통치자의 자유는

결코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치하는 정부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통치자와 피통치자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요.

 

이어서

나는 이제 부패한 왕국을 떠나 부패하지 않는 왕국으로 간다라고 밝히며

아버지였던 제임스 1세로부터 배웠던 왕권신수설을

죽음 직전까지 견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