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치러진 1946년 선거에서
공산당이 총 300석 중 114석을 획득하며
제1당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거 이후
공산당과 공산당 이외 정당들 간의 갈등이 점점 커졌는데요.
이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948년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에드바르트 베네시를 상대로
쿠데타를 벌이게 되죠.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두려워했던 베네시는
이에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는데요.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향후 40여 년간
공산당의 1당 독재 체제가 갖춰집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 중 하나였기에
이곳에서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서방권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긴 했지만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공산당은 많은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로부터 불만을 사게 됩니다.
여기에는 우선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소련 공산권에서는
스탈린 통치 기간 동안의 폐단을 비판하며
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인데요.
스탈린의 뒤를 이어서,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 된 니키타 후르쇼프가
이것에 큰 영향을 했죠.
그러나 소련과는 달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 시대에 억울하게 처벌을 받았던 이들이
1967년까지도 복권되지 못했는데요.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 제1석이었던 안토닌 노보트니가
여러 의견을 묵살하고, 강경한 노선을 고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체코슬로바키아는 1960년대 들어서
경제적으로도 침체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소련의 잘못된 통치 방식 때문이었는데요.
사실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경제적으로 소련 지역을 앞지르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직전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의 구매력이
소련 지역 시민들의 구매력보다 20% 정도 높았죠.
그러나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이러한 경제력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 [화폐개혁]이 진행되었고
이 결과 체코슬로바키아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10% 넘게 감소했습니다.
게다가 잘못된 경제계획으로
석탄 생산량이 예상에 비해 크게 떨어지자
일반 가정에서는 난방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죠.
많은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이
질이 낮은 강탄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이에 이미 1950년대부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잘못된 경제정책과 경직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불만이
꾸준히 제기되었습니다.
이렇게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사회적 불만이 꾸준히 증가하게 되자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 제1석이자 대통령이었던 안토닌 노보트니의 지지도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 슬로바키아 지역의 지도자였던 알렉산데르 둡체크는
공개적으로 노보트니를 비판했는데요.
둡체크는 자신이 담당하는 슬로바키아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언론의 자유화를 추진하는 등
노보트니와는 반대의 노선을 걷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도 떨어진 상태에서
당내 지도자들로부터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자
노보트니는 소련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1967년 12월에 소련의 지도자였던 브레즈네프를
비밀리에 체코슬로바키아로 초대했는데요.
노보트니는 이 자리에서 브레즈네프로부터의 재신임을 확인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불만을 잠재울 생각이었죠.
그러나 막상 체코슬로바키아에 도착한 브레즈네프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원들의 분위기를 보고 놀라게 되고
노보트니를 교체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때 브레즈네프는 노보트니의 후임자로 둡체크를 고르는데요.
여기에는 둡체크가 어린 시절을 소련에서 보냈다는 것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소련식 대학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1968년 1월 5일 둡체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제1서기가 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둡체크는 제1서기가 되기 전부터
슬로바키아 지역에서 언론의 자유화를 추진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기에
많은 이들이 그가 이후에도 이런 노선을 이어갈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로 인해
과연 어디까지 자유가 허용될 것인지에 관해서는
시민들의 의구심이 존재했었죠.
이때 시민들로 하여금 둡체크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주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2월 4일 체코슬로바키아 전국으로 중계되는 한 TV 인터뷰에서
골드스투커라는 학자가
노보트니가 비공개적으로 추진한 잘못된 정책들을 폭로한 것입니다.
종전의 사회 분위기라면
당내 회의가 아니라 TV 중계로 이러한 비판을 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고
만약 어찌저찌 비판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골드스튜커는 엄청난 처벌을 감수해야 했죠.
그러나 둡체크는 어떠한 처벌도 지지하지 않았고
이 사건은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로 하여금
둡체크의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진심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고 불리게 되는
일련의 정책들을 실행합니다.
그는 그동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사소한 문제들을 두고
너무나 가혹한 처벌을 내렸음을 밝히며
앞으로 당이 건강한 경제적 토대 위에, 보다 진보된 사회주의 사회,
그리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주의적 전통에 맞는 사회주의를 만들 것을
앞으로의 과제라고 밝혔습니다.
이런 취지 아래 그는 3월 4일 검열 제도를 완전히 폐지합니다.
그동안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언론은
당의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이 조치 이후로는 당과 정권도 자유롭게 비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검열을 폐지하겠다고 밝힌 지 1달 후인 4월
둡체크는 훨씬 더 과감한 조치를 밝히게 되는데요.
그는 “액션 프로그램이”라고 불리게 된 계획에서
언론의 자유뿐만 아니라
연설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 또한 허용했습니다.
게다가 경제 문제에 있어서 기존의 공산당과는 다르게
소비재의 중요성을 인정했고
다당제의 가능성까지 언급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둡체크는 비밀경찰의 역할을 크게 제한하고
소련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서방 국가들과도 협력관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둡체크가 이처럼 파격적인 계획을 발표하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시민들이
그동안 쌓인 사회적 불만을 폭발적으로 분출하게 됩니다.
종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소련에 대한 비판이 언론에 공개적으로 등장했고
공산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사회민주당과
수많은 정치 클럽들이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스탈린의 통치 기간 동안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던 이들에 대한 재조명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피해자들이 라디오와 TV 인터뷰에 등장하기도 했죠.
이러한 사태에 직면해서 당내 보수 세력들은
둡체크에게 항의하고 사태를 진압하라고 요청했지만
둡체크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브레즈네프와 소련은
당연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분노한 브레즈네프와의 대화에서
둡체크는 소련에 대한 지지를 밝히긴 했지만
대화 이후에도 자국에서의 정책에는 이렇다 할 변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결국 브레즈네프는 군사적 개입을 결심하게 되고,
8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소련, 그리고 소련의 지시를 따르는 헝가리, 폴란드, 불가리아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침입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로 하여금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까 봐
동독은 일부러 제외되는데요.
동독 군대가 개입할 경우
체코슬로바키아의 여론이 폭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하룻밤 사이에 20만 명의 군대와 2천 대의 탱크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들어섰고
이들은 공항과 군부대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7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죠.
상황을 알게 된 둡체크는
피해자가 증가할 것을 우려하여
자국의 시민들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요구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저항을 시도했습니다.
군인들에게 일부러 길을 잘못 알려주는 등의 소소한 저항도 있었지만
항의의 표시로 분신자살을 한 학생도 있었죠.
한편 소련군이 국경을 침입한 21일 새벽
둡체크는 당내 동지들과 함께 바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옮겨졌는데요.
그는 모스크바에서 협박에 가까운 분위기 속에서
이전의 조치들을 철회한다는 내용을 담은
모스크바 프로토콜에 서명하게 됩니다.
이 문서에 서명한 이후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가게 되지만
둡체크는 곧 구스타우 후사크라는 후임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게 됩니다.
둡체크는 당에서 쫓겨났고
산림 관리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결국 둡체크의 후임자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지도하게 된 후사크는
정상화라는 명목 아래
둡체크가 추진했던 계획들을 모두 제자리로 돌려놨는데요.
둡체크에 동조했던 당원들을 숙청하고
당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던 지식인과 시민들을
기존의 자리에서 내쫓았습니다.
비밀경찰의 권한을 다시 강화하고
둡체크가 시도했던 경제개혁들을 다시 계획경제의 틀 아래 묶어둡니다.
언론의 자유가 사라진 것은 물론이겠죠.
완전한 정치적 신임을 얻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발언 자체가 금지됩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20년이 지난 후인 1989년에서야
벨벳혁명이라 불리는 과정을 통해서
제도적으로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하게 되는데요.
노년이 둡체크는
이때도 개혁 세력에 대한 자신의 지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며 힘을 실어줬고
3년 후인 1992년
72살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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