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중반 유럽은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유럽의 강대국들은
1814년 오스트리아의 [빈]에 모여
전후 처리를 어떻게 할지를 두고 회의를 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이 회의에는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같이
나폴레옹과 직접 전쟁을 벌였던 국가들뿐만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 덴마크, 그리고 스위스와 같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했습니다.
당시 독일의 작은 정치 세력들까지 포함해서
총 200여 개의 정치세력 대표들이 빈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빈 회의]의 결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몇 가지 내용에 대해서 서로 합의했는데요.
이 중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가 나폴레옹의 전쟁 기간 동안 획득한 영토를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전쟁과는 직접 관련이 없었지만
이후에 강대국 간의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
크고 작은 영토 조정이 있었습니다.
이 결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 비해 더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토 조정은
현실적인 힘의 크기에 맞게 영토를 조정해서
미래의 또 다른 전쟁을 막기 위함이었죠.
지금까지 말씀드린 빈 회의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빈 회의는 대단히 보수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진 회의였습니다.
메테르니히를 비롯한 유럽의 외교가들은
강대국들 간의 협력을 통해서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유럽 전반에 전파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이념을 [억압]하고자 했습니다.
때문에 [빈 회의]에서 유럽의 정치인들은
추후에 특정 지역에서
독립운동이나 혁명의 움직임이 시작되면
해당 움직임의 해결을
그 지역에만 맡겨놓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이 서로 협력해서
혁명의 불꽃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로 합의했습니다.
빈 회의의 결과 합의된 유럽의 새로운 질서는
큰 틀에서 1848년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30년 넘게 유지됩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전파되기 시작한
민족주의의 움직임을 억압하는 것이
유럽 강대국들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였는데요.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민족주의 운동이
곧바로 오늘날의 민주주의 운동과
유사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가져야 한다는
당시 [민족주의의 이념]이
많은 경우 민족 단위와는 상관없는 영토를 지닌 군주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독일 영토에는
당시 40개가 넘는 영토들이 있었는데
만약 독일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같은 독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서 함께 살자고 주장할 것이고,
이 새로운 국가에서
모든 독일인들에게 적용되는 헌법을 만들자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헌법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자고 주장하게 될 텐데요.
당시의 민족주의 운동이 곧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쉽게 연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기존의 군주와 영주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겠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럽의 강대국들은 프랑스 혁명 이후 민족주의의 확산을 억압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두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 유럽의 강대국들이
1840년대까지 민족주의 운동의 확산을
성공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 당시 유럽에서는
공식적인 억압에도 불구하고
이념으로서의 민족주의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점점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언론 매체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장소로도
각종 소식이 빠른 속도로 전달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말하자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는
당시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붙잡고 씨름해 봐야 하는 이념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점 민족주의의 이념이 확산되자
지식인이 아닌 시민들 사이에서도
점차 민족주의가 하나의 [대세]로 자리잡게 되죠.
특히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독립된 국가를 아직 만들지 못했던
그리스,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 그리고 독일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강했습니다.
이렇게 한쪽에서는 지식인들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념이 점차적으로 퍼져나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강대국이
새로운 이념이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억압하는 긴장된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요인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바로 [경제 위기]였습니다.
유럽은 1845년부터 1846년, 그리고 1847년에 이르기까지
몇 년 연속 안 좋은 기후로 인해 큰 [흉작]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당시 일반인들의 식량에 있어서 큰 역할을 차지했던 감자 농사가
[감자 역병]으로 인해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감자 역병은 우리에게는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는 원인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죠.
그러나 당시 감자는 전 유럽적으로 매우 중요한 식량이었고
감자 역병은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1840년대 중반
유럽은 사회적 이념적 그리고 경제적 위기가 겹쳐서
언제든지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1848년 2월 21일,
그러니까 공교롭게도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출판된
마르크스와 앵글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이들이 오늘날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 문장
...
즉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1848년 1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서는
민족주의를 꿈꾸는 지식인과 기근에 지친 시민들이
외세인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반대하며 [반란]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1848년 전 유럽을 강타한
1848년 [혁명]의 시작이 됩니다.
이어진 2월에는
프랑스에서도 혁명이 발생하게 되는데,
프랑스에서는 민족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왕정의 폐지를 주장하며
왕이었던 루이 필립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선언하게 되죠.
이렇게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곧 전 유럽으로 순식간에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이념을 갈망하던 지식인들과 불황에 지친 시민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는 역시 당시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던
언론 매체가 큰 역할을 했는데요.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된 지 몇 주도 지나지 않은 3월 11일
독일의 작가 게오르크 베어트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부디 꼭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주세요.
이 혁명은 온 세상의 모습을 바꿀 거니까요.
그래야 하고 그럴 것입니다.
공화국 만세”
베어트가 말했듯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은
그곳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곧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됩니다.
독일에서도 프랑스와 인접한 서쪽 지역으로부터 혁명이 시작되었죠.
특히 도시별로 대학들이 발달한 독일에서는
지식인과 학생들이 주도해서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의 민족 국가를 주장하며 봉기하게 됩니다.
이들은 이미 3월 18일,
그러니까 프랑스에서 혁명 소식이 전해진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프랑크푸르트에서 586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국민의회를 엽니다.
이는 독일 최초로 선거를 통해 구성된 의회였죠.
학생과 지식인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전체 의원 중 무려 94명이 교수였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 독일에서는
이 의회를 포페스건팔라멘트
그러니까 [교수의회]라고 부르기도 했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곧 의회 민주주의에 바탕한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작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 번 시작된 혁명의 물결은
곧 프랑스, 독일을 넘어서 전 유럽으로 퍼졌는데요.
오스트리아, 덴마크, 헝가리,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벨기에, 아일랜드,
그리고 스페인에서도
크고 작은 혁명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움직임들은 대부분
이전의 전제 군주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헌법을 도입하거나
민족주의 운동에 기반해서 외세를 몰아내고
하나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1848년의 혁명 움직임은
심지어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도 영향을 주었는데요.
콜롬비아, 칠레, 그리고 브라질에서도
1848년 곧바로 혹은 몇 년 내에 혁명적 움직임이 일어났죠.
그런데 순식간에 전 유럽을 강타한 혁명의 불꽃은
빠르게 퍼진 만큼 곧 빠르게 꺼지게 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혁명이 조직적인 움직임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유럽으로 순식간에 퍼진 혁명을 지켜보며
유럽의 군주들은
1848년 봄까지는 두려움에 휩싸여
시민들의 요구 사항을 많은 부분 수용하며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시민들이 사실은 생각하는 것만큼 잘 조직되어 있지 않고
때로는 군사적 위협 앞에 쉽게 와해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혁명 내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의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주장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자신들보다 더 과격한 주장을 펼 도시의 수공업자와 노동자들을 지켜보며
점차 이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혁명 초기 혁명 세력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던 정치 기득권을 지켜보며
차라리 이들과 함께하기를 선택하게 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1848년 여름을 가리키며
“부르주아는 더 이상 혁명 세력이 되는 것을 멈췄다”라는 말을 했는데요.
오늘날 우리가 부르주아라는 단어를 접할 때
더 이상 그 안에서 혁명적 이미지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 이후의 모습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1848년 1월부터 시작돼서 전 유럽을 휩쓴 혁명은
같은 해 가을이 되면서
점차 반동파에 의해서 힘을 잃게 되고,
이전에 혁명 세력이 이끌어냈던 정치적 요구들이 대부분 무효화되면서
일단은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1848년의 주요 이념들, 특히 민족주의의 이념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1848년 봄,
그러니까 혁명의 시기를
흔히 [민족들의 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후 20여 년간 민족국가 건설을 둘러싼
과제에 골몰하게 되고
[1870년대]에는 마침내
그토록 시민들이 갈망하던 통일된 [민족국가]를 얻게 됩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1848년에 시민들이 원하던 것들이
4반세기 이후에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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