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만든
이 온갖 전도몽상 망상을
거기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됩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그러면 그 핵심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중요한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여러분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똑바로 봐야 돼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여러분 자기를 뭐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이 만든 전도몽상에서 벗어나려면
처음에 자기를
몸이나 마음
우리가 말하는 마음이라는 게
생각, 감정, 느낌의 복합체를 말합니다.
그거라고 여기면은
전도몽상에서 못 벗어나요.
이게 가장 중요한 제1단계입니다.
그래서 저희 마음 학교에서 식스존을 가르치는 이유가
생각, 감정, 감각 느낌이
내가 아니라는 걸 가르치는 거예요.
부처님도 생각, 감정, 느낌은
오온이라고 오온개공을 가르치셨잖아요.
반야심경에서도, 그렇죠?
또 그 예수님도
천국 가는 길을 물어봤을 때
네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이게 첫 번째 명제인데
가진 걸 다 버리라니까
사람들이 자꾸 돈 생각만 하는 거야.
“내 재산을 버리라는 거구나”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내가 얼마를 가졌다”는 이 생각을 버려야 돼.
“자기한테 돈이 얼마나 있다 없다”
이런 생각을 버려야 돼.
내가 그러면 돈이
우리가 진정 1원이라도 가질 수가 있어요?
여러분이 영원히 1원이라도 가질 수 있어?
내 통장에 돈이 100억이 있어도
그건“ 내가 가졌다” 내 생각이지
진짜 내가 소유한 게 아니에요.
영원히 가질 수도 없어.
서로 간에 인간 사회에서는 서로 간에
“이건 니 꺼”라고 약속한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예컨대
무슨 우리나라가 공산화가 돼서
모든 사유재산이 전부 다 부정되면
하루아침에 내가 재산이 몇 조 재산이라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잖아, 그죠?
그 약속을
그게 진리는 아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허망한 생각에 불과한데
그 생각에 우리는 엄청난 신뢰를 부여하다 보니까
마치 내 소유인 양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몸도 자기 것 같아요?
그럼 왜 내 뜻대로 안 돼?
안 아프고 싶은데 아프잖아.
안 죽고 싶은데 죽잖아.
안 늙고 싶은데 늙잖아.
그런데 우리 사회는 끝없이
“이 몸은 너고
너의 생각 감정 느낌은 네 마음으로써 너의 행동이기 때문에
그 행동에 대해서 너는 책임져야 된다”라는 것을 가르쳐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이걸 다 나라고 착각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양자물리학하고
거시물리학의 차이를 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중력을 발견한 뉴턴은
사과나무 밑에서 우연히 사과 떨어지는 거 보고
“아, 사과 왜 떨어질까? 그냥 허공에 둥둥 떠 있어야지?
지구가 당기는 힘이 있구나”
이 중력을 발견했어요.
그 이후에 그냥 눈부시게 물리법칙 같은 것들이 개발되고
중력법칙에 의해서
이런 여러 가지 거시적인
3차원 세계 속에서의 물리법칙들이, 공식들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이렇게 공식들이 개발됐어요.
근데 양자물리학에 들어가서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양자물리학 세계에서는
모든 거시물리학의 공식들이 다 부정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거시물리학이 너무나 당연한데
우리 이 핸드폰 같은 거 이거는
거시물리학이 아니고 양자물리학을 이용해서 만든 거예요.
근데 또 미시의 물리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완전히 까꾸로거든.
근데 이 두 개가 정말 공교롭게도 잘 조화해서
이 세상이라는 현실을 이루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사회가 만든 우리는
이렇게 사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러이러한 그 상식과 어떤 사회 규율을 따라서
이 몸은 나고, 이 마음은 나의 어떤 행동거지를 규율하는
어떤 도덕적 판단의 기준
뭐 이런 거를 다 수용을 해야죠.
일단 인정을 합니다.
해야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 깨달음의 세계, 여러분의 거듭난 세계, 구원의 세계는
양자물리학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 양자물리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이 모든 게 부정되는 거예요.
이 몸도 나라는 게 부정되고
이 마음이나 생각, 감정, 느낌도
전부 다 우리가 그렇게 나의 행동, 나의 생각이라고 간주한 것뿐이지
사실은 지멋대로 일어나는 거야.
여러분 잘 생각해 봐.
여러분이 생각하려고 그 생각이 났어요?
그냥 어떤 생각이 불쑥 솟아난 거 아니야, 그죠?
여러분은 간밤에
오늘 무슨 꿈을 미리 예단하고 꿔요?
그냥 그 꿈이 지멋대로 나오는 거 아니야, 그죠?
여러분이 태어나려고 태어났어?
어느날 보니까 이 상황 아니야. 그죠?
이게 양자물리학의 세계와 똑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생각이 만든 그 전도몽상에서 벗어나려면
제일 중요한 게
[나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라는 것을
여러분이 정견]하셔야 된다고요.
이게 바로 반야심경에서 하는 말이에요.
관자재보살행 신반야바라밀다
조견오온개공도 일체고
조견_ 정견한다는 거예요.
오은개공_ 생각 감정 느낌 이런 것들이 전부 다 공하다, 그림자와 같다.
신기루와 같다는 것을 관하면, 끝까지 관하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도일체고액_ 도는 건너간다는 거예요.
차안에서 피안으로
또 이 뭐라고 할까? 카톨릭 용어로 말하면
이 중생세계에서 어떤 천국으로.
이렇게 우리는 그 생각이 만든 나
생각이 만든 이 세상 생각
만든 이런 사회 시스템, 거대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그거를 일단 받아들이고 살지만
그것 속에서 살면서도 그거에서 벗어나 있는
그러한 것을 공부할 때
우리는 거기서 자유를 얻게 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정견이라는 행위, 정견이라는 것은
이렇게 말이 정견이지
사실은 깨어나는 거예요.
근데 놀랍게도
성경이나 불경이 똑같이
[깨어 있으라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죠?
깨어있으라는 말이 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왜냐하면 깨어난 사람 아니면 몰라.
그게 문제야.
잠자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잖아요.
/그럼 깨어 있으라는 게 뭐냐?
“모든 거는 네가 분별하고
그렇다고 인식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는 거예요./
우리 회사 직원들은
저를 우리 회사 대표라고 볼 것이고
우리 집사람은 저를 자기 남편이라고 볼 것이고
여러분들은 저를 교장이라고 볼 겁니다.
우리 애들은 만만한 제 아버지라고 볼 것이고
누가 옳게 보는 거예요?
아무도 옳은 거 아니에요, 그죠?
다 그냥 자기 식대로 보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여러분을 무지하게 이쁘게 보는 분도 계시지만
여러분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누가 맞아요?
아무도 안 맞아요.
다 자기식대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깨어있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거 내가 이렇게 보는 거지”라는 거를 아는 거예요.
“이거 내가 이렇게 보는 거지”
“너는 내가 너라고 보는 것이지”
이걸 보고 있는 거예요.
이걸 보는 게 왜 중요하냐면
그거를 하나씩 둘씩 보아 나가다
마침내 “온 세상을 다 내가 이렇게 색깔을 칠했구나”
내가 이 세상을 이런 식으로
“내가 사는 이 세상은 내가 창조했구나”라는 걸 보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그 세상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알다시피
이 세상이 천국이에요? 지옥 같아요?
지옥 같죠?
왜 지옥 같을까?
내가 지옥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지옥 같은 거예요.
근데 정말 평생을 살면서
여러분이 잘 보면
평생 아마 몇 개의 순간은 천국이었을 거야.
예를 들면
자기 지금 짝을 만날 때 연애하던 시절이라든가
아니면 뭐 첫 아이를 얻었을 때의 그 며칠간이라든가
아니면 또 자기가 소원하고 바라던 무슨 시험에 합격하거나 승진하거나
뭔가 경사가 났을 때
그 짧은 순간만은 천국이었을 거야. 그죠?
근데 그게 오래 가요?
안 가죠.
그게 문제야.
그러니까 우리는 자꾸
행복이라는 걸 추구하면서
그 행복의 조건들이 있어요.
행복은 조건이야.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세상의 행복은.
그 조건을 성취하려고 무진 애를 써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순간
여러분은 불행 속으로 들어가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조건은
동시에 달성되지 않게 돼 있어요.
“모든 조건을 다 달성했다.” 이건 말이 안 돼요.
그죠?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는 한 동시에 불행하게 돼 있어요.
모든 걸 다 성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또 모든 행복은 달성하는 순간
동시에 또 다른 행복을 추구하도록
이상하게 그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엊그저께도 제가
무조건적인 행복이라는 말을 썼지만
여러분들이 정말 무조건적인 행복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에요.
그리고 그게 부처님의 그 평상심이고.
그런데 그것이 되려면
여러분들이 그것과 친숙해져야 돼요.
그게 이미 우리 삶 속에 있거든요.
근데 우리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정화되지 못해서
그게 행복인지도 몰라보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꼭 어리석게도
먼 훗날 가서 그때가 행복했었다고 그러죠.
안 그래요?
“그때가 행복했어”
그때는 몰라
지나놓고 알아.
그럼 그때라는 그때의 그 메인 부분이 뭘까?
그때.
“그 시절이 행복했어요.”
그 시절이 도대체 뭔데?
자기는 머릿속에 그 시절, 그때 뭐 이런
그것도 보면 생각 감정 느낌을 가지고 그때라고 말하고 있어요.
근데 사실은
그 생각 감정 느낌을 만들어 놓고 띄워놓은 그 배경에 뭐가 있냐면
그냥 순수하고, 깨끗하고, 정갈한 생명에너지밖에 없어요.
그게 지금도 있어요.
근데 우리는 생각 속에서 사느라고 그걸 못 보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거야.
밖이 그야말로 5월에 엄청 아름다운
정말 축제 같은 화창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시커먼 선글라스 쓰고
“날이 왜 이렇게 어둡냐?”
지금 이러고 있는 거하고 비슷하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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