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소승불교든 대승불교든
결국 끝에 가서 만나는 거는 깨달음의 자리고
기독교도
저는 제가 이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한번 기독교와 불교가 추구하는 진리가
왜 하나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성경에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책을 한권 써보려고 그래요.
근데 어쨌든 간에 그거는 그때 가서 얘기고
그러면 한번 우리 이 생각을 해봅시다.
정말 진리라는 게 있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부처님이 죽고 난 다음에 없어진 게 아니고 진짜 실존한다면
진리 = 하나님 = 부처님이라면
= 예수님이고 = 또 참나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그러면 그 진리는
지금 살아서 지금도 역사해야 되지 않아요?
제가 엊그저께 너무 웃기는 동영상을 봤어.
이 사진에 하얗게 무슨 희미한 유령 같은 건데
모습이 예수님이 모습이야.
누가 봐도 사진 조작이야.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작업하신다는 증거가 사진으로 나왔다고
이걸 동영상에 올려놓은 거야, 누가.
그러니까 참 어리석기도 하지만
그럼, 여러분 잘 생각해 봐요.
지금 저렇게 예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저렇게 바쁘게 일하시는데도
우크라이나 전쟁은 일어나고
이 세상은 아프리카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이 지경인 거야.
그러니까 참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실력이 보잘것없는 거야, 한마디로
나보다도 못한 것 같아.
그거를 동영상 진리라고 올려놓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게 기독교인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그건 미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 참 진리가 있다면
지금 아니 계신 곳이 없어야 될 거 아니에요?
진리가 여기는 없고 저기만 있어?
이건 보편 타당성에 어긋나잖아요. 그죠?
그럼 진리가 지금 여기도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성령이여, 오소서” 하고 울고불고 난리던데
이미 와 계신데
지가 못 보는 거거든.
그러면 성령이 지금 여기 와서 어떻게 계실까?
[이와 같이] 계세요
[이와 같이]
이렇게 저로 하여금 얘기하게 계시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얘기에 공감하면서 듣고, 보고 계세요.
여러분들이 자기가 자기를 살고 있는 게 아니고요.
성령이, 생명과 의식이
여러분을 체험하고 있는 거예요.
나라는 생각만 여기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이에요.
생각이 있기 전에는 뭐가 있었는데?
그러니까 치매 환자가 되면
나라는 생각 없이도 잘 살아요.
치매 환자의 가장 좋은 점은
걱정근심이 없다는 거예요.
왜?
100% 내어 맡겼거든
무슨 걱정 근심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진리이신 하나님은
모든 존재 속에서
그 존재로서의 그 모습과 그 모든 언행까지도
하나하나 다 알고 계시는 거야, 다 관여하고 계시고.
너무 놀랍지 않아요?
그러니까 석가가 지금 여기 있는 거예요.
예수가 지금 여기 계시고.
그런데 왜 이거를 선악의 대결
이런 구도로 몰고 가냐면
우리의 에고가
탐진치, 이거 가지고
요 에고의 몸과 마음
몸을 남보다 더 잘 입히고, 더 그 욕망을 달성하고
남 위에 군림하려고 들고, 인정받으려고 들고, 시기 질투하고
이런 것 때문에 이 모든 게 생긴 거예요.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도
푸틴의 야욕 때문에 생긴 것뿐이에요.
한 사람의 지도자의 잘못된 생각으로
그 사람은 그걸 엄하게 이렇게 정당화하지만.
그러니까 그런 번뇌 망상 미망에서 깨어나면
세상에 그런 일이 없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거를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라고 하는 겁니다.
그냥 지멋대로
예수님 부처님이 지금 너와 같이 있고
너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생각 감정 느낌으로 지옥을 만들고 있는 것
그러니까 불교 선에서는 이거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여러분 잘 보세요.
*!
제가 이걸 치는 것도 있지만 여러분 듣고 계시잖아요.
여러분 안 들으려고 할 수 있어요?
*! *!
안 들을 수 있어요?
자동으로 들리죠.
그러니까 이게 그냥 진리예요.
이제 이걸 통해서 바로 진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못 들어가냐 하면
여러분 또 번개같이 분별을 일으켜요.
지금 여기 거의 90프로 사람이 벌써 분별을 일으켰어.
나는 눈만 봐도 알아.
이 사람이 무슨 분별하는지.
“아, 저 치는 소리”
치는 소리가 아니에요, 소리가 아닙니다.
“아, 그럼 듣는 성품?”
그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거예요.
생각을 자꾸 동원하지 말라고.
그냥 지금 뭐 살아있는 게 있잖아. 그죠?
살아 있으니까 이해도 하지.
소리도 듣고.
난 그걸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
어떤 유명한 사진작가가 오로라를 캐나다 가서 찍어서
사람들이 오로라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그런다는 동영상을
마음학교 유튜브에다 올려놓은 적이 있어요.
근데 사진 작가 말은
실제로 그 오로라를 자기하고 본 사람들은
그 너무 장엄하고 황홀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는 순간
다 비명을 지르고 울고 난리가 났대요.
그 어떤 진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솜씨 아니면 이럴 수가 없다 해서
마음속에 그게 너무 경이롭고 신비하고 장엄해서
저절로 눈물이 나오고, 찬송이 나오고 그러더라는 거예요.
그 사진작가가 아마 기독교인이었나 봐.
그런데 그거를 동영상으로 찍어갖고 와서
천문대 직원들한테 틀었더니
아무도 울지 않고
그냥 “이쁘구나” 이러더라는 거예요.
그 차이를 자기가 실감하고
그거를 다시 구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입체 돔 안에서 그 360도 화면을 만드는 장치가 있대요.
그거를 기를 쓰고 만들어서
진짜 실재하고 거의 똑같이 그렇게 만들어서 트니까
사람들이 그때 가서 비명을 지르고 울고불고 하더래요, 똑같이.
이 얘기를 제가 왜 하냐면
그 오로라나
사실은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게
지금 여러분 눈앞에 있어요.
여러분 옆 사람들이 그보다 더 아름다워요.
여러분 옆 사람 눈을 한번 보세요.
그 눈동자 뒤에 뭐가 있을까요?
뭐가 있어서 저렇게 깜빡거리게 하고, 쳐다보게 하고, 빛이 날까요?
근데 우리는 자기 생각의 필름을 딱 앞에다 내리고
저거 아무개, 저건 의자, 저건 방, 저건 아파트, 저건 나무
깨어 있지 못한 거예요.
자기 생각, 자기감정, 감각, 과거의 마음속에 갇혀 있어요.
“나 이거 다 안다”라는 안다병에 갇혀 있다고요.
그래서 깨어 있지 못하는 거예요.
깨어 있다라는 것은
지금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성령 속에 사는 거고.
이게 불교식으로 말하면
지금
*!
이것이에요.
깨어난다는 것은
자기 원래 있는 그 본래면목을 되찾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고, 그게 예수님이 말한 나고, 그것이 부처님이 찾은 참나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잠깐은 뭔가 감을 좀 잡을지 몰라.
근데 불과 5분 뒤에 여러분들은
이 감을 잊어버릴 거예요.
왜?
그만큼 여러분들은 중독돼 있는 거야, 생각에.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나도 미치겠어요.
어떻게 어떻게 끌어다가 해븐존 과정에서 그래서 이 맛을 보여.
그날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한 달만 지나잖아요.
“모르겠는데요.”
엄한 소리를 또 하기 시작해.
“그때 그 울고불고
‘알았어요. 선생님 이거군요.’ 한 그건 어디로 갔어요?” 하고 물어보면
뭐라 그랬는지 알아요?
“그건 뭐 그날 체험이죠. 뭐”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귀신같이
하나의 체험을 생각, 감정, 감각으로 변환시켜서
기억 속에 저장하고, 식스존을 만들어버려요.
그리고 안다는 거야.
뭘 알아 알기는
지 번뇌를 아는 거지
그러니까 자기가 안 죽는 거예요.
그게 에고거든
에고가 하는 짓이 그거예요.
끝없이 알려고 들고, 더 좋은 걸 추구하는 거예요.
걔만 좀 쉬면
눈앞의 진리가 저절로 드러나서
그냥 항상 여기서 총천연색으로 활동하고 계실 텐데
이놈의 에고가 내가 알고 내가 달성했고
내가 이미 체험하고 있다고
망상을 떨고 있는 거야.
이제 그렇게 되면 그런 사람들이 꼭
저도 이거 참 오래 앓은 병인데
“나는 이거 아는데, 너희는 이거 모르지?”
이런 병에 걸려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게 돼요.
그 세상이 지가 제일 높은 거야.
그러니까 자기라는
그 허깨비 속에 또 갇히는 거예요.
깨달음도 정보화하고, 이 경이로운 체험도 정보화해서
다 자기 재산화하는 거야.
아무것도 자기가 가진 게 없어야 돼요.
나도 없는데, 내가 가진 게 어딨어?
근데 이게 말은 쉬운데
이거 하는데 10년 걸려요.
빨라야 10년이에요, 빨라야.
제가 이렇게 사람 좀 깨어 놓으면
그다음에 한 몇 년 동안은
저 잘난 꼴을 하는 걸 보는데
제가 참, 얼마나 잘난 짓 소리를 하는지 몰라요.
“내가 잘나서 깨달았다. 내가 잘나서 이렇다”
“나 이런 체험하고 있다”
그 병 고치는 데, 10년 걸립니다.
자 어쨌든 다시 이 삶으로 돌아와서
이 삶 전체가
바로 진리 그 자체의 펼쳐짐이라는 것에 대해서
늘 깨어 있어야 돼요.
그리고 늘 그것을 우리가 체험하고 있어야 되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면 안 돼.
그게 예수가 말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이고
또 무상정등각이에요. 불교에서 말하는.
그거를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길을 통해서
어떤 체험을 해야 되고
또 어떤 길을 통해서 그 길을 갈 수 있는가?
이거를 10분 쉬고 얘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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