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73] 중도란 무엇인가 / 피올라 현대선 11강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7회

Buddhastudy 2025. 2. 17. 19:07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반야심경이 굉장히 차원이 높은 경전이에요.

다른 경전보다 거의 불교의 꼭대기 수준에 있는 경전이에요.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와요.

 

, 소승에서는 12연기가 엄청난 그 공부, 평생 공부해야 되는 법이에요.

12연기

12연기의 첫 번째가 뭐로 시작하죠?

 

무명으로 시작해요.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내가 [무명], 어두워서 밝지 못해서, 진리를 보지 못해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 충동이나 행동이 나도 모르게 일어난다

[] 그게 의식 활동이라고 하는 거다.

그런데 이 의식 활동을 정신없이 따라가는데

그렇게 되면 [명색]이 나타난다.

이름과 모습이 분별된다는 거야.

그러면 그 명색이 나타나면

그것이 나의 [육입] 안이비설신의 속에 그것이 어떤 형태로 들어온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걸 받아들인다.

그러고 거기다 대고 좋으니 나쁘니 분별하고

그래서 [] 현상이 일어나요. 좋다 나쁘다.

좋으면 어떻게 돼?

그걸 좋아하게 되죠.

그래서 []가 일어나요 집착을 하니까

그래서 []하게 돼

이렇게 12연기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순식간에

길 가다가 예쁜 여자나 멋있는 남자가 지나가면

자기도 모르게 눈길이 한 번 가는 속에

벌써 12가지 단계가 작동한 거야.

 

이렇게 무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여러분이 깨어 있게 되면

모든 게 다 모든 상이 다 이거라는 이것을

자기가 여실하게 보기 때문에

12연기가 자기 안에서 일어나질 않아요.

일어나도 자기가 중간에서 끊어.

아무래도 고수가 될수록 아예 앞에서 끊어지고

약간 하수이면 뒤에서 끊어지겠지만.

 

그게 소승 공부인데

이 대승에서는 무명, 그런 것도 없다 이래 버리는 거야.

그럼 소승 공부하는 사람은 어떻게 돼?

뭐야 이거 뭐야?” 이렇게 될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없다고 했을까?

남은 그렇게 평생 걸고 열심히 몇십 년씩 공부하는 걸

무명부터가 없다고 왜 그랬을까?

 

또 몰라?

대체 뭘 하는 거예요. 아는 게 뭐야?

그것도 분별이라서요.

 

...

 

무명이라는 것도 생각 아니야, 생각 분별이죠.

그러니까 이미 완전한데 이미 진리인데

자기가 야 공부라는 이런 12연기를 우리가 거꾸로 밟아서

마지막에 이 무명을 타파해야만 부처가 되는 거야라고 하는 법을 만들어 놓으니까

그다음부터 그 공부를 해야 돼? 안 해야 돼?

해야 되죠.

 

그러니까 평생 그 짓 하고 있는 거야.

한 생각에 속아서

그런데 그 생각을 딱 내려놓으면 이미 깨달음의 자리네.

 

그거 왜 그걸 굳이 그렇게 빙빙 돌아가?

그 말이에요. 대승은

야 그거 그렇게 몇십 년 닦아서 결국 발견한 거나

지금 그 자체가 환상이라는 걸 본 거나

뭐가 달라?

바로 그게 그거네.”

그게 대승과 소승의 차이예요. 알겠죠?

 

그러니까 무무명(無無明)해서 무명이 없다라는 말의 진의가 뭔지 아시겠죠.

근데 그다음 말이 또 이게 또 더 웃겨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이야.

그렇지만 무명이 다 한 것도 또 없다.

무명이 또 있다는 거야.

이거 무슨 말장난이야,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나도 이거 참 여러분한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

 

, 왜 그러냐면 그런 무명이 다 했다.

이 무명이라는 것 자체가 이름이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 깨어나도

생각을 안 하고 살아요? 생각을 하고 살아요?

하고 살죠.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서 무슨 분별을 할 때는

그게 이 완전히 깨달은 사람한테는 그게 무명이 아니고

그조차도 이 반야지만

이게 공부 중에 있는 사람이거나 아직 중생인 사람한테는

무명이 있어요?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모르니까 깨어나질 못했으니까

그걸 무명이라고 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깨어나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아요? 깨달은 사람이 더 많아요?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죠.

그러니 이 무명은 다 할 수도 없다, 계속 있는 거다, 이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본질은 없지만

그런 현상적으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한 발 더 나가서

그래서 노사라는 것도 없는데

그게 또 다 아는 것도 없다

이런 말까지 하는 거예요.

 

자 노사는 뭡니까?

늙어서 죽는 거야. 그렇죠

여러분 머리가 저 나이 70 80대면

다 머리가 허예지고

조금 있으면 저 관속에 들어가고

화장해서 다 태워서

이 세상에 그 존재는 싹 사라지고

그 존재에 대한 기억만 자식들이 하고 있는데

그런 노사가 없다는 거야.

왜 없을까?

 

이 자리에서 노사가 없잖아.

내가 아까 말했잖아요.

이 자리가 언제 늙었어? 커졌어? 뭐 변했어?

 

여러분 어려서 갓난아기 때부터 아주 어린 애 때부터 지금까지

이 성품이 변했어요?

누가 치면 다 들리잖아.

밥 먹는데 맛을 몰랐어?

다 맛을 알았잖아요.

그 자리는 항상 그대로 있었잖아.

밖에 버스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안 들렸어요?

가끔 안 들리기도 했어요?

항상 들리잖아.

버스 지나가면 들려요.

 

그게 변했냐고, 안 변했죠.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는 무노사(無老死)인 거야.

그 자리는.

 

근데 또 그다음에 뭐라고 그랬냐 하면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그런데 노사가 다 해서 없어지는 것도 또 없다.

이 말은 뭐냐?

깨어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늙고 죽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늙고 죽는 게 또 있는 거야.

 

자 그러면 여태까지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이 말이 가리키는 건 뭘까?

 

네가 분별하면 너는 무명 속에 있고

노사 속에서 죽고 윤회하지만

네가 깨어나 있으면

너는 그런 변화가 하나도 없는

영생하는 영원한 진리의 차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 말이에요.

 

자 부처님의 몸은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러분이 보셔서 아시겠지만

분명히 노사가 있었잖아.

근데 부처님의 법신은 노사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러면 여러분이 자기 존재의 중심을 몸에다 두면

여러분은 노사하고 윤회할 거야.

여러분이 자기 존재의 중심을 법신에 두면 어떻게 돼?

무무명 그다음에 무노사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런 이게 중도야.

네가 마음대로 골라서 살아보세요.”이 말이에요.

중생의 삶을 살려면 그렇게 살고

부처의 삶을 살려면 그렇게 살고

너 하기 달렸다, 이 말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은

그래서 무명이 있어요? 없어요?

있는 동시에 없고

노사가 있어요? 없어요?

없는 동시에 있는 거예요.

이걸 중도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노사나 무명만 그러겠어요?

아니면 세상의 모든 게 다 그러겠어요?

여러분들이 이거를 있다고 하면 있게 되고

없다고 하면 얻게 되고

여러분이 이건 큰 문제라고 하면 큰 문제가 되고

별거 아니다 하면 별거 아니게 되는 거예요.

 

옛날에 여러분이 어렸을 때는

눈깔사탕 하나 가지고

언니 동생하고 싸우고 피 터지게 울고불고 했다고.

근데 지금 그래요?

지금은 그 문제가 더 이상 그건 문제가 아니야.

지금 또 여러분이 울고불고 하는 게

여러분이 이 몸을 벗고 저 중음신에 가서

자기 돌아온 인생을 다 돌아보면

모르지, 전 전생까지 다 보일지 모르지.

내가 전 전생에도 그러더니 전생에도 또

, 이거 도대체 이거 언제 이걸 벗어나나

아마 그렇게 후회하실 거야.

이게 무슨 말일까?

 

그만큼 깨어 있지 못하면

그만한 고통을 받는 삶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라는 거예요.

근데 이게 다 네가 선택한 거다 이 말이에요.

네가 붙들고 있었으니까

그런 고호가 너한테서 떠나질 않는 거지.

 

그 실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네 마음이 그거를 그렇게 보면 그런 현실이 나타나니까

네 마음이 실상이라는 거예요.

 

노사가 있다없다가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이

있다없다 분별하는 그 마음이

노사를 만들고

생사를 만들고

고통을 만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