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이제 거의 다 갑니다.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아니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설법이 불교의 사성제와 고집멸도예요.
잘 아시잖아.
고통이 있다. 여기 고통이 있다.
왜 있냐?
뭔가에 집착하기 때문에 있다.
그 집착이 공한 것을 봐서 놔버리면 없애면 도가 이루어진다.
이게 고집멸도야.
간단히 말해서.
근데 이게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
그것도 우리 몽 선생 말대로 분별이기 때문이야.
자기 생각이지 뭐.
고집멸도 생각 아니에요?
여러분이 생각 안 할 때 고집멸도가 따로 있던가?
짜잔~! 하고 나타나서 아무 생각 없는데
“나 고집멸도야” 하고
고집멸도가 여러분한테 자기를 주장하던가?
아니면 여러분이 분별할 때만 있던가?
여러분이 분별할 때만 집착이 생기잖아.
그래서 고집멸도도 없다.
이미 열반이라는 얘기예요.
원래 없는 거 갖고 왜 고집멸도를 하고 앉아 있느냐 이 말이야.
그러니까 이미 열반이고 이미 깨달아 있다는 이 말이여.
이미 이 자리다.
무지 역무득(無智 亦無得) 이미 이 자리니까
무지
여기 무지가 앞에 지자하고 다릅니다.
한자를 잘 보면
요 알 ‘지(智)’자로 돼 있어요.
앞에 지자는 이 지(知)자요.
이거하고 이거하고 어떻게 다른지 알아요.
목표는 그냥 다 알지(知)라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거(知)는 그냥 앎, 그 자체야, 앎.
근데 이거(智)는 알아 갖고 뭐라고 했어요?
주둥이가 있잖아 밑에, 왈(曰)자
그러니까 이거는 생각이 되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떠들려면 생각이 먼저 있어야 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거는 분별이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똑같은 지자가 아니에요.
저 지(智)자는 생각 지식인 ‘지(智)’자고
이거는 지혜 할 때 ‘지(知)’자도 될 수 있는 거예요.
그 한자가 굉장히 뜻이 깊어요.
거기에 왜 주둥이에 ‘왈(曰)’자를 붙여놨겠어
“니가 뭐라고 머릿속에서 떠들든, 네 입으로 떠들든
전부 다 그건 분별 망상”이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무지(無智), 즉 생각은 무지
생각이라는 것. 분별이라는 건 원래 없는 것인데
네가 만들어서 고집멸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 도를 또 공부한다고 이렇게 설쳐대니
진정한 진리의 입장에서는
역무득(亦無得), 얻을 게 하나도 없는데 이미 그건데
뭘 또 얻겠다고 이렇게 난리 법석을 치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은 얻을 것도 없고
이미 그건데 왜 여기 와서 이렇게 또 헛소리를 또 듣고 있을까?
여기 누가 한마디 좀 하셔야지
왜 그랬어요?
알고 보니 그렇지 모를 때는 모르잖아요.
모를 때는 모르잖아.
“알고 보니까 이제 올 필요가 없군요.”
그러면 여러분은 또 생각이 떨어지는 거야.
그건 생각이잖아.
그거는 이 ‘지(知)’자가 아니고 이 ‘지(智)’자인 거야.
어쩌면 좋아 이놈의 분별.
여하튼 그래서 반야심경은
이무소득고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다
(以無所得故 菩提薩埵依 般若波羅蜜多故)로 가고 있어요.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야 진리의 입장에 깨어나 보면 네가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본래 그거다. 뭐 새롭게 얻은 게 없다
순 분별만 하다가 분별 속에서 깨어난 것뿐이다.”
보리살타의(菩提薩埵依)
그러니까 모든 진리를 찾는 또는 진리를 찾은 사람들은
의_ 의지한다.
뭐를? 반야바라밀다
이게 반야바라밀다에요.
여러분이 이미 이것 자체라는
이것이 뭐야?
여러분의 생명 그 자체, 참의식
이런 걸 말을 아무리 해봐야
여러분이 내가 생명이라고 얘기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맛을 봤어?
“아, 생명이구나”
그게 생명이야?
아니죠?
그러니까 그런 생각에서 좀 벗어나야 되는 거야.
그래서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그 생각에 빠져서
“그럼 그냥 이대로 그대로 살면 되네” 하면
그것은 분별 망상으로 다시 떨어지는 거예요.
진짜 이렇게 말하는 이 법이, 이 반야심경이
도대체 뭘 가르치는지
그 자리를 정말 체험해 봐야지.
우리는 그동안 생명이라든가, 열반이라든가, 이런 거에 대해서
너무 오해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은 생명이 죽으면 끝나는 걸로 알고 있잖아.
근데 그게 오해라니까, 전도몽상이라니까.
왜냐하면 생명이라는 걸 육신에 국한된 걸로 보지 말아요.
자 봐
여러분의 생명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자기가 생각하는 무슨 뭐 생명이 뭐 어떤 게 있어 다 한 가지지.
...
그러면 노량진 수산시장에 갔는데
조기가 한 마리가 이렇게 떡 죽어 있어.
그럼 이거 생명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있어? 죽었는데? 어떻게 있어요?
...
좋아요.
아 뭐 그런 지적은 좋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살았다 죽었다라는 게 다 우리 분별이거든.
자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의 시작은 무시무종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잘 봐요.
여러분의 몸의 최초의 시작은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의 결합이야.
그러면 난자와 정자가 만나기 전엔
여러분은 생명이 없었나? 아무것도 아니었나?
왜냐하면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건
촛불과 촛불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과 같고
정자의 생명과 난자의 생명은 따로 있었어요.
그래서 정자가 어쨌든 난자를 찾아와서
좀 뭐 문 좀 두들기고 어쩌고 해서 둘이 합치한 거 아니야.
그러면 정자한테 생명 없었어?
있었죠.
아직 만나기 전에도 각자 생명이 있었잖아.
그럼 그 생명은 내 생명이 아니야? 어디까지가 난데?
그 생명이 난자 앞에서 생명 번식을 할 때까지
이 생명이 하나도 변한 적이 있어? 아니면 계속 연결되는 거야?
여러분 애벌레가 번데기가 됐어.
그리고 나비가 됐어.
이게 생명이 변한 거야?
아니면 형체는 변했지만 생명은 그대로인 거야?
그대로죠.
아버지의 생명이 내 생명이야.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어.
그 생명이 그냥 모양만 바꾸는 거야.
정자로 바뀌었다가 이런 몸으로 태아가 막 됐다가
처음엔 사람 얼굴도 아니잖아.
모양도 무슨 물고기같이 생겼잖아.
그랬다가 막 번식해서 이젠 또 이런 형상이 됐어.
또 이게 머물러.
뭐 머리도 허얘지고 쭈구리가 되고 뭐 이러다가 또 죽어.
그러면 아무것도 없을까?
아니면 나비 같은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 H₂O 같은 게 있을까?
반야심경은 그게 있다는 거야.
애시당초 아버지 할아버지 그 조상의 조상까지 전부 다 한 생명이라는 거야.
왜?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으니까.
몰랐지. 그것까지는 생각 안 해봤죠?
이 몸뚱아리 기준으로만 생각하잖아.
그러니까 그게 전도몽상이라는 거지.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을 해요.
“그렇지만 말이죠.
태초의 지구의 초창기 때는 무슨 아미노산이 번갯불을 맞아서
최초의 생명체가 되기 전에는 없었다는데요?”
이제 그런 질문 또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가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에 오염됐는지 알 수 있죠.
그러면 번갯불을 맞아서
여기 성냥이 있다고 쳐봐.
그러면 성냥으로 뭘 그어서
그러면 성냥이 불은 아니잖아.
그렇지만 그으면 불이 일어나잖아.
그러면 그것 때문에 불이 일어난 거야?
불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온 거야?
아니면 불의 성품은 원래 우주 안에 있는데
그런 인연 화합이 되면 불이 나오는 거야?
저절로
불의 성분은 항상 있어요.
전기가 이 우주에 항상 있지.
전기는 내가 스위치 켤 때 우주 최초로 만들어진 거야?
아니잖아
그냥 있어요. 우주에 기본 요소로.
생명도 마찬가지야.
그냥 있어요.
우리는 과학자들은 아직 그게 몰라 무슨 원리인지
뭐 외래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무슨 뭐 그렇게 번개 맞아갖고 아미노산이 태초에 무슨 DNA를 만들어서 어쩌고
이런 학설도 있고
다 학설이지.
근데 깨달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있는 거야, 무시무종이야.
우주 자체가 생명이야.
여러분, 우주가 생명이 아니고 죽어 있으면
어떻게 빅뱅을 일으키고 이렇게 계속 모든 게 살아 움직이고 있어?
생명을 왜 자꾸 유물론적으로만 생각해?
왜 단백질하고만 연결시켜?
그거 자체가 과학에 세뇌된 거예요.
과학이 자꾸 변해요? 안 변해요?
앞으로 천 년 만 년 뒤에는
“과거 과학들 다 유치하고 시시했다. 진짜 생명은 이거다.”
이럴 줄 누가 알아?
그거 자기 생각에서 좀 깨놔야 돼.
실상을 그냥 봐야 돼.
우주 전체가 그냥 한 덩어리 생명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무시무종의 존재인 거야.
그거를 체험하는 거야.
그걸 머리로 이해해서 헤아리는 게 아니고
그거를 딱 만나는 것이 무생법인이에요.
딱 깨어나는 것이.
그러니까 여러분이 일단 이것만 알아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잖아.
고심무가애(故心無罣碍) 무가애고(無罣礙故) 무유공포(無有恐怖)가 빠졌군.
벌써 이런 것만 알아도 마음에 일체 장애가 없고
무가애, 애라는 건 장애 애(罣)자예요.
마음의 일체 장애가 되거나 걸릴 것이 없고
그래서 장애되고 걸릴 것이 없으면 무유공포(無有恐怖)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너는 항상 여여한 우주의 진리 그 자체인 거야. 이미.
뭘 두려워하느냐?
전쟁이 나서 죽어도 몸은 변했지만 법신은 그대로고
굶어 죽어도 법신은 그대로
강도한테 당해 죽어도 도대체 죽지 않는 놈으로 있고
어떡할 건데?
그게 확실하면 무가애고(無罣礙故) 무유공포(無有恐怖)가 되는데
그래서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부디 이런 여태까지 네가 알고 있었던 전도몽상을 멀리하면
구경열반에 도달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삼세제불의(三世諸佛依)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모든 부처님들은 이 법에 의지해서
고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그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 말이에요.
그러므로 고지반야바라밀다(故知般若波羅蜜多)
그러므로 이 반야심경은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가장 큰 주문이며
가장 위가 없는 주문이며
변하지 않는 주문이다.
능제일체고 진실불허(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오죽하면 나는 반야심경에서
이 말이 제일 감동이 됐어요.
능제일체고 진실불허(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얼마나 안 믿으면 제발 믿어줘.
진실 불허.
아 난 정말이야.
난 여기서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나왔다니까
이 글을 쓴 최초의 그 선각자는
얼마나 절실하게 이 말을 썼을까?
“제발 좀 믿어다오.
이 주문을 너가 정말 철저하게 요달한다면
능제일체고_ 모든 고통이 벗어지고
그리고 이 말은 거짓이 아니다. 제발 믿어다오”
여러분 누가 여러분한테 이런 말을 해?
부모님들 이런 말을 해줬어요.
“나 좀 믿어줘. 정말이야 이건”
이런 말을 해준 존재가 있냐고
이게 부처님의 대자대비심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거든
제발 좀 믿어달라고
안 믿지?
“글쎄 그럴까요? 좀 생각해 보고요.”
여러분의 참모습은
이 자리인데
생각을 자기로 삼고 있기 때문에
깨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오온, 느낌이나 생각이나 이런 걸 자기로 삼고 있기 때문에
몸이 내가 되고 마음이 내가 되는 거예요. 식스존이 내가 되는 거예요.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그래서 반야 바라밀다를 내가 여태까지 설법을 한다.
그리고 즉설주왈,
지금 여기서 다시 주문을 읊는다.
그래놓고 나오는 말이 여러분이 뜻도 모르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이런 말이 나와.
이게 무슨 뜻일까?
자 여러분들은 뜻을 너무 좋아해서 이것도 뜻을 찾고 있어요.
그런데 국내 기존 번역을 보면
인터넷에 있는 반야심경의 번역을 보면
“가자가자 건너가자, 모두 다 건너가 깨달음을 이루자”
이렇게 번역을 대부분이 해요.
근데 이렇게 영어로 된 번역을 보니까 훨씬 낫더라고
그거는 영어로 건을 써요. gone 갔다 갔다
이미 다 건너가 있다.
모두 이미 건너와 있음에 깨달아라
이렇게 번역이 돼 있더라고
훨씬 낫죠?
근데 내 번역은 또 달라. 이것도 분별이라는 거야.
뭘 가긴 누가 가?
누가 있어, 이거 분별 아니야? 누가 갔데?
이 자리 뿐인데, 무슨 누가 오고 가고가 있어.
그래서 나는 차라리 이렇게 번역을 할 거예요.
있다 있다. 모두 이것뿐이다. 모두 다 이것뿐이다.
참으로 그렇구나.
그게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의 암시하는 뜻인데
여러분은 그 뜻 좋아하시면 안 돼요.
왜? 생각이 속거든
그냥 여러분이 진짜 빨리 깨어나려면
제발 뜻 좀 찾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체험만 하며 살아봐요.
뭐가 이렇게 나를...
여러분이 사는 게 아니야.
생명이 여러분을 살고 있고.
무언가가 여러분을 체험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자기를 처음 하는 것 같아요?
그건 자기 생각이고.
뭔가가 “이게 나구나, 내가 이걸 실수했구나
내가 이건 참 잘했구나, 이게 참 어렵구나”라는 걸 누가 체험하고 있어?
“나는 저 사람, 교장이 앞에서 말하는 걸 반쯤은 알아듣겠다.
다 알겠다. 도대체 잘 모르겠다.”
이거 다 체험 아니에요?
이 체험을 누가 하고 있냐고.
자기가 하고 있어?
그건 생각이지.
뭔가가 하고 있잖아.
그게 뭔지 좀 살펴봐요.
그래서 반야심경을 제가 볼 때는
모든 경전 중에 가장 수준 높은 경전 중에 하나고
또 정말 절실하게
이 260자의 짧은 글자 안에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깨어나고
그리고 깨달음에 도달하는지를
이렇게 절실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준 경전이 거의 없어요.
능제일체고 진실불허(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이렇게 자비심으로 말해준 경전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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