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불교와 양자역학

Buddhastudy 2023. 8. 8. 19:38

 

 

불교와 양자역학은

모든 존재의 실상을

실체론이 아닌 관계론으로 보는 점에서

일정 부분 유사성이 존재한다.

 

불교에서의 무아, , 연기법과

양자역학의 상보성 이론(입자와 파동의 중첩성)은 확실히 유사하다.

 

이 두 사상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음미하는 것은

마음공부에 도움이 된다.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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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불교와 양자철학>이라고 하는 책을 읽고

제가 평소에 가졌던 생각하고 같이 해서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에 이런 책이 나왔죠.

이중표 교수님이 아마 감수를 하신 것 같은데

<불교와 양자역학>

 

이거는 보면은 물리학자가 이분이 달라이 라마하고 좀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됐건 현대 물리학과 불교적 관점

특히 중간사상 관점을

이쪽 저쪽을 다 아니까 한번 얘기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양자역학이나 현대 물리학으로 불교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둘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한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고요.

불교와 양자역학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어떻게 보면은 그 유사성이 좀 있어서 상당히 핫이슈입니다.

물론 과학과 종교의 차이가 있고

그다음에 유사성만큼이나 차이점도 크기 때문에

이게 이거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난센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할 거리들이 좀 있어서 여러분들하고 나누고자 합니다.

 

 

불교라고 했을 때 우리는 가장 큰 특징을

무아 혹은 공

이런 키워드를 떠올릴 수가 있는데

이 뜻은 뭐겠습니까?

 

고유하고 독립적인 실체는 없다라는 게 핵심이죠.

고유하고 독립적인 실체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해서 함께 모여서 일어나는 연기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를 독립적 실체로 보기가 어렵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제법은 무아다이렇게 된 것이죠.

모든 현상에 독립적이고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존재의 실상은 실체론이라기보다는 관계론에 있다. 그죠?

그래서 개체가 아니라 관계가 실상에 더 가깝다

이렇게 보는 것이고

 

그다음에 공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실제가 따로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그 실제는 텅 비어 있다 하는 게 공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무아론을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공을 이야기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모든 것은 연기한다라고 하는 연기법이 관찰되고 있는 것이죠.

이게 불교를 아주 아주 극단적으로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고요.

 

 

그다음에 양자역학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양자역학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고전 물리학, 뉴턴 미케닉스라고 하는 고전물리학이 있고

그다음에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있고

그다음에 20세기 초에 양자역학이라고 하는 물리학의 이론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런 서양의 물리학의 계보를 잇는 하나의 과학 이론이죠.

 

요즘에는 로켓트로 대기권을 탈출하는 것도

그다음에 스마트폰으로 이렇게 편리한 IT생활을 누리는 것도

사실은 다 양자역학을 적용한 결과입니다.

양자역학이 뭐냐?’라고 했을 때 조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전물리학에서는 기본이 입자론이죠. 입자, 원자죠 원자.

아주 독립적이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의 성질을 규명하고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고

그래서 원자가 실제고

그 원자들 간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좀 부차적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게 20세기의l 최종적인 고전물리학의 결론은

개인이 가장 중요하다

사회는 부차적이다

관계도 부차적이다

개인의 독립성과 존재가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된 거죠.

 

그런데 그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거쳐서 양자역학으로 오면은

세계를 보는 관점이 좀 바뀝니다.

좀 바뀌는 게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양자역학의 입장은 정반대가 되죠.

 

뭐냐하면 실체라고 주장하는 혹은 추정되었던 입자

물리학에서는 원자라고 하는데

입자보다 훨씬 더 관계가 중요하다

그리고 더 참된 존재 요소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독립적이고 고유한 실체로서의 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는 관계다.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스마트폰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그것이 토대가 되는 양자역학적인 세계관

혹은 그것이 암시하는, 제안하는 삶의 양식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것이죠, 아직까지는.

왜냐하면 이것은 존재의 참된 모습은

원자 개체가 아니라 관계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지금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 것이죠.

 

더 극단적으로 개체로서 살아남고

개체로서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정말 애를 많이 쓰죠,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 세계관은

스마트폰에 내 인생을 거의 함께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이야기하는 인생관 혹은 세계관은

양자역학적이라는 것이고

그것의 핵심은 개체가 아니고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러니가 좀 있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유명한 양자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붐이라는 사람은

결국은 인간 사이가 왜 이렇게 힘드냐 왜 싸우냐?’

이 차별과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독립적인 입자 개념에 기초한 우주관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입자와 저 입자의 위치

위냐 아래냐, 앞이냐 뒤냐 이런 서열

이런 것들은 다 입자에 기초한 우주관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물리학자는

만약에 인류가 평화를 위한다고 하면

존재의 본질을 입자에서 찾지 않고

관계에서 찾는 것을 이해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와 양자역학이라고 하는

두 가지를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유는

뭐랄까, 우리 존재의 진짜 상황이 어떤 거냐라고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의미가 있다,

이것이죠.

 

그런데 우연이도 불교나 양자역학 모두

불교는 옛날의 종교고, 옛날에 생긴 종교고

양자역학은 오늘날 가장 핫한 최신 과학 이론이지만

둘 다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실체가 아니라 관계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일치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하겠다.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불교는 아까 이야기한 무아, , 연기 이렇게 어느 정도는 익숙한데

양자역학은 좀 덜 익숙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양자역학의 여러 가지 원리들이 있습니다.

상보성의 원리, 비국소성의 원리, 양자 도약, 인과율의 문제 등등 여러 가지 원리가 있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양자적, 재미있는 게 얘기를 들어보니까

수학적으로도 증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스마트폰이나 이런 데도 적용이 되고 하니까

증명도 되고 적용이 되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인간의 이해력으로 이해가 잘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학적으로 증명되고 현실에도 적용되어서

가장 정확하다고 입증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이게 뭐지? 이게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 것이죠.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양자역학의 이론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부정적이었죠.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런 어떤 우연성, 확률성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신은 주사의 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닐스 보어가 또 맞받아쳤죠.

신한테 이래라 저래라라고 말하지 마라.” 이렇게 ㅎ

신 마음이라는 것이죠.

 

어쨌든 최고의 과학자조차도

증명과 적용의 문제하고는 다르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정말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늘은 양자역학의 원리 중에서

딱 한 개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중성 혹은 중첩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상보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물리량을 가진 존재

그걸 양자라고 하죠.

양이잖아요.

양을 갖고 있는 존재

즉 빛도 되고

어쨌든 이런 양자라고 하는 것은

존재의 양식이 두 개가 겹쳐져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는 입자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을 점유하는 입자이기도 하고

-또 하나는 웨이브 파동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라고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에서는 용인되지 않는 명제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동시에 A이면서 A가 아닐 수는 없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것이 모든 과학의 기초였는데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그건 확률이다.

그리고 뒤에 더 심각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자연인이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측정된다.

이렇게 나오니까

이게 정말 천지가 뒤집히는 소리이고

마음에서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입자와 파동성이라고 하는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는데

더 중요한 것은

관찰할 때 입자로 볼 것인가, 파동으로 볼 것인가를

선택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입자로 보면 입자라고 하는 증거를 보여주고

파동이라고 생각해서 파동으로 측정하면 파동이라고 하는 증거를 보여준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소박한 실제론이나 반영론은 철학적으로 이런 겁니다.

있으니까 보이지 이런 것이죠.

그래서 있는 대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잘 못 보는 것은

눈이 침침하거나 귀가 좀 어둡거나 이래서 그런 것이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 오면 완전히 뒤집어져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보는 데에 따라서 존재를 드러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물리학에서는

관찰자 효과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이 관찰자 효과가 절대적이라는 것이죠.

뭘로 볼 거냐라고 하면 그것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관찰을 좀 할 때 잡음 같은 게 끼어들거나

관찰할 때 뭔가 오염된 게 아닌가 생각해서

관찰에서 방해, 잡음 이런 문제였는가 생각했는데

수학적으로 보니까 그런 거하고 다른 개념이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소박한 실제론

세상에는 물체가 있고 그 물체를 우리는 인식한다라고 하는

이 문장이 완전히 깨어지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걸 우리가 마음이 수용하기는 어려운 것이죠.

[있으니까 보이지]에서

[그렇게 보니까 그게 있지] 이렇게 되는 건데

그걸 우리가 경험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실제로 숨은변수이론이라 그래 갖고

측정할 때 하여튼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있을 거야

아주 조심스럽게 이렇게 해도

그런 결과는 변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숨은변수이론 이런 것도 해봤는데 안 됐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지만 사실이다.

이런 정도로

정말 찜찜하게 과학자들은.

 

왜냐?

수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현실에 적용하면 그게 맞으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양자역학적인 존재의 관점은 뭐냐 하면

보는 대로 그 속성을 내어놓더라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일체유심조하고 너무나 유사한 얘기잖아요.

이건 직관적으로 그 얘기인데?”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즉 고유하고 독립적인 실체

불교에서는 아트만이라고 하는데

고유하고 독립적인 실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이 결론이 불교와 만나는 지점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나 공, 연기의 핵심적인 속성이

바로 고유하고 독립적인 실체는 없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최신의 과학 이론인 양자역학과

그다음에 아주 오래된 불교적 사유를

어찌 됐건 이 시대에 같이 만났으니까

이 두 가지를 비교도 하고, 분석도 해보고, 또 음미도 해보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개체론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잘 돼야 되고

내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내가 모든 위험을 예측하고 통제하고

이렇게 하고 끝이 없으니까

이 게임에서는 이기기가 어렵겠다라고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빠져나가는 이 생명을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성주괴공하는 무상하고 남아 있지 않죠, 끝내는.

 

이런 것들을 이길 수 없으니까

아무래도 불교적 사유를 하게 되는데

거기에 더해서 양자역학적인 우주관은

실체론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관계론이다.

관계 속에서만 규명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유사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을

실체론에서 관계론으로 뭔가 좀 바꿔본다라고 하는 측면에서

불교와 양자역학은 사실은 굉장히 강력한 유사점이 있고

어쨌든 21세기에 이 두 종교와 과학이 만나는 접점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작은 의미가 아니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할 점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당연하게도 불교는 불교고 양자역학은 양자역학이죠.

불교는 종교고 양자역학은 과학입니다.

 

종교와 과학이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더더군다나 오늘날은 과학이 거의 종교인 시대거든요.

모든 것을 과학이 채점해 주고

모든 것을 과학이 도장을 찍어주는데, 인가를 받아야 되는데

불교가 양자역학으로 인해서 증명되었다, 인가를 받았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표현하는 것도 어마어마한 잘못이다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얘기는 13세기 송나라 때도

간화선을 창시한 대혜종고라는 스님도 똑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제자 중에

이게 불교에서 하는 얘기하고 유교에서 유교 경전에서 하는 얘기 들어보니까

다 좋은 말이고, 다 비슷비슷하고, 이게 이거 아니가

이런 논지를 펼쳤을 때

대혜종고가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이것을 저것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교도 모를 뿐만 아니라 유교조차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똑같은 말을

오늘날 불교와 양자역학을 유사하게 바라보는 관점의 경계할 점으로

제시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오늘날 불교와 양자역학은

존재론에 있어서

실체론보다는 관계론 쪽에 굉장히 깊은 포커스를 두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의미할 만한 생각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또 다음의 시간이 되면은

양자역학과 불교의 또 다른 측면도 있거든요

긴장을 일으키는 측면도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또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