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괴로움에 대처하는 최종병기 무아

Buddhastudy 2023. 8. 7. 19:51

 

 

삶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서 하나씩 빼앗아 간다.

젊음과 건강과 마침내는 생명이다.

사람들은 나이 들면서 무너져 간다고 생각한다.

 

사실 삶의 중요한 것들은 나의 예측과 통제의 범위 밖에서 일어난다.

탄생과 주요 인생 역정과 죽음이 그렇다.

이것은 삶에 굳이 어떤 형이상학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히려 불 건강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브라만 세계관과 대립했던 붓다의 입장이다.

 

한편 삶이 우연성을 기본 한다는 것은 붓다의 표현으로는 연기법을 의미한다.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모든 현상 - , 우주, 사건들은 실재가 아니다.

여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연기법의 논리적 귀결은 무상과 무아다.

 

중요한 것은 이 무아의 원리가 현실의 괴로움에 적용되어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적용해봤는데 잘 안되고 여전히 불안하다면 머리로만 이해한 것이다.

몸에 스며들어 호오와 집착이 희미해질 때까지 깊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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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목을 괴로움에 대처하는 최종병기 무아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아라고 하는 게 텅 빈 상태이기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이걸 빼고는 모든 얘기가 되지 않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무아죠.

 

내가 없다이런 식으로 흔히 해석이 되는데

그러나 이것은 조금 잘못된 해석 같고

실제가 없다, 본질적으로 비어 있다.

이런 뜻이 더 가까운 의미가 되겠습니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이유는

즐거운 일이라기보다는 괴로움 때문이죠.

즐거우면 즐기면 되고요.

괴롭다라고 하는 것은 젊었을 때도 괴롭고 늙었을 때도 괴롭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괴롭다라고 하는 것을 조금 실감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일단 몸이 괴롭잖아요. 예전 같지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이가 들면 이런 걸 느끼게 됩니다.

삶이 어느 순간부터 우리한테 빼앗아 가는 게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일단 체력이 예전 같지 않고

그다음에 몸의 기능들이 하나씩 쇠퇴해 가고

이렇게 다 빼앗아 가는 거잖아요.

그걸 불교적 용어로는 노병사, 늙어가고 병들고 마침내 죽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그다음에 또 나이 들면서

보고 싶지 않은 사건 사고들을 많이 직접 간접으로 겪죠.

 

그렇게 해서 나이 들면

그렇게 긍정적이거나 밝아지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맨날 몸이 아프고 통증에 시달리면 사람이 좀 더 부정적으로 될 수도 있죠.

어찌 됐건 괴로워진다라고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단순히 몸이 아프거나

현실적으로 힘겨운 생활을 한다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마음이 산란하고 불안하고 편안할 수가 없다.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은 무엇인가?

마음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할 수 있는가? 라는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삶이라고 하는 것에서 가장 큰 핵심 단어 중에 하나는 우연이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우연성이 지배하는 삶이라는 것이죠.

 

태어나는 것부터 죽는 것까지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가 다양하고 또 하여튼 이런 인생 역정,

부딪히는 사건들, 만나는 사람들

이런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닌 것들이 많고

결정적인 것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우연 혹은 운명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다 우연 아니면 운명적으로 일어난다, 이거죠.

 

우연이라는 말을 강조했을 때는

정확한 인과관계를 알 수가 없거나

이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거나

그렇게 해서 특정할 수가 없다는 거죠.

 

아니면 어떤 복잡한 인간관계가 너무 복잡해서 복잡계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인과관계가 어디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우리로서는 우리의 인지 범위 밖에 존재하는 것이어서

이건 우연 같다, 랜덤한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고요.

 

그 같은 얘기를 다른 측면으로 풀어보면

내가 예측도 못하고 통제도 못 한다는 측면에서

이거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 아니냐 또는 운명 아니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거의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불러오는 결론이 뭐냐 하면은

이 우리 삶에는 우연이나 필연 혹은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하다고 하면

우리의 의지가 어떻든지 간에

어떤 특별한 어떤 형인 상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주는 이렇게 탄생했고

인간은 이런 이유로 태어나서

이런 미션을 수행해야 되고 이렇게 되면

잘못하면 불건강한 삶에 빠질 수가 있다, 이것이죠.

 

그래서 2500년 전에는 부처님이

그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브라만교에 대해서

이거는 조금 좀 위험하다, 좀 불건강한 측면이 있다 이렇게 비판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아트만, 영원한 실제라고 하는 것 대신에

무아, 안아트만을 주장한 거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치료를 한 것이죠.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는 병에 가깝다, 이렇게 본 거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형이상학적인 설명이나 이런 의미 부여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죠.

그래서 무의미라면 무의미인데 이것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막 살게 되지 않는다.

이게 핵심입니다.

 

두 번째는

우연이라고 하는 것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은

붓다는 그것을 연기법으로 설명하셨죠.

 

연기라고 하는 것은

한자 연기라고 하는 것은

모여서 함께 일어난다 라는 뜻아닙니까?

_ 연결해서, _ 일어난다

모여서 함께 일어난다, 모여서 함께 발생한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를 조금 더 풀면은

조건들이 모이면 생겨나는 것이고

조건들이 흩어지면은 소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성과 소멸을 조건들의 결합과 해체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을 굳이 부처님이 발견했다면 발견한 실상인데

이 연기법의 관점에서 봤을 때 논리적 귀결이 두 개가 나오는 겁니다.

 

첫 번째가 우리가 잘 아는 무상하다는 거죠.

그래서 이 무상이라고 하는 얘기는 사실은 조금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무상이라면 인생무상, 삶의 회의

이런 표현을 써서 대단히 부정적인 뉘앙스로 보지만

부처님이 이때 무상이라고 말했을 때는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서 생하고, 멸하기 때문에

영원하게 지속되는 것은 없다라고 하는 그냥 사실 판단을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무상이라는 얘기는 어떻게 보면

원래는 가치 중립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무상을 인정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온다면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가 무상이고요.

두 번째 연기법에서 논리적으로 귀결이 되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무아라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내가 없다거나 내가 미쳤다거나 정신줄을 놓는다거나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니죠.

 

이 무아라고 하는 것은 아까 아트만과 관련된 얘기인데

안아트만이라는 뜻이거든요.

이 아트만은 영원한 실제, 영혼 불멸의 영혼, 이런 정도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거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죠.

 

그러니까 이 조건부로 생성하고 소멸하는 모든 것에는

실체가, 영원한 실체라고 하는 아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하고, 싶은 필멸의,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이 가지는 욕망이다.

이렇게 조금 신랄하게 보면 그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연은

조건에 따라서 생성 소멸하는 것이고

조건에 따라서 생성 소멸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은 것은 실체가 아니다.

이렇게 아주 논리적으로 정연하게 풀어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조건부로 생멸하는 것에 예외가 있냐?

없다라는 것이죠.

나라고 생각되는 것도

내가 언제부터 나냐?

태어나서 한 살 되기 전까지 막 성원아, 성원아, 이렇게 자꾸 이름 불러주고

너가가 너다.

이렇게 자꾸 내가 난가 보다.

청소년기에 좀 방황 좀 하고

나이 들어서 자기 경력을 쌓아가면

이 전체가 나라고 하는 이미지 아닙니까?

하여튼 이런 식으로 해서

전부 조건들이 결합해서 인연이 닿아서 이루어진 스토리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거라든지

이 우주

그다음에 이 우주에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는 사건과 사람들

이 전체가 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면 실체가 아니고 공한 것에 대해서 너무 미련을 두지 말아라.

이게 핵심입니다.

집착하지 말아라.

즉 이것은 좋다 이것은 싫다.

좋은 것은 붙잡고 싫은 것은 밀어내고 내고

이럴 필요가 없는 거다. 그게 원래

 

누르스름한 것이 황금으로 보이지만

아니다. 이거는 그냥 흙이다.

누렇게 보인다고 해서 다 황금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래서 실상을 똑바로 보는 것

그것이 정견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히토류도 아닌데 흙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울 일은 없으니까

거기에 대한 욕망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삶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들에 대해서

이것은 좋은 것이고 이것은 나쁜 것이고라고

이렇게 구분 짓고

거기에 마음을 쓰는 것 전체가 헛된 일이다.

이런 얘기를 한 것이죠.

 

그게 얼마만큼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겁니다.

 

 

결론을 내자면

오케이, 이런 우연

그다음에 우연히 지배하는 이 세상에의 모습은 연기법이고

연기법의 모습은 무상하고 무아인데

그렇다면 이것이 현실적으로 우리가 어떤 괴로움에 부딪혔을 때

막아내는 방벽 역할을 할 수 있느냐?

최종 병기가 될 수 있느냐?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까 삶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것들이

젊음도 빼앗아 가고, 건강도 빼앗아 가고, 사랑도 빼앗아 가고, 명예도 빼앗아 가고

마침내 생명까지 다 빼앗아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늙고 병들고 고립되고 그다음에 가난해지고

이러다가 인생을 마치게 되는 좀 슬픈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굉장한 재벌이라 하더라도

혹은 천하의 대단한 스포츠 선수였다 하더라도

나이 들면은 필연적으로 가는 길입니다.

 

요즘은 무슨 검진울렁증 이런 게 있다고 합니다.

건강검진 받아놓고 무슨 병이 생기지 않을까?

그다음에 거기서 조금 더 심층적으로 검사해 봅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암이라든지, 심장질환이라든지, 당뇨, 고혈압 등등등해서

언제 불의의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라고 하는

두려움을 나이 들면

젊을 때는 사실 저도 그런 생각 안 했거든요.

나이 들면 검진 항목이 점차 늘어나면서

병원에서 도장을 찍어줘야 안심하는, 그 순간은.

이런 것들이 점점 커지게 되겠죠.

 

어찌 됐건 살면서 만나는 파괴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이 정말로 이렇게 흔들릴 때

이 무아라고 하는 것 무아라고 하는

연기법에서 발전된 무아라고 하는 붓다의 제안이

우리에게 정말로 최종병기가 될 수 있는가

그걸 적용해 보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어떤 사건 사고에 부딪혔을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이런 것을 주문처럼 외우는 사람도 있지만

무아이기 때문에

나도 상황도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떤 조건들이 만나서 생겨난 것이고

또 조건들이 바뀌면 또 달라지는 것이다 라고 해서

적어도 현상이 주는 고통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두 번째 화살, 고뇌는 없는

그게 되냐 하는 겁니다.

 

그렇게 적용을 해봤는데

그건 그거고, 안 되는데, 전혀 안 되는데

여전히 너무너무 불안하고 괴롭고

그렇다 라고 하면은

사실은 무아라고 하는 개념을 머리로만, 지적으로만 이해한 것이죠.

그것이 현실에서는 힘을 못 쓰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냐?

어떻게 하긴요.

그것이 온몸으로 스며들어서

점차점차 무아가 기본 베이스가 되고

무아가 기본 베이스가 되어서 아까 이야기한

이것은 좋은 일, 이것은 나쁜 일

나에게 발생한 그것들에 대한 구분이 점점점점 희미해져 갈 때

그 말은 집착 또한 엷어져 간다는 것이죠.

 

그러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를 너무 이렇게 들뜨게 하거나 너무 침체하고 가라앉게 하는

이런 식의 마음의 출렁거림은 잦아들게 된다.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붓다가 제시한 무아는

제가 보기에는 최종병기 같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좋은 병기라도

자기가 잘 연습해서 또는 실제로 적용해서

쓸 만한 무기로 다듬어가는 것은 나의 과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