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융과 불교의 세계 인식

Buddhastudy 2025. 5. 6. 19:33

 

 

  • 세계에 대한 의심: 융과 불교 모두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가 실제의 전부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00:40].
  • 투사 대 식: 융은 개인이 자신의 내면 세계를 외부 세계에 '투사'한다고 주장하며, 불교에서는 '식(識)' 즉, 편향된 의식이 세계를 구성한다고 봅니다 [00:00].
  • 세계관의 차이: 융은 세계가 개인의 내면의 투사라고 선언하며, 불교에서는 식이 무명과 행의 결과로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01:51], [02:58].
  • 해결책의 차이: 융과 불교는 인간 의식의 오염에 대한 문제의식은 같지만, 해결책은 다릅니다. 불교는 의식의 해체를 강조하는 반면, 융은 내면의 통합, 즉 개인화를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04:30].
  • 진정한 세계: 융과 불교 모두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며, 내면의 흐름을 알아차릴 때 진정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08:41].
  • 언어의 한계: 진정한 세계는 언어적 서사나 설명으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09:14].
  • 자유에 이르는 길: 불교는 편향된 의식에 대한 깊은 알아차림을 통해, 융은 자각하지 못한 내면을 자각함으로써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10:49].

 

 

융과 불교는

모두 세계를 인간이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융은

인간은 세계를 경험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내어 놓는 존재라고 선언했다.

불교에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 편향성(무명과 행에 의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식 오류와 감정의 휘둘림을 겪는다고 말한다.

 

둘은 비슷한 세계 인식을 하고 있으나

해결책은 사뭇 다르다.

불교는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오류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반면 융은 의식의 ego가 무의식의 self에게로 다가가는

내면 통합의 여행을 제안한다.

골짜기와 능선처럼 무위와 유위로 선명하게 대비된다.//

 

 

 

오늘은 융의 세계관과 불교적 인식론의 공명

일맥상통이라는 점을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융은 투사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프로젝션

그리고 불교에서는 식()을 강조했죠, 유식(唯識)

식은 의식하는,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편향성을 가진 의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편향성이 어디서 왔냐 하면은

무명--

행에서 편향성을 가진 의식이 식이 생겨났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융과 불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의심이 있습니다.

과연 세계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심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보는 세계가 진짜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인간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소박한 실재론, 혹은 반영론

있으니까 보이지이런 뜻이 되겠죠.

 

두 번째는 그게 아니라면

혹시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그려놓고 있는 세상을

실제 세상에다가 투사

벽에다가 영사기를 돌리듯이 투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티키타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융이나 불교는

후자에 가깝다

자기 내면의 투사에 더 가깝다.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융 같은 경우는

세계는 개인의 내면의 투사다라고 아주 선언을 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 속에 태어나서 세상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자기 내면에 있는 세상을 내놓으면서

이런 게 세상 아니야?”라고 내어놓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이렇게 역전시킨 것이죠.

 

그래서 외부 세계를 경험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무의식과 심리적 경향성을 투사해서

세계를 내놓는 존재다

이렇게 선언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한테 있어서 외부세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 내면의 그림자를 투영한 것이고

그 내면의 그림자도 원래부터 자기한테 있는 게 아니고

어떤 형성된 것, 주입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개인은 모두 다 사회화된 존재인데

사회보다 훨씬 더 깊고, 넓고, 광대하게 집단적 무의식까지 포함한

형성된 존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면 불교 쪽에서는 어떻게 보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라고 하는 것이 세계를 만든다.

유식, 이렇게 오직 의식만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잘 알다시피

무명이 행을 낳고

행에는 의도가 있는 것이고

이러면 이럴 거라는 예측이 있는 것이고

이러고 싶다라고 하는, ‘그렇게 되면 좋겠다라고 하는 욕망이 있는 것인데

이 행을 낳고

그 행의 결과로 기억이 축적되면서 식을 낳는다.

그래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이 식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오염되어서 편향을 가지게 돼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차이를 설명하는데

각자의 식의 종류와 품격에 따라서

같은 세상도 다르게 보인다.

그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유명한

일수사견(一水四見)의 얘기가 되겠습니다.

 

같은 강물을 보더라도

-인간은 그거를 물로 보는데

-물고기 입장에서는 그게 살아가는 집이죠.

-천상에서 볼 때는 아름다운 은하수, 보배로 보이는데

-아귀 입장에서 볼 때는 그건 피고름처럼 보인다.

이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인식에 따라서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게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서 있는 곳이 다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뭐 이런 표현하고도 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융이나 불교에서는

결국 추구하는 것이

자유, 번뇌의 해탈, 이런 것인데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데 문제의식은

인간의 내면이 투사된 세상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좀 오염되어 있다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은 같은데

해결책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불교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해체해야 된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모든 의식의 내용은 다 편향이 있기 때문에

타파해야 된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오염되고 편향된 의식을

우선 알아차려야 된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없앨 수도 없으니까요.

이거는 좋아 보여도

나는 이렇게 이렇게 조건화된, 형성된 물건이구나라고 하는

-자기의 식을, 의식의 편향됨을 알아차리는 게 1번이고

-두 번째는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자연스러운 해체, 절단이 일어난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되게 수동적인 것인데

억누르거나 잘라낼 수도 없고

그거는 그 자체로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지극히 깊어지면은

저절로 끊어져 나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본래의 자유와 깨달음으로 회귀, 돌아간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negative, 혹은 음양으로 따지면 음의 방식이죠.

 

그런데 융의 해방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행동지향적입니다.

뭐냐 하면 개인화라고 하는 건데

Individualized는 개별화인데

개인화는 다 통합된 겁니다.

내면이 온통 통합된 상태를 individuation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내면에도 구조가 있다.

아르케 원형이 있는데

그게 4가지라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이제 사회에서 가면을 쓰고자 하는 역할을 하는 페르조나

-그다음에 아니마 아니무스, 그다음에 여성성 남성성

-세 번째가 쉐도우, 짬처리해 놓은, 처박아 놓은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상처와 어둠과 탐욕과 폭력성

이런 좀 바람직하지 않은

-네 번째가 무의식 깊은 곳에서 통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진정한 나

셀프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융의 심리학에서는 에고와 셀프가

에고는 현실과 의식을 맞고

셀프는 무의식 안에서 깊이 그 에고와 만나기를 바라고 있는 존재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내면 통합이라고 하는 것은

에고가 어떻게 보면 셀프에 닿기 위해서

무의식 전체를 여행해서

통합해 내는 과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융은 꿈이라든지, 상상, 상징

그다음에 신화나 종교 같은 어떻게 보면 집단 서사

이런 집단 무의식까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무의식까지 파고들어서 다 의식해야 된다.

즉 통합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일이 많죠.

 

그래서 불교적 입장에서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바람이 멎으면 파도도 멈춘다.”

그러니까 파도와 싸우면 안 되는 것이죠.

바람을 멈춰야 되는 것이죠.

바람을 멈춘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편향된 의식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의 알아차림이

지극해져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곧 멈추는 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융의 입장에서는

이 통합을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개인화, 혹은 내면 통합에 이른 사람은

역사상 붓다와 예수 정도밖에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문제의식은 같은데

해결책은 조금 정반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융의 관점이 되었든, 불교적 관점이 되었든

사실은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래서 투사된, 내가 투자한 세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건전하게 살려면

내면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그다음에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만난 그 세계라고 하는 것은

생각과 말의 영역이 아니다.

이게 언어도단 심행처멸아니겠습니까?

생각과 말의 영역이 아니다.

 

이런 거죠.

우주는 이렇게 해서 생겨나서 이렇게 되다가 이렇게 된다라고 하는

우주의 기승전결이라든지

우리는 뭐뭐 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하는

인생의 의미라든지

하는 것에 대한 언어적인 서사

그런 건 없다

그런 영역을 넘어선다

그런 영역과 상관이 없다

이런 표현이 되겠습니다.

 

그것보다 더 훌륭하다

이런 의미라기보다는

그것과 상관없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그 서사 속에서, 이야기 구조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슬픔

저는 슬픔만 얘기했지만 희로애락 모두죠.

온갖 감정은 다 사실은

좀 착각이거나 착오일 수 있다, 이런 것이죠.

 

왜냐하면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눈이 내리든, 꽃이 피든

이건 다 대기권 안에, 지구 대기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지구 우주 공간에는 뭐 그런 거 없지 않습니까?

비유를 하자면.

 

그래서 비나 구름이나 바람이나

이런 것들은 전부 대기권 내의 일이다.

우주에 우주선과 방사능과 우주풍 이런 게 있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은

지구 대기권 내의 일이다라는 얘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인간은

내가 생각하는 세계를 진짜 세상에다가 투사하고 있다.

이 부분을 알아차림이 지극해지면

상당한 자유가 가능하다라고 하는 불교적 관점과

 

그다음에 내면에 내가 자각하고 있지 못한 것을

더 많이, 더 깊이 자각함으로써 얻어지는 자유

이 두 가지에 대해서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