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그대 이미 무심하니 나도 그만 두리라

Buddhastudy 2025. 4. 1. 19:23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겪는 어려움과 그에 대한 불교적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세상이 무심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바꾸는 데 집중함으로써 평화를 찾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

세상은 무심하며,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우리의 경험과 관점에 의해 형성됩니다 [02:58].

 

*괴로움의 원인:

행복의 조건을 많이 설정할수록 괴로움이 커집니다 [04:50].

 

*세상과 사람들의 관계:

세상은 추상적이지만,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우리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05:27].

 

*불교적 해결책:

관찰: 모든 일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06:48].

변화: 조건이 변하면 현상도 변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07:30].

잘 살기: 운동, 깊은 생각, 감각 다듬기, 생활 방식 바꾸기 등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08:29].

무심(無心)의 중요성: 세상이 무심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 또한 무심해질 수 있으며,

이는 상처받을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으로 이어집니다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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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타인과의 관계, 무심, 놓아버림, 관찰과 통찰

 

세상은 내게 특별히 적대적이지도 우호적이지도 않다.

무심하다고 할 것이다.

일상에서 연기법을 관찰하고 통찰을 얻으면

고통과 원망으로 새어나가는 에너지를 차단할 수 있고,

그 에너지로 나를 바꿀 수 있다.

운동, 깊은 생각, 감각의 다듬질 등으로 삶이 달라지면

세상의 무심함에 수긍하며

나도 내려놓고 무아에 이를 수 있다.

스트레스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다.

 

 

오늘은 시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대 이미 무심하니

나도 그만두리라/

 

여러분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이건 시니까.

 

나하고 세상하고 상호작용하고 액션 리액션을 하면서

어떻게 보면 전쟁처럼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느낌이 오느냐 하면

그 세상은 무심하구나, 나 혼자 그러고 있구나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그만두게 되죠, 그 싸움을.

그런 뜻으로 저는 새겨집니다.

 

우리는 평화주의자이지만

세상이, 혹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이런 일종의 피해 의식

혹은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라고 하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도전에 대한 응전이 곧 삶이다.

응전하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물학적으로도 그렇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응전에 실패하면 삶이 인생이 도태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특히 오늘날처럼 돈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는

이렇게 적절한 응전을 해내지 못하면

가진 것마저 빼앗기리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고요.

그거는 실제로 막대한 위협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면

왜 일을 하죠?

왜 힘들어하면서 이렇게 하기 싫은 것 같은데 왜 직장을 다니죠?”

이렇게 이야기하면

더 험한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제가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험한 꼴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사는 삶의 방식이

차선도 아니고, 차악 정도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차선에서 최선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악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차악 정도를 버텨내는 삶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근데 이런 삶에는

까치발로 오래 그럴 수 없듯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겠죠.

유지하는 자체에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게 되고

그럼 고갈되고, 그리고 심신은 번아웃 되겠죠.

그래 번아웃 되면

그 사람이 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이게 계속 쳇바퀴가 돌아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가 괴로워하다가 마음공부도 하고

어떤 계기도 있고

그렇게 해서 어느 날 문득

눈을 떠보니까 알게 된 거예요.

 

가만히 있어 봐라.

이 세상은 아무 생각 없네.

세상은 무심하네.

세상은 나에 대해서 관심이 없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생각이 바뀐 거죠.

 

그러면 세상이 뭐지?

그 세상은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는 내가 인식한

이런 게 세상인가 보다라고 하는 것 이상으로 세상을 느낄 방법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나에게 인식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세상에 없다는 게 아닙니다.

나는 세상을 내 나름대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인식론적인 한계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누구나 다 코끼리가 없다고 하지 않지만

코끼리 다리를 만진 맹인들은

다 제각각으로 자기의 경험과 언어로 표현을 하니까

제각각이죠.

 

그래서 능엄경 이런 데도 보면은

중생의 마음에 응해서 법에 따라 드러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요.

 

마음에 응한다는 것은

중생이 뭘 보느냐? 어떤 걸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서

좀 더 그게 커 보이게 되고

그다음에 업에 따라 드러난다라고 하는 것은

그 중생이 살아온 경로에 의해서, 그 계기로 인해서

드러난다, 현실화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우리가 타파해야 될 것은

현실이나 세상이나 타인이 아니고

내가 그린 세상에 대한 나의 그림

그 그림을 타파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요즘 세상에서

그것은 희망이고, 포부고, 비전이고

원대한 꿈이고, 자아실현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교에서는

거의 다 좀 깊이 생각해 봐라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번뇌의 아이러니인데

왜 괴로우냐?

그건 뭐냐 하면

나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어라고

행복의 조건들을 크고, 많이 설정할수록

나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정신적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어느 날

세상은 아무 생각 없는데 나만 헛심을 쓰고 있구나

이런 걸 깨달았다고 합시다.

 

근데 세상은 추상적이지만 사람들은 구체적이잖아요.

내가 여기 보니까 내가 사람들한테 치이고 있어

사람들이 나를 좀 업신여기고, 공격하고, 도구로 쓰고, 뒷담화도 하고, 왕따시키고

이런 걸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거잖아요.

내가 시달리는 거 아닙니까?

 

두 번째는 정신적으로도

이게 잘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 질투, 선망

그다음에 나는 이게 전생에 나라를 말아 먹었든지

하여튼 나는 이 모양 이꼴이냐라고 하는 자기 비하

 

이런 것들이 정신적으로, 또는 관계적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이거는 내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니고

세상과 사람들이 나한테 지금 이렇게 타격을 가하는데

이건 대응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대응이 너무 힘이 좋으면

당연히 이길 것이고

대응을 여러 가지로 해봤을 거 아닙니까?

그런 대응 중에

장기적으로 뭐가 좋으냐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지혜를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의 핵심은

[연기법]에서 찾아라

이게 불교적인 가르침입니다.

 

연기법에서 왜 해결책이 나오느냐?

첫 번째는 잘 관찰해 봐라, 하는 거죠.

 

관찰해 보면

모든 일은 뜬금없이 일어난다기보다,

그럴 만해서 일어난다

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조건

그 일이 일어나게 되는 여러 가지 안팎의 조건들을 관찰하면

, 이게 이래서 이렇구나

그게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죠.

그런 구조가 되면 그런 일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 조건이 되면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라고 하는

그 구조와 상황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원망하는 것보다 상황에 대한 집중을 더 높이면

이 원망하는 마음으로 새나가는 에너지가 많이 차단됩니다.

일단 여기서 에너지를

첫 번째로 세이브 합니다.

 

두 번째는 관찰한 다음에는 통찰이죠.

그래서 조건에 따라서 이게 생겨난 거라면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만약에 해체되거나 바뀌면

이 현상도 바뀌겠네라고 하는 게

무상이라는 불교적 용어 아니겠습니까?

 

조건은 근데 가만히 있을 수 없고 변하는구나.

그러면 또 내가 그 현상을 더 빨리 변하게 하려면

이 조건을 내가 열심히 해서 바꿔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이것은 영원히 갈 거고

-이거는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고 하는 것이 주는

정신적인 번뇌에서

새나가는 에너지가 또 차단이 됩니다.

 

그러니까 벌써 에너지가 두 번에 걸쳐서 확보가 세이브가 되는 것이죠.

그럼 이 에너지를 가지고 뭘 하느냐? 싸워서 이기냐?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 에너지를 가지고 세 번째 할 것은

잘 사는 거죠.

 

잘 산다고 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첫 번째는 운동하고

-두 번째는 깊이 생각하고

-세 번째는 나의 감각을 다듬고

-네 번째는 총체적으로 내 생활을 바꾸라

 

그러니까 나를 바꾸는데 이 세이브한, 아낀 에너지를 쓰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묵묵히 시간이 흐르면

나와 세상이 어느덧 바뀌어져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제안을 불교에서는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아까 그대 이미 무심하니 나도 그만두리라/라고 하는

뜻을 알게 되는 것이죠.

 

즉 뭐냐 하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내게 적대적이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우호적이지도 않고

진짜 세상을 무심하거나

그러면 나도 질 수 무심해질 수 있잖아요.

 

나도 무심해질 때

그것을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하고, 공이라고 하고.

그렇게 했을 때

상처받을 내가 더 이상 없는 것이

무아의 본질적인 이미지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그대 이미 무심하니 나도 이제 그만두리라라고 하는

이 무심과 그만둠

이것에 대해서

시 구절 하나를 가지고 여러분들하고 얘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