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치유 심리학 불교

Buddhastudy 2025. 5. 5. 20:14

 

 

  • 불교의 핵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불교를 '치유 심리학'으로 정의하고,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인 가르침임을 강조합니다 [00:43].
  • 역학과의 비교: 인간 운명에 대한 불교(고등락)와 역학(피흉추길)의 접근 방식 차이를 설명하며, 불교는 부귀영화 자체가 괴로움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독특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01:39].
  • 초기 불교: 초기 불교가 명확하게 치유 심리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괴로움의 원인과 소멸에 대한 가르침(고집멸도)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04:20].
  • 연기법: 세상의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라 변화하며 영원한 실체는 없다는 연기법의 핵심 원리를 설명하고, 이를 통해 어려움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06:45].
  • 무상과 무아: 환경 변화(무상)와 정체성의 변화(무아)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며, 세상을 통제하려 하기보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09:04].
  • 판단 중지: 판단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Non-judgmental awareness'가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며, 이는 집중력 향상과 성공적인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14:11].
  • 결론: 불교를 치유 심리학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집착과 판단을 멈추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18:38].

 

 

 

붓다는 "나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얘기한다"고 하셨다.

그의 사상과 가르침을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확실한 것은 오늘날 불안과 우울로 이끄는 스트레스가

만연한 세상살이에서

치유 심리학으로서도 큰 기능을 한다는 것은 명확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불교는 이론 체계가 아니라

치유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불교 철학과 종교 사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불교는

-철학이기도 하고

-종교이기도 하고

-심지어 신앙이기도 하고

-심리학이기도 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오늘은 저는 현대인에게 불교는

-치유 심리학에 더 가깝다

그렇게 쓸 때에 효용이 크다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람마다 불교에 대한 관점은 다 다를 수 있는데

아까 철학, 심리학, 종교, 신앙 이렇게 볼 수 있죠.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합해서 불교에서 부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이거든요.

나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해서만 관심이 있고 얘기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불교를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치유 심리학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불교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고

또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고

효과를 봐야 되겠죠.

?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효과를 누려야 한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접근한다고 하면

-복을 짓고 복을 받는다든지

-또 죽어서 극락에 간다든지

-아니면 또 종교적인 정 열정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든지

-성불을 한다든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그거는 조금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렇게까지 절실한 개인적으로는 그럴 수 있는데

일반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하는 생각입니다.

 

비슷하게 우리 요즘 크게 세간에 떠들썩한

역학 사주명리학

이런 데서 보면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추구하는 게 있습니다.

불교가 이고득락이라고 하면

역학이 추구하는 것은 피흉추길이죠.

흉한 것은 피하고, 길한 것을 쫓아간다, 추구한다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역학에서 말하는

길하다, 좋다라고 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하나는 돈이죠.

-두 번째는 좋은 가정을 꾸려서 자손이 번창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고

-네 번째는 사회적 지위나 권위, 권력, 이름을 얻는 것이죠.

4개가 어떻게 보면 부귀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좋은 것이고

이것을 추구하고 이것에 반대되는 것, 훼손하는 것을 피하는

그것을 중심으로

역학의 어떤 구조가 짜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고득락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불교의 독특한 관점은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할 때

네가 추구하는 부귀 영화 자체가 괴로움의 근본적인 원천이 된다.

그것은 자세히 보면은 좋은 게 아니야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근데 그러면 거기서 문을 닫고 돌아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 내가, 지금 젊은 내가

혹은 내 인생에서 부귀영화 한번 누려보고 싶은데

그게 괴로움의 원천이야이렇게 이야기하면은

사랑의 눈물의 씨앗이라고 한다고 해서 사랑을 안 하겠다

이거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해서 돌아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게 있죠.

참 스트레스가 많다.

과거를 후회하기도 하고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게 몸에도 영향을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라고 하는 것에는

불교가 굉장히 파워풀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불교를 크게 시대적으로 3등분 하면

부처님 살아계시고 또는 인멸 후 직후에

그걸 [초기불교]라고 하고

그다음에 상당히 이론적으로 정밀하게 이론화된 게

[아비달마불교]라고도 하고,

대승 쪽에서는 그걸 [소승불교]라고도 하고

그런 부파불교 시대가 있었죠.

그리고 대승불교, 지금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대승불교]라고 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저는 아무래도 초기불교에서 했던 얘기들이

좀 더 원룸에 가깝다고 생각해

초기불교 쪽을 보면은

초기불교는 명확하게 치유 심리학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부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내가 얘기한다이렇게 얘기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네 글자로 나타낸 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 이렇게 되겠습니다.

 

여기서 괴로움이 있는데

그 괴로움의 원인은 집에 있다.

이때 [()]이라고 하는 것은 12연기법으로 보면

-결국은 내가 뭔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좋아하는 것, 의도

이런 것들이 결국은 괴로움을 낳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게 이 이야기를 딱 들었을 때

그렇지하고 느낌이 오는 분이 있고

아니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해서 괴로운데

원하는 걸 얻으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마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너무 이상한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넘어가 보겠습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그 건 딱 세 가지죠.

() · () · () 이렇게

혹이라고 하는 것은

네가 지금 생각이 잘못됐어.

세계에 대한 인식이 좀 틀렸네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은 뭐냐 하면

그래서 네가 지금 문제를 일으켜, 세 가지로 일으켜

-하나는 네 마음에서

-하나는 네 말에서

-하나는 너의 행동에서 문제를 일으켜

이게 업을 짓는 거야.

그럼, 그 결과는 괴로움이지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그래서 불교를 지혜의 가르침,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는

네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 인과론적으로 보는 게 아니고

인식론적인 오류가

너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잘못을 일으키는 거야.

그러니까 그걸 심리적인 문제를 억압해서는 해결이 안 되고

그 인지적 오류

네가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올바른 시각, 즉 정견

올바른 견해를 확립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마음의 문제가 일어날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뭐냐?”라고 했을 때

부처님이

이거는 내가 발견한 건데

이거는 세상이 무너질 때까지 변하지 않는 법칙이야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이야

그 법칙이 연기법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 거죠.

 

그래서 연기법은 뭐냐 하면

조건에 따라서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서 없어져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고유한 뭐가 있는 게 아니고

그 하부에, 그것을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일시적으로 결합을 하면 그게 생겨나는 거고

그런 조건들이 흩어지면은 그 현상은 소멸하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이게 스트레스와 관련해서 직접적인 게

우리가 스트레스를 넘어서 멘붕에 빠질 때는

저도 경험해 봤겠지만

사람이 어려움이 잠깐잠깐 있을 때는

지나가는 어려움이나 예상이 되면은 참을 수 있는데

이게 영원히 이렇게 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영원할 것 같은 생각이 들을 때 정신이 무너지거든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계속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조건생 조건멸이다.

이 모든 것은

지금은 철벽처럼 단단해 보여도

하부적인 조건들이 결합되어 있는 거고

이 조건들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 조건들이 바뀜에 따라서 이 현상은 영원할 수가 없다.

이게 불교적인 연기법의 핵심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실제로 어려움을 볼 게 아니라

어려움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살펴보면서

위로를 얻을 수도 있고

-두 번째는 현명한 사람은

이 모든 것의 조건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이 현상도 결국은 지금 내가 잘 느끼지 못하지만

변해 가고 있는 중이야.

이렇게 보면은

이것이 영원할 것 같다라고 하는 데서 오는

그 마음이 그때 내가 느껴보니까 절벽에서 느낌이더라고요.

야 떨어지면 죽겠는데

그런 벼랑 끝에 몰린 느낌은 들지 않게 된다.

이게 연기법이 주는 마음치유 효과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건에 따라서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서 흩어진다라고 하는 것을

모든 현상을 그 관점으로 바라보면

필연적으로, 논리적으로, 결과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당연히 모든 것은

변화의 와중에 있구나, 영원하지 않구나, 하는 게 하나고

-두 번째는 그러므로 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

이런 거는 형이상학적으로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구나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무상하고 무아를

-무상은 환경 변화라고 생각하시고

-무아는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면

환경도 변하고

내가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나라고 생각했던 그 나도 변하는 것이고

입맛도 변하고, 취향도 변하고

소유관계도 변하고, 위치도 변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연기법은

그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을 만들어내는 조건을 살펴라라고 하는 것이고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영원한 것은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라고 하는 정체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세 가지가

이 험난한 세상에 살면서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침착하게 해주고, 평화를 가져다준다.

이게 포커스가 되겠습니다.

 

불교를 수신의 도이지, 치국의 도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건 저는 맞다고 생각해요.

불교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정치를 하겠다

이러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교는 동전의 한쪽이죠.

마음의 측면,

현상을 지배하는 연기법을 알고, 무상과 무아를 알게 되면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세계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나를 바꿔보자

이건 가능하죠.

 

그러니까 세상의 절반 절반이 있다고 하면

절반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자신도 잘 모르면서

바깥 상황을 통제해서 살 만한 인생을 꾸려가려고 하니까

이게 좀 뭐가 구조적으로 안 맞는 거 아니냐라고 하는 것이

불교적인 권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연기법을 알고 무상과 무아를 아는 사람은

그거를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인식해서

어떻게 심리적인 평화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라고 하면

그렇게 아는 사람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되는 거죠.

 

첫 번째 단계는

집착이 안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게 머물지 않는 거라는 거 알잖아요.

조건이 바뀌면 또 바뀔 건데

그러면 논리적으로 보면 집착을 안 할 수가 있죠.

 

두 번째는 집착하지 않으니까 별로 걸리지 않고

마음에 장애를 입지 않고 괜찮아

이렇게 넘어갈 수가 있는 것이죠.

이게 쉽지는 않지만 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게 되면

그다음에는 내 마음속에서

나는 이래야 돼, 이건 이래야 돼, 저건 저래야 돼, 이게 맞는 거야, 원래 이런 거야, 이게 당연한 거야, 라고 하는

앵커링이라고 그러는데 영어로

심리학 용어로 닻을 내린다

마음이 어딘가에 닻을 내리고 움직이지 않게,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를 고정시켜서

그거를 자기하고 일체화시켜서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것이 나한테 시비거리가 되겠죠.

 

그래서 조건에 따라서 생멸한다라고 하는 관점을

투철하게 갖고 있으면

어느 하나의 닻을 마음의 닻을 내려서 고집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if 조건절이 나오죠.

우리가 심리적으로 보면

만약에 내가 무엇무엇을 갖고 있다면

내가 무엇 무엇을 가진다면 행복할 텐데

거꾸로 얘기하면

내가 이걸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지 않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앵커링, 마음의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이죠.

 

닻을 걷어 올리면 집착할 게 없어진다.

그러면 그것이 나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내가 세상살이, 인간관계로 적용되면, 확장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내가 특별히 꼭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라고 하는

to be, must, should 이런 걸 안 갖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as is,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must 뭐 뭐 해야 되는 그 모습 사이의 격차가 어떻게 보면 스트레스인데

그런 스트레스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옛날 말에는 이문 등등등등 이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은

운에 따라서 그냥 흘러간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건 또 한국말로 하면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이렇게 되는 것이죠.

줏대가 없어지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to be 관점에서 살지 않고, 닻을 내리고 살지 않고, 집착하고 걸려서 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이죠.

세상의 흐름에 흐름을 타고 가는 것이죠.

이렇게 되겠습니다.

 

이 모습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걸 좀 더 심리적으로 이야기하면

연기법, 조건에 따라서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서 없어지는 것이

세상의 현상이다 라고 하는 것.

그 결과로

세상에는 모든 것이 변화의 와중에 있어서

항상 존재하는 것은 없고

그다음에 나의 정체성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렇게 철학적으로 인식이 확립되면

그다음에 심리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하면

Non-judgemental awareness

(상황이나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식하는 것)

그걸 보긴 보는데

이건 이래야 되고, 저건 저래야 되는데

MBTI에 보면 J 있잖아요.

“J가 아니니까가 아니라 P가 되는 거죠.

인식형 이렇게 되는 거죠.

이러니까 안 돼, 문제가 있어이렇게 보는 게 아니고

그냥 그렇구나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것이 마음의 평정심을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마인드 셋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내가

이건 틀렸어, 이건 나빠이렇게 판단하게 되면

또는 , 이 주식 끝내주는데, 이 주식 10배 뛰겠는데이렇게 생각하면

탐욕이 생길 거고

이거 틀렸어그러면 화가 날 거고

그리고 , 어떻게 해야 되지? 이래야 될까? 저래야 될까?” 하면

내가 어둠에 휩싸일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탐진치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탐진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마음에 심리적인 폭풍이거든요.

그 폭풍 속에서 내가 편안하기는 어렵죠.

 

그러면 폭풍이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마음이

들뜨거나, 너무 가라앉거나, 뒤집어지거나, 어쩔 줄 모르거나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실수하게 되죠.

 

누구나 사람은 마음이 떠버리면,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면

실수하게 되어 있죠.

또 실수만 아니라 악심을 가질 수도 있죠.

나쁜 마음을 가지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죠.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업이 된다

즉 그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판단하게 되면

반드시 심리적인 문제가 생기고

그러면 행동에 문제가 생겨서

나쁜 결과인 괴로움을 피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그러면

우리는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바람직한 것과 버림직한 것을 잘 구분해서

이것은 억누르고 이것은 북돋우고

이렇게 노력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길도 있습니다.

 

뭐냐 하면

어차피 그 에너지나, 지금 소개하려는 이 에너지나

같은 에너지예요.

근데 에너지를 잘 쓰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죠.

 

그러니까 평정심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닻을 내리지 않고 있을 때

-집착하고 있지 않을 때

-판단하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그냥 인식만 하죠.

그렇구나” “그렇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근데

-야 어떤 기준으로 봐야 돼?

-뭐가 옳은 거야?

-어떤 게 더 좋은 거야?

이런 식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냥 평정심만 갖고 있으면

에너지가 찰랑찰랑한 거죠.

어느 쪽으로 휩쓸려가지 않은 에너지가 찰랑찰랑 있습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그 평정심이라고 하는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집중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없으니까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거나, 일을 할 때

그냥 순수하게 집중에 들어갈 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 이거는 원래 그걸 노리는 건 아니고

그냥 side effects, 부산물 같은 건데

내가 마음이 편안하고 아무런 걸림이 없으면

어떤 일을 할 때

그냥 있는 그대로 쑥쑥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그게 돌에 새겨지듯이 사진 찍듯이

그렇게 있는 그대로 쫙쫙 빨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죠.

그게 집중력입니다.

 

그래서 그 집중력이

우리가 살아갈 때, 일을 할 때, 인간관계에서

평정심과 집중력이 있는 사람은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성공할 확률이 엄청 올라가는 것이죠.

 

대부분 우리는

욕심을 내고, 화가 나고, 결정장애에 빠져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에너지가 다 새어 나가 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만한 에너지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일을 성공시키기가 어렵거든요.

 

근데 나는 언제든지 에너지가 찰랑찰랑해.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설적으로

아까 얘기한 비융축일

길한 거 사회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의 확률도 사실은 올라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불교를 종교나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철학이나 특히 치유 심리학의 차원에서

오늘날 우리한테 매우 유용하다

이렇게 저는 권하고 싶고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불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출발점은 마음의 평화

그리고 그 마음이 평화로우려면

판단하고, 집착하고, 닻을 내리고

이런 걸 하지 마라.

 

근데 하지 마라고 하면 억압이 되니까

그런 것들이 무슨 일을 일으키는지를 지켜보라.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불교, 치유 심리학으로서의 불교

그래서 철학과 종교 사이에 있는

치유 심리학을 소개해 드려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