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이 필요한 시대다.
조용히 앉아서 하루를 열거나 하루를 마감하는 것은
자신과 우주의 조화를 되찾는 좋은 습관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차분해지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번뇌를 종식시키려면 좀 더 나아가야 한다.
바로 참선이다.
참선은 기수련도 아니고 의식을 잃어버리는 삼매 상태도 아니다.
명식하제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그 생각의 프레임을 보는 것이다.
참선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 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보이는 것은 나를 속이지 못한다.
번뇌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내 생각의 틀이 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삶이 어렵고 시대가 험할수록 참선은 더욱 필요해진다.//
오늘은 참선은 기공수련이 아니다.
그다음에 삼매도 아니다.
이런 얘기를 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참선한다라고 했을 때에
한국 사람은 두 가지를 생각하죠.
하나는 다리를 꼬고 앉는다, 좌자가 있고
그다음에 선정에 든다, 삼매에 들어간다라고 하는
좌선, 또는 삼매선정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참선한다라고 했을 때에 한국 사람들은
화두참선을 많이 생각을 합니다.
물론 연불참선도 있고
참선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참선에 대한 이해는 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는데
첫 번째 참선은 기수련은 아니죠.
그래서 바로 앉고, 바르게 앉고, 허리를 펴서 호흡을 고르고
어디에 집중하고 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참선이 그렇다고 해서 기수련, 소주천 대주천을 돌리는 기수련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불교가 힌두교나 요가 쪽의 용어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하거나 뒤집어서 뜻을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요가에서 말하는 삼매의 전 단계가 디아나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 디아나라는 단계는
의식이 오염되거나 방해받지 않고 쭉 깊게 확장되어 있는 상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됐건 특정한 지점에 집중하고 있다가
완전히 자기까지도 몰아의 경지로 들어가는 삼매와 그 사이에
확장된 깊은 의식상태
이렇게 요가에서는 일곱 번째 단계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어떤 삼매하기 직전에
확장된 의식 상태에서 뭔가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꼭 화두를 드는 것은 13세기 와서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고
원래 참선이라고 하는 컨셉은, 개념은
디아나라고 하는 단어에서 보면은
‘정려’ 또는 ‘사유수’ 이렇게 이야기돼 있습니다.
뭐냐 하면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이죠.
근데 생각을 깊게 한다는 것이
밤새워서 특정 주제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한다거나
곱씹고, 또 곱 씹는다거나
논리적으로 꿰어 맞춘다거나
이것과 저것을 연결시켜서 어떤 생각의 틀을 만든다거나 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건 다 알음알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것은 참선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우리는 고요히 앉아서 하루를 시작하거나 하루를 마감하고 할 때
그 고요함과 차분함과 평화를 느끼죠.
그것은 되게 매우 좋은 습관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집중하거나 호흡을 고르거나 특정한 자세로 앉거나
또는 특정한 개념을 생각하거나
이런 것들은
하나의 출발점, 혹은 하나의 계기일 수는 있어도
참선 그 자체는 아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참사는 그럼 뭐냐?
이 참,가 참여한다는 거잖아요.
선이라고 하는 것은 선나, 디아나라고 하는 건데
이 선나라고 하는, 디아나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생각하다는 거거든요.
생각에 참여한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생각에 참여한다는 것은
생각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생각을 본다라고 하는 의미에 더 가깝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자기의 생각을 본다는 것이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3자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죠.
그 프레임을 보고 깨닫는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점에 집중하고 있는, 집중도 아니고
그다음에 나를 완전히 망각하는 삼매 상태도 아닌 것이죠.
“내가 의식이 깨어 있는데
내 생각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붓다의 입장에서는
그 인간이라고 하는 또는 인간이 하는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문제다
이렇게 봤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생각에서 나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수록 괘씸하다’라든가
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하면서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생각을 잘 다스릴 것을 중요하게 제시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삼매로 완전히 빠지는 것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죠.
왜냐하면 삼매로 빠지면
그냥 잠자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거든요.
또 깨면 삼매에서 빠져나오면
또 일상생활의 번뇌를 맞이해야 되기 때문에
삼매를 활용하되 삼매에 빠지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깨어 있어야 된다.
그것이 참선하는 목적이죠.
그래서 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사유수라고 이야기하죠.
사유를 닦아라.
사유를 통해서 닦아라가 아니고
호흡을 통해서 닦아라.
그다음에 한 점에 집중함을 통해서 닦아라.
이런 무엇을 통해서 닦아라가 아니고
사유 자체를 닦아라
즉 사유 자체를 관찰하고
내 사유 자체를 나의 사유 자체를 통찰해라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것이 사띠죠, 알아차림이죠.
그래서 뭘 알아차리느냐 하면
내 생각과 내 생각이 나온 그 프레임을 알아차려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에
즉 디아나, ‘생각에 뛰어든다’라고 하는 의미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의 프레임이 보이면
그때부터는 잘 걸려들지 않죠.
“이건 질투 프레임이구나”
“이거는 무슨 두려움에 대한 프레임이구나”
“이것은 욕망의 프레임이구나”
이런 자기의 프레임을, 그 틀을 생각의 틀을 알게 되면
거기에 속아서 그게 진짜인 줄 알고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번뇌가 일어날 일이 없죠.
그래서 내가 어떤 생각에 심각하게 잠겨들어서
그 생각이 감정을 불러내고
그 감정에 심지어는 생리적인 반응까지 불러낼 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든지, 식은땀이 흐른다든지
그런 생각과 감정과 생리적 반응을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에 제일 먼저 기억해야 되는 것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내가 지금 어떤 맥락에서 생각을 하고 있나
그런 것들을 깨달아라, 라는 겁니다.
그걸 깨달으면 감정과 생리적 반응은
바람이 멎으면 파도가 잦아드는 것과 같이
시간을 두고 해결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참선은 정신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다.
몰아일체, 삼매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고
평화로운 의식으로 관찰력을 가지고
자기 생각 전체를 보는 것이고
그 생각을 보면
생각이 보이는 게 아니고
떠들썩했던 자기 마음이 조용해져 버린다 하는 것이
참선의 효과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참선은 기수련도 아니고
참선은 삼매로 빠져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참선은 자신의 생각을 보는 것이다.
거기서 번뇌의 종식이 나온다.
이렇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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