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무상, 고, 무아의 성공학

Buddhastudy 2025. 3. 31. 19:34

 

 

무상, , 무아는 연기법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런 결론이다.

현상과 심리를 지배하고 언제나 관철되는 법칙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생산에 관한 일체의 법과 불법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심리적으로 평안하고 싶을 뿐만 아니라

세속 현실에서도 실패한 루저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실패로 인한 고통 속에서 벗어나려면

여전히 늘 작동하는 무상, , 무아의 진리를 약으로 삼아야 한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삼법인 무상, , 무아죠.

삼법인의 성공학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삼법인은

부처님의 어떻게 보면 근본 가르침의 요지인데

이것과 세속적인 성공학

이거는 너무 무리한 연결이 아니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는데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이죠.

괴로움을 벗어나서 즐거움을, 또는 행복을 얻는다

이게 목적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목적을 이루려면

지금 번뇌로부터 벗어나야 되는데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핵심이 [포기]거든요.

그러니까 되돌이표에 빠지는 겁니다.

 

아니 포기하지 않고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돼서 괴로운데

그거 포기하라고 하면

여우의 신포도 같은 거 아니냐?

그래서 무슨 약간 패배자의 정신 승리 같은 거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

그래서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고요.

 

그래서 붓다의 깨달음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현상적으로는 위대한 포기

-자발적인 완전한 내려놓음

이런 표현을 쓰니까

먹고 살아야 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저거 거지되라는 얘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서 일단은 싫습니다, 그게.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는

그 요인 중에 하나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자도 번뇌가 있을 수 있고

조금 금전적으로 쪼들리지만

나름 또 행복하게 살고

인생은 다양하잖아요.

 

근데 불법은 아무래도 우선적으로는 심리적인 문제에 집중하죠.

그래서 불교적 진리를 듣고 [신수봉행] 이렇게 하는 거죠.

초기 불교에서는 신수봉행.

믿고, 받들어서, 행한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믿고- 받아들이고- 그걸 행한다

이렇게 그대로 행동한다, 이런 뜻이잖아요.

 

조금 뒤에 가면은 [신해행증]이라고

대승불교권이나 선불교권에서는 신해행증을 강조합니다.

믿기는 믿는데 그거를 이성적으로 이해를 해야 돼.

그리고 행위에 적용을 해서 스스로 증명을 해내야 돼.

 

이게 비슷하지만 조금 뉘앙스가 다른, 그런 두 가지입니다.

하지만 신수봉행, 신해행증

이건 다 뭐냐 하면은

과연 그러하구나라고 체득하는 거, 그 맛을 보는 거

그래야 약효가 생긴다, 그래야 병이 낫는다.

 

어떤 병?

번뇌라고 하는 병이 낫는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한국 현대에서는 그게 병이 번뇌라고 하는 병은

결국 스트레스 아닙니까?

그것은 만병의 근원이고 우리의 불행감에 기초가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런 번뇌, 스트레스를 벗어나는 데 있어서

불교적 가르침의 그 어떤 어프로치, 접근 경로는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너 월드(영적 세계)를 다스려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다스림을 억압이라고 또는 도덕적 함량 이게 아니고

깨우쳐라’ ‘깨달아라

현타이런 거를 이야기하는 거죠.

 

뭐냐 하면 니가 뭔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가 하면

이 실상, 실제 현실과

네 생각이 달라서 일어나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우리 고도리를 치는데

청단 홍단 다 깨졌는데, 이미 다 깨졌는데

자기 패에 청단 들고 있으면 청단 2개 있으면

이거 갖고 청단할 거라고 하지만

청단 이미 깨졌는데

바깥 상대방 패를 보지 않는 것이죠.

자기 패만 보고

청단할 거야이렇게 하면은

쓰리고에 피박에 괴롭겠죠.

 

그래서 뭔가 생각을 잘못, 인식을 잘못하고 있는 데서 오는 번뇌가

대부분이다라고 보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고

그래서 불교는 드물게 지혜의 종교다, 지혜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럼 뭐가 지혜냐? 그리고 뭐가 실상이냐?라고 했을 때

부처님이 제시한 그것은

유일하게 딱 한 개 있습니다.

그것은 [연기법]이죠.

우리가 잘 아는 연기법은 원래 인--과에 관한 얘기잖아요.

 

원래 인-과만 있었는데 이라고 하는 것이 끼어들어서

중간에 굉장히 복잡한 복잡계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그래도 간단하게 보면 인과의 법칙에 매여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연기법이고

연기법을 풀이해서 설명하자면

조건생 조건멸이다

조건이 결합해서 생기는 것이고

조건이 흩어지면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실패라든지 실패로 인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조건부로 생기고

조건부로 없어지는 이런 현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

-그것이 영원하다든가

-그때가 좋았다든가

-나는 이런 사람이라든가

그런 고정된 굳어진 그런 데서 오는 불일치

변화하고 있는 현실과의 불일치에서 오는

심리적인 번뇌, 현실적인 실패

이런 것들이 우리를 고통 속에 빠뜨린다.

 

근데 그것은 우리의 인식이 잘못된 결과다.

어떤 인식?

모든 것은 연기법에 속한다.

모든 것은 연기한다라고 하는 그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우리가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못한 결과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거꾸로 이야기하면

무상, , 무아라고 하는 연기법의 결론을

우리가 수용해서 활용하기만 하면

크게 번뇌할 일도 크게 실패할 일도

즉 심리적인 괴로움과 세속적인 실패를 경험할 일이 별로 없다.

혹은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빨리 회복할 수 있다.

즉 평정심, 앞에 것은.

뒤에 것은 회복 탄력성이죠.

이 두 가지를 빨리 이루어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럴 때에 이고가 되고 등락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무상, , 무아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뭐 뻔한 겁니다.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 아닙니까?

저는 젊었을 때 읽었던 시드니 셀든의 소설 제목이

<영원한 것은 없다>라고 하는 제목이 있었는데요.

어쨌든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남한테 충고할 때 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근데 자기가 생각할 때는 영원한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항상 조건이 어떤 식으로 결합해서 현상이 생겨나는지

또 조건이 어떤 식으로 흩어져서

또는 다른 식으로 결합되어서

이 현상이 변화하거나 소멸하는지에 대해서 봐야 되는데

그러려면 조건의 변화를 살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그냥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라고 생각해야

뇌가 쓰는 에너지가 작으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합니다.

큰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냥 그저 그럴 거라고, 그때와 같을 거라고

우리가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늘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사실은 잘 못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굳어지면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죠.

 

즉 시대착오적인 생각은, 시대착오적인 언어를 낳고

시대착오적인 말을 계속하는 사람은,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실패를 하죠.

그렇게 되겠습니다.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조건에 따라서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서 없어지므로

영원한 것은 없다라고 하는 것을

그리고 변화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라고 하는 관점으로

관점을 바꾸는 것이죠.

 

두 번째는 []라고 하는 건데

이 고()라고 하는 것은

조금 괴롭다라고 하는 것은

아까 모든 것은 인식의 오류라고 했잖아요.

특정한 인식의 오류로 인한 결과다

이렇게 봐야 되겠죠.

 

()를 산스크리트로 이야기하면 두카라고 하는데

두카라고 하는 것은

내 생각과 현실이 맞지 않다, 어긋난다

이런 뜻이거든요.

 

현실과 내 생각이 어긋나니까

거기서 뭔가 파탄이 일어나고, 거기서 실패가 일어나고

거기서 투쟁이 일어나니까

그 결과로 나는 괴롭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이라든지, 다른 사람, 심지어는 나 자신도

내 생각과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내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의 결과물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생각, 내가 지금 하는 판단, 나의 통찰

이런 것들은 다 과거의 소산입니다.

과거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는 다른 거잖아요.

그러니까 항상 위험이 있죠.

위험이 있는데

그 과거를 너무 강하게 생각하면

너무 그 과거를 믿어버리면

현실과 파열음이 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동양에서 고()라고 하는 것은

풀 초()자에 옛 고()자거든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옛날에 풀 있었던 자리에 집착하는 겁니다.

양들을 풀을 뜯기고 나면은 옮겨야 되잖아요.

옮기지 않고 거기 계속 있으면 풀이 다 말라서

양들을 굶겨 죽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게 괴로움이죠.

 

뭡니까?

과거에 여기 좋았는데라고 거기에 집착하고 있다.

또 심리학 용어로는 닻을 앵커링(anchoring)

거기에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배가 못 가는 것이죠.

흐름에 따라서

그러니까 이미 지나간 조건이 바뀌어 버린 것이 만들어내는

현상의 변화를 부정하고 과거에 집착하고 있으면

닻을 내리고 있으면

문제가 생기고 괴로워진다.

이게 고()의 진정한 의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다음에 [무아]는 우리가 워낙 불교하면 무아(無我)

이렇게 대표되는데

내가 없다고? 그러면 뭐 그럼 뭐야?

나 미치는 거 아니야? 나는 뭐 소멸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거죠.

 

근데 무아는

-그런 상상 안 해도 된다

-그런 상상으로 훼손될 네가 없다, 이런 거니까

또 기가 찰 노릇입니다.

 

어쨌든 무아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라고 하면

그런 것이 영혼 불멸성은 아니지 않냐?

뭐 이런 정도의 얘기를 하는 겁니다.

 

거기다가 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누구다라고 하는 셀프 이미지나

철학적으로 보면 정체성 뭐 이런 것들은

자의식 이런 것들은

하나의 삶을 헤쳐나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지

그것이 나의 본질, 또는 본체, 실재

뭐 이렇게 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특히 거기서 나오는 신념 같은 게

우러나오는 신념 같은 게 있죠.

세상은 이런 거고 나는 이런 거고

나는 세상과 이런 관계를 맺을 거야라고 하는 것은 이 신념이지만

-이 신념조차도 네 생각에 불과해

-그건 실체는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너무나 과거의 소산인 자기 이미지 때문에

너무나 많은 현실에서의 투쟁과 실패를 겪고 있기 때문에

이 인식을 바꾸어서

세상 때문이 아니라

내가 왕고한 나의 생각 때문에 고통을 스스로 초래하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을 바꿔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뭡니까?

변신, 변화에 좀 열려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물 같은 것은

그릇이 세모나 네모나 동그라미나 이러면

그릇에 따라서 그 모양이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물은 물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까 자아라든지 셀프 이미지라든지

이런 것들은

그릇의 모양이지 물은 아니다.

물의 모양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한자로 보면 아()자라고 하는 것은

손 수()자에 창 과()자잖아요.

그러니까 손에 창을 들고 지켜야 될 영역, 나와바리

전문 용어로 하면

그 영역이 정해져 있냐, 고정되어 있냐, 영혼 불멸하냐

전혀 아니라는 거죠.

살 만한 데로 옮기면 되는 것이죠.

 

기업으로 치면

기업이 이거를 만들어서 팔다가 안 되면

저거를 만들어서 팔 수도 있고

그다음에 만들어 팔다가 안 되면

유통업으로 갈 수도 있고

또는 그것도 안 되면 서비스업을 할 수도 있고

기업은 변신하는 것이 미덕이다

이렇게 돼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야말로 내 손에 창을 들고

내 이 영역은 꼭 지켜야 돼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실패를 자초하는 어리석음이죠.

 

그와 관련해서 유목민의 전통에는

집을 짓는 자, 그곳이 무덤이 되리라

유목민은 집을 지으면 안 되죠.

그냥 텐트 치고 있다가

풀이 마르면 이동

이렇게 돼야 되는 것이죠.

 

그것이 현대의 디지털 유목민인 현대인들의 생활과 유목민들의 생활이

농경민족과는 다르고, 필요한 미덕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이야기를 줄여보면

결국 삼법인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중요한 인식적인 결론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죠.

현실에서도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혹은 실패해도 괴로움을 좀 덜 하려면, 덜 괴로우려면

연기법, 거기에 따른 논리적 결론인 삼법인

이런 것들을 평소에 인식하고

자꾸 적용해 보고 신수봉행이잖아요.

또는 신해행증이잖아요.

 

그러니까 핵심은 [적용]해 보는 겁니다.

작은 일에 적용해서

-“그렇구나

-모든 것을 연기하는구나

-즉 조건 따라서 생기고 조건 따라 사라지는구나

-그러므로 영원하지 않구나

-그러므로 나의 인식과 현실의 오류가 문제의 근원이구나

-그리고 나는 스스로 정한 자의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구나

이런 것들을 이해하면서 유연하게 살아간다면

파도와 맞서다가 파도에 뒤집어지는 게 아니라

파도를 타고 놀 수가 있죠.

그런 정도의 얘기가 되겠습니다.

 

법화경에 이 말을 하고 마치겠는데

법화경에 보면은

생산에 관한 일체의 법이 불법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뭐냐 하면

세속과 세속을 벗어난 세계의 적용되는 그 이치가 다를 리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우리가 몸을 가진 개인이거나, 기업이거나, 국가거나, 인류 사회가

결국은 성공하고 실패하는

혹은 괴로워하고, 또는 행복해하는 그 사이에

분명한 기준이 있는데

그것이 연기법과 연기법의 결론들을

우리가 내면화해서 생활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삼법인의 성공학

무상, , 무아의 성공학을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