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수심결, 본문을 1장부터 하나씩 배워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삼계의 고통에서 고통 받지 말고, 마음에서 부처를 찾아라. 그대의 육신 안에 있는 그대의 마음이 부처자리다. 이런 간략한 말씀을 같이 읽었고, 또 그것을 가지고 대승보살도의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우리 안에 마음에서 진리를 찾아야 되는지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시간에는요, 이어서 삼계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조금 더 도와드리기 위해서 그림 자료를 가지고 설명 드리고자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 밖에 삼계가 따로 있고,
내가 그 세계로 언젠가 가야 된다.
그 세계를 겪게 된다. 이렇게 이해하지 마시고요,
삼계는 여러분 마음 안에 있습니다.
삼계는 여러분 마음의 차원일 뿐이다.
욕계라는 건요
여러분 마음 안에 욕망에 휘둘리고 있는 차원대일 뿐이고요,
색계라는 건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욕망으로부터 정화된 차원대의 마음,
그리고 무색계라는 건요, 순수한 여러분 마음의 차원 중에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삼계의 차원을 초월하면 법신불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안에. 법신불의 마음 차원대가 존재한다.
자, 이것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리는 그림인데요, 지금 이 그림하고 이 그림하고 달라 보이지만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에고의 마음, 육근의 마음, 육근의 마음을 가지고 보면, 육근의 마음 저 안에 법신불의 마음이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죠. 우리의 자성자리가 있다. 이 자성의 나툼으로 우리 육근이 굴러간다. 이게 대승의 기본 원리입니다. 대승사상의.
그래서 일체유심조, 이것을 한마디로 일체가. 일체는 육근이 일체였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전체는 육근으로 상징됩니다. 육근 외에 여러분이 경험하실 수가 없어요. 이 일체라는 것은 육근이구요, 여러분 마음에 나타난 일체의 이런 작용들은 육근의 작용이구요, 그리고 일체가 사실은 유심, ‘조’는 안 붙여도 됩니다. 일체유심. 오직 마음이더라.
일체가 다 내 마음작용이더라.
이게요, 많은 분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오해하세요.
“그렇지. 세상일은 다 마음먹기 나름이지.” 이 얘기가 아닙니다.
일체유심은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제가
여러분 마음이라는 얘기에요.
여러분 마음으로 보이세요? 여러분 육근의 작용일 뿐입니다. 여러분 육근이 저를 보고, 듣고, 맛보지는 않지만, 그 오감의 정보를 종합해서 “저거는 아무개다. 지금 아무개가 뭐라고 얘기하고 있다.” 다 판단하시는. 여러분 마음 작용이에요.
제가 객관적으로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이 경험하시는 저는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저입니다.
저도 제 마음 안에서 여러분을 만나요. 제 육근의 작용으로 제 마음에 나타난 여러분을 만나는 것이지, 여러분 자체를 만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을 그렇게 만나고 있고요. 이게 일체유심조에요.
내가 경험하는 일체가 지금 내 마음이라고? 예전에는 이런 것을 설명 드리기 힘들었는데, 요즘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 아세요? 눈에 끼면 지금 여기 편하게 앉아계시죠? VR 딱 끼는 순간 여러분 팔다리가 저 히말라야 꼭대기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기합니다.
그런데 일체유심조라는 것은 그런 그 VR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전부는 프로그램된 거죠. 진짜가 아니죠. 그런데 나한테는 꼭 진짜 같죠. 그런데 VR만 그런 게 아니고, 요거 내려놓으시고, “현상계에 나는 돌아왔다. VR, 이제 벗었다.”라고 이해하실지 모르지만, 사실 여러분은 지금
육근이라는 VR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계신 거예요.
여기 팔다리 있죠.
지금 이것도 또한 VR이라고 보시면 어떨까요?
그렇게 보실 수 있을까요? 이것도 내 오감작용이다.
여러분도 내 오감
즉, 내 육근이라는 VR에 나타난 존재들이다 라고.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내가 지금 경험하는 저 존재는
내 마음이라는 VR에 나타나 있다.
이것을 깨치신 거예요.
일체유심조를 깨친다는 건요.
“아,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네.”
알아차리는 법신불, 공적영지라고도 부를게요. 지금 수심결에서는 공적영지라고 부릅니다. 공적영지. 공적영지가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이 육근이요, 내 마음에 나타나요. 따라서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저는요, 객관적인 제가 없다는 게 아니라, 지금 여러분 마음 안에 나타나 있는 저는 여러분이 만들어낸 겁니다. 여러분의 알아차림이 공적영지가 제 오감정보를 가지고 표현해 낸 거예요.
실제로 이것은 뇌과학적으로 봐도
여러분이 보시는 저는
여러분 뇌에서 재구성한 겁니다.
객관적인 제가 여러분 뇌 속에 들어가서
지금 보이시는 이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없어요.
제가 보내는 빛 정보를
여러분 망막이 전기신호로 바꾸어서 뇌로 보내면
뇌에서 그 위치에서
다시 홀로그램처럼 펼쳐서 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실제 VR을 보고 계시 다니까요.
여러분 뇌에서 만들어낸
나쁜 의미의 환상이 아니라 하나의 환상 같은 거예요.
홀로그램같이 만들어서 보고 계신 거예요. 현상계를.
예전 어른들이 이걸 아신 거예요.
이걸 깨달은 것을 일체유심조를 깨쳤다고.
유가 무고, 무가 유로 돌고 도는데,
일체가 내 마음 작용이고,
내 마음의 근원이 우주의 근원이다.
이것을 알아버린 겁니다.
내 마음 안에서
우리가 신을 만나고,
우주를 만나요.
이것을 만난 분들은
그 이후로 살 때
벌써 우주적인 자아로 사시는 거예요.
단순한 개체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이 우주가, 우주의 법신불이
‘나’라는 VR을 지금 보고 있다는 거예요.
법신불이 내 육근이라는 VR을 통해
내 인생이 이렇게 펼쳐지고
다른 존재들도 다 똑같은 우주법신불이
여러분 각각의 육근의 마음작용을 통해서
다양한 우주를 펼쳐서
경험하고 보고 듣고 있더라는 거죠.
사실은 여러분 마음이 한 법계입니다. 불교에서. 불교 용어도 같이 배워보면요, 이것을 법의 세계, 법계라고 합니다. 여러분 마음이 한 법계입니다. 각자가 한 법계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통해 여러분의 우주를 사세요. 여러분 마음 안에 나타난 모든 존재는 여러분 안에서 작용하는 법신불이 펼쳐서 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육근이라는 VR을 통해서. 저도요. 다.
그러면 한 사람의 마음, 마음 하나에 온 우주가 다 표상되고 있죠. 제 마음 안에 안드로메다 우리 은하계, 북극성 다 들어와 있죠. 여러분 마음에도 다 들어와 있죠. 지구부터 온 우주가. 이것을 예전에 불교에서 인드라망의 구슬이라고, 인드라망에 구슬이 있는데, 인드라 신의 그물에 구슬들이 있는데, 이 구슬 하나가 모든 구슬을 또 비추고 있더라 하는 게요, 우리 이게 하나나의 마음이고, 하나하나의 중생심이고, 하나하나의 법계에요. 우리 마음 하나하나에 온 우주가 다 반영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그걸 알아차리고 있어요? 법신불이요. 공적영지가요. 공적영지가 저를 통해서 온 우주를 또 마음에 펼쳐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요 정도 스케일로 사고를 하셔야 되요.
그래서 삼계? 다 내 마음이에요. 온 우주에 삼계가 있다. 내 마음 작용입니다. 그때 내 마음이라는 건 내 개체적인 중생심이 아니라, 중생심의 뿌리인 법신불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그 법신불의 작용으로 인해서 내 마음 또한 삼계를 돌고 도는 겁니다.
내 마음에 그럼 육근의 VR에 뭐가 나타날까요? 욕계에 있는 지금 이 모습이 나타났다가 또 사후에 공부를 했으면 색계로 가 있겠죠. 공부를 안 하면 도로 욕계입니다. 영계지만 욕망에 휘둘리는 욕계에 가서 욕망에 휘둘리세요. 공부를 좀 했더니 색계차원에 가서 또 극락 같은데 태어나서 거기서 봅니다.
그런데 보고 들은 건 어차피 현상계고 거기는 다 중생들 사는 세계에요. 극락이라 하더라도. 깨달은 중생들의 세계죠. 거기서 또 보고 듣다가 또 무색계 차원에서, 몸은 없는데 정신적으로만 작동되는 그런 육근의 체험을 하고, VR의 체험을 또 합니다.
거기서는 육근 중에 오감작용이 그러면 없느냐? 없지 않아요. 무색계도 다 있어요. 생각으로 하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 생각으로 집도 짓고 다 하실 수 있죠? 생각이 원래 모양과 색이 다 있어요. 그래서 몸이 없더라도 생각으로 집을 짓고, 별짓 다 합니다.
그래서 무색계 거기도 정신의 차원에 거기에 맞는 다양한 육근 작용이 있어요. 조금씩 조건은 달라지지만, 소리도요, 지금 소리가 들려야 여러분 마음에서 소리가 들릴 거 같죠. “아무개야.” 어릴 때 욕먹으면 커서도 욕이 들립니다. 어디서. 어디서 드릴까요? 생각이에요. 여러분 생각이 소리도 만들어 내요.
그러니까 여러분, 몸이 없고 무색계에 있다고 해서 육근이 없는 게 아니에요. 육근 작용이. 들릴 거 들리고, 보일거 보이고 다 해요. 재미있죠. 그래서 결국은 우리 사는 세계는 육근으로 다 설명이 됩니다. 삼계라는 건 사실 육근이에요. 육근 작용이 더 맑으냐? 더 탁하냐? 더 정밀하냐? 더 조잡하냐의 차원의 얘기지, 다 육근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삼계 있고, 결국 우리 마음인 이상 전체가 어디서 나왔겠어요? 더 큰마음, 법신불의 마음에서 다 나타납니다. 지금 이게 말로 들으실 때는 판타지소설 같죠. 이게 실상이라는 겁니다. “이게 펙트네. 진짜 그랬네.” 라고 아시면 견성이에요. 진짜 그랬네.
법신불을 만나시면 이 관점이 생깁니다. 자연스럽게. 법신불을 만나면 보여요. 자, 현상계 안에, 육근 안에 살아갈 때는 이게 안 보이죠. 육근으로만 살아갈 때는요, 남이죠. 남이지 어떻게 저게 나에요. 육근을 떠나서 봐야 보입니다. 육근을 떠나서 봐야, “내가 VR끼고 보고 있었구나.”하듯이 진짜 같았는데, 확 빠져서 보고 있었는데, 벗으니까 “VR 안에서 일어났던 거잖아.”
마찬가지로 마음을 벗어놓고 보면 다 마음 안의 이야기에요. 마음을 벗는다는 게 마음을 초월한다는 거죠. 마음을 초월하면 여러분이 어느 차원대에 있겠습니까? 삼계가 아닌 차원대. 삼계 밖에는 부처의 세계밖에 없습니다. 법신불 밖에 없습니다. 삼계만 내려놓으면 여러분은 그냥 자동으로 공적영지 차원대에 계신 겁니다. 그 차원대를 굳이 우리가 말로 해보면 순수하게 알아차리고만 있는 차원대입니다.
그러니까 뭐는 뭐다. 따지고 있는 차원대가 아니라 순수하고 알아차리고 있는 차원대. 여러분 깊은 명상에서요, 삼계 차원을 다 넘어가봅니다. 처음에 욕망, 제가 쓰는 명상기법 아시죠? 모른다. 모르겠다. 판단 중지에 다 들어가 버립니다.
욕망이 일어나도 모른다고 해버리면 욕망이 안 일어나는 차원대로 들어가요. 이게 뭔가 벽을 하나 뚫고 들어가듯이 정신이 툭 들어갑니다. 그럼 그 차원대가면 욕망이 안 일어나요. 그런데 생각감정은 일어나요. 그러니까 욕망이 아주 안 일어나는 건 아니죠. 거친 게 잡힌 거지, 생각도 욕망입니다. 생각도 자꾸 전개하려고 하죠. 자기를. 감정도 계속 그 감정 유지하려는 욕망이 있어요.
따지고 보면 다 욕망인데요, 거친 욕망 육체적 욕망은 벗어났다는 거예요. 좀 더 들어가면 생각감정의 이런 차원대가 있습니다. 더 정화돼 있는데 “이놈들이 끊어지지 않네.”가 있어요. 그래서 또 감정의 차원대를 더 지나가면 순수생각만 있습니다. 생각이 아까 말씀드렸지만 또 집짓고 한단 말이에요.
그 차원대가 욕망, 감정, 이렇게 나눌 수도 있습니다. 생각. 생각까지 넘어가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도 안 일어나요. 존재만 합니다. 여러분. 깊은 선정, 사선정쯤 들어가면 존재만 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알아차리고만 있지 어떤 잡념도 없어요. 그게 공적영지 상태입니다.
그런데 똑같아요. 삼계도 지금 우리 마음 안에 다 구현되고 있듯이 공적영지도 지금 구현되고 있습니다. 공적영지가 작동하지 않으면 여러분 지금 저를 보실 수가 없어요. 육근을 쓸 수가 없어요.
지금 제 얘기를 소리로 듣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거 같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거 같으시죠. 소리나 시각정보를 통해 저를 접하고 계시는 것 같지만, 그것들을 근원에서 알아차리고 있는 여러분의 가장 본체, 여러분이 ‘나’라고 할 때 가장 근원적인 나. 여기도 나고 여기도 납니다. 둘 다 나에요. 나. 나. 남하고 다른 나. 여기는 남과 나를 구분할 수 없는 나 상태가 있어요.
그 ‘나’라는 존재감,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밖에 없는 상태,
그게 공적영지입니다.
그냥 텅 비어 공이 아니라, 공한데 알아차리고 있으니까 공적영지라고 하는 거예요. 영지는요, 신령하게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예요. 허공은 텅 비어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허공은 못 알아차리기 때문에 허공은 참나가 아닙니다.
허공 같은데 알아차리고 있으니까
공적한데 영지 하니까 참나 인 거죠.
지금 저를 보고 계시는 가장 근원,
“누가, 누가 보고 있지?” 라고
의문을 품으시면 최고의 화두입니다.
“누가 보고 있지?”
이게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 뭐꼬에요. “이건 뭐지?”
“이거 뭐지”가요,
눈앞에 있는 게 뭐지가 아니고,
눈앞에 이것을 지금 펼쳐내고 있는,
눈앞에 있는 이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 이건 뭐지? 하는 거예요.
안으로, 이건 뭐지?
그러면 눈 감고
보이고, 들리고 하는 거 다 무시하고 가만히 계셔보면
그 자리가 나오죠.
보고 듣는 주체가 나옵니다.
그게 일심으로 유지하면 바로 나옵니다.
공적영지자리다.
그래서 삼계를 보시더라도 삼계를 알아차리는 자가 삼계를 만들어내는 자입니다. 여러분 마음에서. 오감에서요, 감정_슬프다. 기쁘다. 생각_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는 그 자리, 그럼 이게 뚝 끊어지겠죠. 춥다 배고프다. 기쁘다 슬프다. 맞다 틀리다하는 그 자리로 존재하시면 지금 저를 보고 계시는 제일 밑둥이에요. 저를 보고 계시는 제일 밑바닥에 그 자리가 있어요. 저를 보고 계세요.
그런데 재미있죠. 그럼 그 자리가 그 자리이기도 합니다. “저는 불성이 없는 거 같아요.” 하는 자리도 그 자리입니다. 불성이 없다고 떠드는 그 자리도 불성입니다. 사실은. “참선 어려워요.” 하는 그 자리도 본래 선정인 그 자리입니다. 이렇게 응용해서 생각해 보세요. 다 그 자리입니다.
하루에 하루만 시간 내셔서 계속 그 자리를 찾으시면 만납니다. 제가 도와드린 방법이 몰라에요. 생각이 나건, 감정이 나건 “몰라몰라” 해버리세요. 그러면 생각이 거기서 탁 나오잖아요. 생각이 탁 일어나는데.
자, 기쁘다 할 때 기쁘다에 집착하시는 순간 여기에만 몰입이 되죠. 기쁘다 할 때 기쁘다가 어디서 나왔지? 기쁘다를 놔버리고 몰라 해버리면 기쁘다가 나온 자리가 나와요.
지금 강의 들으시다가 “아, 몸이 좀 불편한데?” 불편한데 하는 걸 내려놓으시고 몰라하고 존재하시면 딱 그 자리에요. 여기구나. 여기서 나왔구나.
지금 마음속으로 본인 이름 불러보세요. 방금 누가 불렀죠? 이름 부르고 난 뒤에 그 자리를 찾아보세요. 그 자리가 법신불자리, 거기서 나왔어요. 다. 생각이 거기서 나와요. 감정이 거기서 나와요. 저를 지금 딱 보고 계세요. 노려보세요. 저를. 딱 보고 계시죠. 지금 이 보는 자리도 거기입니다. 저를 노려보세요. 집중해서 보세요. 눈빛들이 성성하십니다. 눈 감으세요. 그 자리입니다.
뭐가 보고 있었죠? 방금 전까지. 눈떠서 보세요. 보시다가 눈을 딱 감으면 뭐가 있어서 보고 있죠?
보고 있는 데
못 보게 하면
그 자리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 자리가 법신불 자리에요.
보고 있던 자리에요.
보는 자리,
생각이 일으키는 자리,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
이것을 확인하시면
견성이 되는 겁니다.
“여기구나. 여기구나.”
자, 그래서 마음 밖의 세계가 따로 없고, 결국 이 법신불의 작용이라는 건요, 생각감정오감이라는 육근의 작용인데, 이걸 분명히 하자는 겁니다. 이걸 분명히 하자는 거예요.
육근의 작용이라는 건
사실 마음작용이라는 거예요.
눈의 작용이다. 육근이.
그렇게 아시면 안 되고,
보는 마음, 듣는 마음,
요즘 현대과학으로 말하면 뇌작용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뇌라는 건
물질적으로 바라본 정신이구요,
정신문명에서 바라본 정신은
뇌 또한 하드웨어구요,
그 안에 담긴 정신을 담는 그릇일 뿐이고,
그 안에 담긴 정신이 핵이다.
그 정신. 그게 마음이고
그 마음에도 뿌리가 있고
작용이 있더라 하는 겁니다.
요걸 알아내셔야지
이게 정신개벽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에요.
그래서 이 일체가 법신불의 나툼인지, 일체가 참나의 작용인지를 정확히 알고 사셔야 정신문명을 누리는 분입니다. 이걸 못 누리면요, 정신문명이 아니라 물질문명을 누리고 계신 거예요. 물질문명의 변형으로서의 정신문명이에요. 즉, 물질적 차원에서 정신을 음미하고 즐기시는 것으로는요, 정신개벽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 법신불이 드러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삶에.
지금 내 우주에 법신불이 드러났다는 것은 견성했다. 법신불의 뜻대로 산다. 이게요, 글로 배워서 법신불이 “어떤 죄 짓지 마래. 뭐하지 마래. 뭐하지 마래.” 그것을 따르면 법신불 뜻대로 따르는 거 같죠. 그게 예전에 이스라엘에서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십계명. 하나님이 전해진 계율만 열심히 지키고 있었어요. 그분들 대단한 분들입니다.
어떤 부자청년이 예수님한테 영생 얻으려면, 하느님 나라 갈려면, 불교식으로 정토에요. “정토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그러니까 “십계명만 계명만 잘 지키면 돼.” 그런데 뭐라고 했냐하면요, 부자청년이, “그것은 제가 어려서 부터 지키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말 나오는 교인이 드뭅니다. “그건 제가 다 지키고 있는 겁니다.”
왜냐? 성직자들도 못 지키시더라고요. 지키는 것도 대단하죠. 그럼 지키면 될까요? 자, 법신불이 가르쳐준, 법을 지키는 건 대단한 행위에요. 율법이라는 것은 법률은입니다. 법신불이 가르쳐준 법률, 자성에서 나온 법들, 다 그건 옳아요. 옳은데,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래요. “율법 자체는 한 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진리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에요. “율법만 지키면 천국 갈 거 같지? 못 간다.” 요게 화두입니다. 선문답같은 거예요. “율법은 지켜야 한다. 단 율법만 지켜서 못 간다.” 당시 바리세파라고 율법 잘 지키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이런 가르침을 주셨어요.
핵심이 뭘까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면 못 지킨다에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중생심으로 지키고 있다? 그래서는 천국 못 간다. 이 말을 예수님이 정확히 합니다. 부자청년이 “율법 다 지켜요, 계명 다 지켜요.” “그래? 그럼 전 재산 팔아서 가난한 이한테 줘봐.”
이 청년은 율법을 어떤 마음으로 지킨 거죠? 천국가고 싶어서 지키고 있었어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 마음으로 지키고 있었다면,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고 있었다면, 남한테 베풀 수 있어야 되는데, “그래? 그럼 베풀어봐.” 그러니까 못 베푸는 거예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제자가 “그런 식이면 아무도 못가요. 그런 식으로는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인간은 못해. 하나님은 할 수 있어.” 이게 키입니다. 자, 똑같아요. 모든 종교, 철학 똑같아요.
지금 아무리 여러분이 법을 잘 지켜도, 계를 잘 지켜도, 법신불의 마음으로 지킬 때는요, 차원이 달라요. 법신불의 마음으로, 자성의 본래 고요함과 본래 지혜로움, 본래 정의로움을 가지고 현상에서 그 뜻을 펴는 거랑, 그러면 그때는 그게 삼학이 온전한 사막이 되고, 온전한 바라밀이 됩니다.
그런데 법신불은 만난 적이 없어요. 모르겠어요. 지켜야 아무튼 좋은데 간데요. 내가 승급한데요. 지키고만 계시는 거로는요, 초학은 이렇게 접근합니다. 맞는데, 처음에는 이렇게 접근하는 게 맞는데, 계속 그 단계에 머물러 계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법신불하고 소통이 일어나야, 지금 즉각 법신불의 마음으로 이 우주를 본다는 건요,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구나. 알고 바로 펼칩니다. 다르죠. 마음이 다르죠. 그랬을 때 진정한 삼학이 이루어진다.
요것 때문에 견성해야 된다는 얘기를 계속 하는 거예요. 견성을 안 하면 자기가 자유자재로 우주에서 도를 펼 수가 없다. 즉, 남이 시키는 계율을 지킬 수는 있어도 자기 마음 안에서 계율을 찾아서 지키는 단계는 절대 못 들어가요. 요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삼계가 마음이라는 것을 아실 때, 그 마음을 초월할 때, 우리가 일체 세계를 초월해서 부처님 차원대에 들어갈 수 있다 하는 거, 요 말씀 드렸구요.
진도가 좀 더디지만,수심결을 완전히 여러분이 이해하시고 결국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본성을 만날 수 있게 제가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말들이요, 한마디 한마디 안에 비결들이 들어있어요. 마음 닦는 비결들이. 보십시오.
1-2. 불멸의 한 물건.
/그런데 이 육신은 임시적인 것이어서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다.
그러나 참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단절되는 법도 없고 변화되는 법도 없다.
그래서 이르기를 “사람이 죽어 온갖 뼈마디가
모두 무너지고 흩어지면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한 물건은 영원히 신령스러워서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 라고 한 것이다./
불멸의 한 물건. 이런 말씀 드렸어요. 삼계가 결국은 내 안에 있다. 결국 내 몸뚱이 안에 있다. 그런데 근원적으로 몸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 그래서 이 육신에 혹시, 육신 안에 있다. 이것을 내 몸 안에 있다 이게 너의 마음 안에 있다. 이 얘기인데, 혹시 내 몸 안에 있다. 이렇게 오해하실까 그러지 마시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또 불성의 특징을 잘 설명해 주세요. 육신이 그러면 뭔가 있는가 보다. ‘육근이 참나의 작용이다.’ 라고 하면 우리 육근에 뭐가 있나보다. 눈, 귀 코, 입, 혀. 다 몸뚱이죠. 육근이라는 것도 앞에 오근은 몸뚱이죠. 그럼 몸뚱이에 뭐가 있나보다 하실지 모르는데, 몸뚱이를 보자. 그것은 임시적인 거다. 유통기간이 딱 있어요. 100년 전후로 있습니다. 정해진 기간이 있죠.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다. 생멸이 있는 현상계의 존재다. 몸뚱이라는 것은 대의 세계가 아니라 소의 세계, 작은 세계, 생멸이 있는 작은 세계에 임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참 마음은 공적영지입니다. 보조스님은 참 마음이나 공적영지라는 표현을 좋아하세요. 참 마음, 공적영이. 그러니까 참이니까 순수해야 되죠. 그러니까 공적하다고 하는 거고, 마음이기 때문에 알아차립니다. 삼계도 마음 안에 있다 하는 것은 알아차림 안에 존재하는 겁니다. 알아차림에 의해 존재하는 거고, 알아차림이 삼계를 알아차려줘야 삼계가 우리 마음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 겁니다.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허공과 같지 허공은 아닙니다. 허공은 못 알아차리니까요. 여러분, 공간이 알아차릴 수는 없죠. 우리 마음이 허공과 같다 그러면 어떤 공간 같은 것으로, 진공상태 같은 게 아닐까 라고 상상은 하실 수 있지만, 그 상상 자체가 방편으로 도움은 되지만, 진짜 진공은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허공과 같다는 말에도 속으시면 안 되는 게, 허공과 같다는 말만 상상하시고, 여러분 마음 안에서 텅빈 허공을 찾으시면 안 돼요.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가 그냥 허공이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알아차리는 자리는 육근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렸죠. 육근의 작용을 알아차리는 자가 참나니까, 육근하고 또 아주 떨어진 것도 아니에요. 실제로는. 보고 듣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그 육근의 작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데, 뭐가 있어서 내가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슬퍼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알지? 그러면 또 분리가 됩니다만, 작동할 때는 함께 작동하니까 우리가 “꼭 육신에 도가 있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예요. 육근 자체가 도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분리되지도 않지만, 또 섞이지도 않는. 뭔가가 있다. 요것을 잘 찾아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허공과 같다라고 할 때는 육근에서 좀 떠나라고 하는 얘기지, 진짜 허공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단절되는 법도 없고 변화되는 법도 없다. 자, 왜 그러냐? 큰 하나의 대세계에서 쪼개진 소의 세계가 나옵니다. 큰 나에서 작은 나가 나옵니다. 법신불에서 천지만물, 천지 만물은 다 쪼개져 있죠.
지금 여러분이 눈뜨고 보시면 보이는 모두가 소의 세계입니다. 형형색색 다 찢어져 있죠. 각각의 작용을 다 각자대로 하고 있죠. 펜은 펜대로 일하고 있고, 나무는 나무대로, 의자는 의자대로 다 일하고 있죠.
각자 따로 노는데, 그럼 각자 다양한 성질을 가지고 따로 작동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이게 다 각자 자성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만법에 자성이 없다. 이 말은요, 전체가 알아차리는 나의 작용이다 라고 이해해 버리시면 차원이 달라집니다. 갑자기.
소의 세계가 대로부터 나왔구나. 하는 것을 지금 바로 실감하셔야 되요. 지금 눈뜨고 보이시는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기만 하시고 끌려가지 않으시면서. 적당히 몰라 해 주면서, 아주 몰라 하면 시공을 초월해 버리니까, 이 대상을 알아차리면서도 모르겠다. 하고 판단중지만 하시고 알아 치리시다 보면, “요놈과 이게 다 내 마음이고, 요놈과 내 알아차리는 나가 둘이 아니게 굴러가면서 이렇게 펼쳐지고 있구나.”하는 소식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깊은 명상만 중요한 게 아니구요, 현상계랑 만나면서 깨어서 알아차리는 것도 대게 중요합니다. 적절한 판단 중지 속에서 분멸한 하지 말구요, 이게 뭐다. 이게 뭐다. 하지 말고 보이고 들리는 거, 육근 작용을 열어놓고, 육근 작용을 굴러가게 해 놓고, 육근 작용을 알아차리고 계시다보면요, 알아차리면 분리가 일어납니다. 자연스럽게.
분리되면서도 함께 돌아가요. 자, 내가 괴롭다. 감정이죠. 괴롭다. 괴롭다. 강의 듣다보니 힘들다. 힘들다 하시는데, 내가 힘들다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으시면 힘들다는 아닌 거예요. 함께 돌아가는. 힘들다라고 하는 놈을 알아서 일어나고 사라지는데,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자로 존재하시면 육근과 함께 구르면서도 육근과 분리되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육근은 생멸인데 요놈은 알아차리고. 이 자리는 절대 단절되는 법도 없고 변화되는 것도 없구나.” 이것도 아실 수 있어요. 육근하고 함께 공부하는. 육근 버려 볼께요. 육근 일체를 모르겠다. 몰라를 세게 써서요, 일체를 언어명상을 다 놔버리고 눈감고 정신만 붙잡고 계시면 알아차리고만 있어요. 그때도 한번 실험해 보세요. 이 자리가 변하나? 변하는 자리인가? 끊어짐이 있는 자리인가?
사실은요, 여러분, 알아차리고만 계시면요, 육근작용을 모른다하고 알아차리고만 계시면 여러분 나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거기 영원한 자리라서 항상 그 자리이기 때문에 여러분 10대 때도 그 자리였고, 지금도 그 자리에요.
그러니까 눈 감고 ‘모른다’ 하고
공적영지만 느끼고 계시면
사실 나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눈떠야 나이가 보여요.
눈떠야 내가 늙었네. 나이가 들었네. 남자였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거기는 알 수가 없어요. 공적영지인 상태에서는 남녀도, 어떤 대상도, 어떤 형상도 있을 수가 없어요. 알아차리고만 있어요. 그러니까 허공과 같다고 하는 겁니다. 육근의 전혀 물들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실험을 통해서 참나는 변치 않는 물건이구나. 죽는 물건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 내냐 하면요, 육근의 속성은 변화하는 자리이고, 태어나서 죽는 자리인데, 육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내시고 나면,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이 차원은 생멸의 차원하고 다른 차원이구나.” 라고 아시면, 단절되는 법도 없고, 변화되는 법도 없다. 이 얘기는 생멸이 없구나하는 것을 아시게 됩니다.
여러분이 영적 실험을 통해서 알아내실 수밖에 없어요. 이것을 남의 말 듣고 믿으신 것은 사상누각이라, 누가 강력하게 아니라고 하면 흔들려요. “그런가?” 또 저쪽 가서 “그렇다” 그러면 “그런가?” 당신은 원래 부처님이고 부처님은 불생불멸합니다. 그러면 “내가 안 죽는다고? 좋네.” 하고 있다가, 집에 가면 “썩어죽을 몸 가지고 뭐 그래?” 그러면 “그런가?” 이게 일반적입니다. 그때 그때 기분 따라 변하시는데, 견성을 딱 하시면요, 안 흔들려요.
당신이 말하는 것은
육근 작용의 마음을 말하는 거고
변치 않는 자리는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지금 내 안에서 난 알아차리고 있다.
알아차리고 있는 이 자리는 안 변해.
요거 자각하시면 돈오입니다.
돈오의 체험이 오신 거예요.
딱, 그 실감나는 펙트, 체험과 정확한 개념이해,
이 두 개가 합쳐지면 돈오에요.
돈오는 정혜가 함께 갑니다. 정혜쌍수라고 하는 게 선정만으로는 돈오 못해요. 선정과 정확한 이해가 합쳐지면 돈오고 깨달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아” 그때 깨달음의 내용은 이겁니다. 일체가 유심이네.
선정을 통해서 참나 상태에 들어가서 현상계를 바라보시면 지혜가 나옵니다. “오, 다 참나 작용이네. 육근이 나랑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함께 있으면서 물들지 않는 그런 관계였네. 참나의 나툼이면서 또 참나랑은 다르네. 그런데도 참나에서 나왔네. 이게 정확하게 보이셔야 되요. 두 개가 속성이 다르면서.
“유와 무가 다르면서도 함께 굴러가네.” 딱 보이셔야 되요. 그러면 뭐가 될까요? 함께 굴러간다는, 이 전체가 실상인 거예요. 법신불의 본체만 실성이 아니구요, 전체가 우주의 진리인 거예요. 불생불멸하면서 한편으로는 생장수장을 거치는 게 진리라는 거예요.
“아, 진리는 불생불멸하구나. 그러면서 끝없이 우주를 낳고, 부수고 하는구나.” 전체가 진리구나하고 큰 진리, 그래서 법계라고 하는 겁니다. 큰 진리를 내 마음에서, “내 마음이 하나의 진리의 세계였구나.” 하는 것을 그대로 아시는 거예요.
“중생의 탐진치 뿐인 줄 알았는데 내가. 내 안에 이런 게 있었구나.”하는 것을 깨달으시면 돈오, 확실히 하시는 겁니다. 이 법대로 사시면 성불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진리를 정확히 아십니다. 견성을 하면.
그래서 단절되는 법도 없고 변화되는 법도 없다. 이 참마음은. 이것을 깨달으시면 돈오구요. 그래서 이르기를 예전어른들이 뭐라고 했냐? 사람이 죽어 온갖 뼈마디가 모두 무너지고 흩어지면, 죽어서 뼈도 다 부서지죠. 그럼 어디로 돌아갑니까? 열기는 불로 돌아가고, 여러분 몸 안에 있는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각자 자기 자리 찾아간다는 거예요.
흙은 땅으로 돌아가고, 여러분 안에 있는 바람의 요소는 바람으로 돌아가고, 불의 요소는 불로 돌아가고, 물의 요소는 액체가 되어서 물로 돌아가더라. 그런데 지수화풍이 다 자연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 물건이 있는데, 이 참마음만은 영원히 신령스러워서, 여긴 차원이 다르니까, 생겨난 적이 없기 때문에 소멸된 적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는 영원히 알아차리고만 있는 자리에요. 현상계 안에서 안 보여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현상계가 다 그 자리로 인해서 굴러가고 있어요. 그 자리에서 나온 진리대로 굴러가고 있어요. 이게 신비입니다. 법신불이 이래라 저래라 안하는데, 우주는 법신불을 북극성으로 해서 돌고 있어요. 예전 어른들이 북극성을 가지고 많이 설명한 이유가, 북극성 본체는 안 움직이죠. 그런데 옆에 있는 별들이 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죠.
법신불이 뭘 하는 거 같지가 않아요. 현상계에서 볼 때는. 현상계에서 볼 때 얘깁니다. 안 보여요 작용이. 그런데 천지만물이 다 법신불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지금 여러분도 생각감정오감으로만 살아가는 것 같아요.
참나는 안 보여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알아차리는 나로 인해서
생각감정오감이 존재했던 거예요.
그리고 생각감정오감이 일어나고 사라지면
어떤 생각은 선한 생각이고, 어떤 생각은 악한 생각이 되어서
인과응보가 정확히 펼쳐지는지
모두 이 알아차리는 참나에 의해서 집행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모르고 살았던 거죠.
요런 정도의 지금 깨달음이 확고하게 나타나야 돈오라고 합니다.
첫 체험이라 하더라도, 잠깐의 체험이라 하더라도 이런 진리가 통으로 옵니다. 그리고 이게 안착이 되면 그 안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요, 이런 진리를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아요. 기억해서 품는 게 아니라. 자, 여러분 제가 중력의 법칙을 기억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힘들까요. 이런데 가서 서면 안 되는데. 기억 못하면 서겠죠. 벼랑에 서 있겠죠. 벼랑에서 한번 다리도 내밀어 보겠죠.
“이게 떨어진다고 했던가? 내가 교과서에서 배워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중력이 있다고 했던가? 없다고 했던가?” 하면서 발 내밀어봅니다. 떨어지면 죽죠. 그런데 우리 그런 얘기는 한번 들으면 몸에 딱 각인이 되요. 아마 술 드셔도 근처 가다가 벼랑에서는 조심해서 걸어가실 겁니다. 휘청휘청 하다가. 예전 TV보니까 개그내용인데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막 술 취해서 소리 지르고 가다가 깡패 앞에서는 조심해서 갑니다. 또 지가가면 막 소리 질러요. 알아요. 본능적으로. “이걸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죠.
자, 우리가 이런 일체유심조의 도리, 만법이 내 참나의 작용이라는 도리를요, 늘 기억해서 아시고 있는 단계는 인간적인 지혜이지, 자성의 지혜는 아닙니다.
견성을 하시고 나면요, 본능적으로 알게 되요. 그 얘기를. 직관으로. 그런데 그게 처음에는 선정이 짧으니까 고 지혜도 금방 날아가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딱 들어앉았다는 것은
견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건요,
늘 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뭔 일이 생기면 금방
일체가 참나의 작용이지 하고, 처리해 버립니다.
자동으로 탁 튀어나와요. 상황이 되면 튀어나와요.
여러분이 벼랑가에 가까이 갈수록 경고가 오죠. “떨어진다. 떨어진다.” 경고가 오듯이, 여러분이 뭔가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해도 경고가 옵니다. 내면에서. 이미 알아 버렸기 때문에.
지금 법공, 법공, 만법이 공하다가 이게 불교에서는 법공사상이라고 그래요. 만법이 공함. 만법은 참나의 작용. “너무 집착하고 있음. 너무 집착하고 있음.” 이게 벼랑에 가까이 가는 것처럼 신호가 와요. 조심하라고. “삼학으로 해결할 것. 삼학으로 해결 할 것.” 이게 옵니다. 견성을 해 놓으면 성불이 보인다는 게 견성이 성불은 아니지만, 견성을 해 놓으면 어떻게 하면 부처되는지 자기가 알아요.
“내면에서 오는 명령만 따르고 살면 부처되겠구나.” 공부가 수월해지죠. 그러면 그때부터는 성불이 보이는 거죠. 견성을 해야 성불이 보입니다, 그래서. 견성 전에는 열심히 공은 들이는데 소통이 안 되니까, 자기 안에서, 자기가 기억해야만 알지 잠깐 정신 놓으면 경계에 끌려가고 있는 거죠. 내면에서 법신불이 여러분을 인도해주는 힘이 약하다. 내공부가 약해서 그렇게 된 거죠.
법신불이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은혜를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은혜는 넘치게 주는데, 우리 그릇이 작아서 못 받아먹는 겁니다. 그런데 견성을 하면 그릇이 커지는 거예요. 평소에 못 받아먹던 것까지 받아먹게 되요. 소화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소식이 내 얘기가 되요. 이게 지금 남 얘기죠. 글로 배울 때는 남 얘긴데, 이게 본인 얘기이신 분들도 여기 계실 거예요. “그렇지.”하게 됩니다. “저렇지”
한 마음은 영원히 신령스러워서, 이 자리는 차원이 다르지. 생멸의 세계가 아니라 대의 세계, 위대한 진리의 세계거든. 이렇게 여러분이 이해하시게 됩니다, 스스로. 이 얘기까지 이해하시면. 예전 어른들 말씀을 참으로 좋은데 이런 얘기를 꼭 해요.
하늘을 돕고 땅을 덮는다. 그 자리가. 여기서 또 따라가기 힘들거든요. 천지를 그 자리가 덮는다. 그러면요, “아, 저건 또 뭔 소리야?” 뭔 얘기일까요? 아까 제가 다 얘기 드렸는데. 천지를 여러분이 만드셨다는 거 아시겠어요? 지금? 여러분 눈에 보이는 천지는 여러분 참나의 작용입니다. 그 얘기를 해 놓은 거예요. 엄청 친절하신 거예요.
여기까지만 이해해서는 안 돼. 그 자리가 참 신령스러워. 그러면 뭐라고 할까요? “아, 그 자리 들어가서 영원히 살아야지. 열반에 들어야지.” 그럴까봐 거기서 우주가 나왔지. 이 얘기를 꼭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도 기어 나와. 열반에 들어앉아 있지 말고 기어 나와. 천지를 나투는 자리를 얻었는데 왜 천지를 두려워하죠? 숲에 가서 숨어 있죠? 좀 이상하지 않아요? 천지가 나로부터 나왔느니라 하는 분이 왜 숲에 가서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자.”하고 있을까요? 말이 안 되죠.
지금 밖에 나가서 하늘을 한번 보시구요, 저 하늘도 알아차리는 나로 인해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해 보세요. 그래야 이 한 물건이 천지를 덮는 자리구나. 하는 것을 아실 수 있어요. 요 글로 읽은 내용이 여러분 마음에서 그대로 실감나게 구현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요 그림을 꼭 기억해 두시면 여러분이 마음자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실 거예요. 과거와 현재, 저 자리에는 단절이 없고 끊어짐이 없다는 것을 좀 보여드리려고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변하죠. 자, 마음과 몸을 뭐라고 합니까? 육근이요. 육근.
몸뚱이가 하는 오감의 작용과, 마음이 하는 생각감정, 저는 생각감정오감 육근을 이렇게 부릅니다. 제식으로. 생각감정오감 그러면 우주의 3차원, 생각의 차원, 감정의 차원, 오감의 차원을 설명하기도 좋고, 생각감정은 의근이고, 오감은 육근 중에 오근에 해당되니까, 합치면 육근이 되죠.
자, 육근은 변합니다. 몸과 마음은 변해요. 그런데 마음 중에 안변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게 참마음이죠. 참마음. 그래서 그 참마음이 납니다, 사실은.
여러분,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공적영지에요.
우리가 어제랑 나랑을 비교할 때 보세요. 과거와 현재, 어제와 나를 비교해 볼게요. 어제의 몸과 마음, 오늘이 몸과 마음, 다르죠. 어제의 육근 작용과 오늘의 육근작용은 다르죠. 1시간 전의 육근 작용과 지금의 육근 작용은 다르죠. 계속해서 오감 작용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잖아요. 변하면서. 생각감정도 계속 변하고 계시잖아요. 무상합니다.
그런데 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다고 생각하실까요?
다 바뀌고 있는데. 실제 우리 세포도 바뀌고 있는데.
생각도 바뀌고, 세포도 바뀌고, 오감도 바뀌고 다 바뀌고 있는데,
우리는 어제의 나를 당당히 나라고 생각합니다.
왜? 저게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라는 존재감, 공적영지가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천지만물이 나의 작용이다. 이 말까지는 몰라도요,
‘나’라는 존재가 수많은 육근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나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시는 거예요.
이것을 에고나 작은 나의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시고 비방하는 분이 있더라고요. ‘나’라는 존재 그것도 에고 아니야? 에고 아닙니다. 여러분 알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안에 법신불이 시공과 육근을 나투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육근이 바뀌어도 내 존재가 바뀌었다고 생각 안하시는 거예요.
뿌리는 하나라고 생각하시니까 옷만 바뀌었지, 내 몸이 통일하면 옷을 바꿔 입어도 같은 사람이죠. 마찬가지로 육근은 계속 바뀌는데 “나는 나야.” 라는 게 있습니다. 저게 대게 중요한 힌트에요.
변치 않는 나
텅 빈 알아차림
‘나’라는 존재감.
요 단어들을 여러분이 실감나게 느껴보시면
일생을 통해 불변하는 참나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수심결은 계속해서 여러분을 견성으로 유도할 겁니다. 어디까지 버티시나 보겠습니다. 지금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계속해서 여러분의 참나를 직시하게 도와줄 겁니다. 이 수심결 강의 전체가. 이 강의만 들으셔도 계속해서 ‘이 뭐꼬’ 라는 화두를 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은. ‘난 누구지? 난 누구지?’ 관심이 다른 데로 못 나가게, 계속해서 이 경의 말씀들을 여러분 번뇌 망상을 치고 본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계속 주문할 거예요.
정리하고 갈까요? 수심결 진도 나가기 전에 정리하고 가면 좋겠습니다. 참나와 에고를 정리해보겠습니다. 가운데가 참나, 바깥의 원이 에고입니다. 참나는 불변하는 자리, 에고는 만변하는 자리.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는데, 요 참나와 에고를 정확히 이해 못하면 견성했다고 못해요.
견성은 참나를 알았다는 거거든요. 에고는 여러분이 알고 사는 여러분의 현재의 의식입니다. 에고도 나죠. 참나도 나에요. 에고를 ‘가짜 나’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가짜 나’라고는 안 부릅니다. 참나의 작용으로서의 나죠. 법신불의 은혜로 이루어진 나를 ‘가짜 나’라고 하면 그렇잖아요. 나는 나인데, ‘덜 참나’죠. 덜 참나.
그래서 ‘참나’와 ‘덜 참나’로 구분하시는 게 좋다. 이것을 ‘거짓 나’라고 표현하다보면 참 거짓, 이름은 편안한데, 거짓은 부정해야 되요. 그럼 에고를 부정해야 되면 ‘거짓 나’라고 해버리면 우리는 소승을 지향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언어 하나도 신경 써서 쓰시면 좋겠다. 참나와 에고. 어떤 분이 왜 참나니, 에고니, 이거 우리 말 아닌 거 같은데 에고라는 말 쓰세요? 하면 사실 둘 다 나에요. 우리말로. 나 나. 나. 그냥 나입니다. 큰 나, 작은 나 이래도 되고 나에요. 그냥 나라서 구분해주려고 제가 이렇게 썼습니다만 방편이구요,
에고는요, 조건에 제약된 나구요. 시공간 안에. 자, 뭐가 에고냐? 여러분 태어난 적 있으시죠. 그럼 그 에고가 말하는 겁니다. 에고는 태어난 적이 있어요. 소멸된 시간도 올 거구요, 그 안에서 에고는 아와 비아의 투쟁, 나와 남의 끝없는 투쟁 속에 살아갑니다. 나와 타자들이 있어요. 나 아닌 존재. 그럼 그 나는 제약된 나에요.
참나는요, 반대겠죠. 시공을 넘어서 있구요, 나와 남의 구분도 넘어서 있어요. 그냥 나에요. 시공을 초월한 나에요. 그래서 한번 구별해 볼게요.
에고는 참나의 시공내의 나툼이다. 그런데 법신불은 왜 이런 중생심을 만드셨을까요? 법신불의 왜 은덕으로 이 중생심이 펼쳐졌을까요?
법신불은 중생심이 있어야
현상계에서 육바라밀과 삼학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공덕을 구현할 수가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를 펼칠 수가 있습니다.
이 현상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셔야 되요.
법신불 안에 아무리 진리 덩어리가 있어도 밖으로 구현해야 더 맛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되요. 왜 법신불은 대의 세계는 소의 세계, 작은 세계를 필요로 했을까? 왜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까? 왜 돌까? 필요하니까요. 꼭 필요하니까요.
여러분 법신불의 불성 안에, 자성 안에, 삼학육바라밀의 그 종자는 들어있습니다. 정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여러분은 갖고 계세요. 자성의 선정과 지혜와 계행을 다 갖고 계세요. 그런데 밖으로 펼쳐보라는 겁니다. 밖이 있어야 펼져 보죠. 나와 남. 시공을 무대로 해서 나와 남이 굴러가면서 인연을 맺죠.
인연을요, 우주는 만들어내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런 게 아니고, 신묘한 작용으로 그 은혜를 펼쳐내요. 그래서 도가 있으면, 길이 있으면 덕도 필요한 겁니다. 길이 있으면 길을 실제로 걸으면서 은덕을 베푸는 작용도 필요하기 때문에, 도와 덕이 함께 가기 위해서 이 참나의 세계는 에고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에고의 세계를 없으면 사랑을 어디서 맛봅니까? 참나 안에 있는 사람과 또 달라요, 맛이. 여러분, 참나 안에서는 우주적 사랑을 맛볼 수 있는데요, 부모님이 여러분 밥한 끼 먹이는 그 사랑은 또 맛이 다르죠. 그럼 현상계는 이 참나와 그럼 둘이냐? 둘도 아니에요. 법신불이 작용했을 때 진짜 사랑이 현상계에서 펼쳐집니다.
여러분은 현상계 안에서 구체적인, 개별구체적인 진리를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거라는 거죠. 그래서 에고는 참나의 시공내의 아바타다. 화신이다. 여러분이 법신불의 화신입니다. 법신불의 화신이 석가모니불이시다. 절에 가면 새겨져 있습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석가모니의 법신은 비로자나불이다. 우리의 법신도 비로자나불이에요. 그 석가모니 마음 안에서 작용하던 법신은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다. 우리 안에서 지금 은덕을 베푸는 법신을 노사나불이라고 그래요.
법신 자체는 비로자나불이고요,
법신이 우리 안에서, 특히 한 개인한테,
한 개체한테 은덕을 베풀 때는 노사나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은덕이 보면 원만하거든요. 그래서 원만보신노사나불, 비로자나와 노사나는 같은 자리입니다. 비라는 강조어가 붙고 안 붙고에요. 우리말로 다 빛이라는 소리입니다. 빛. 광명한 빛. 그래서 한자로 비로자불을 법신불을 한자로 할 때, 예전에 밀교에서 대일여래라고 그래요. 위대한 태양빛의 여래.
그래서 광명한, 우주에 있는 빛이 법신불이고,
우리 안에서 나한테 따사롭게 그 빛을 비출 때 노사나불이라고 하고,
내가 그 빛을 현실에서 구현할 때 내가 화신이 되는 거죠.
천백억화신. 온 우주를 돌아다니는 화신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육신 가지셨으니까 화신이 되셔야 되요.
그래서 자, 이 육근작용을 내가 현상계에서 구현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자부심을 가지고 좀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난 법신불의 아바타이자. 화신이다. 분신이다.
에고는 참나를 깨달아야 한다. 돈오를 해야 한다. 에고는 참나의 뜻을 구현해야 된다. 육바라밀 삼학이 아니면 현상계를 진리의 세계로 만들 수 없고, 법신불의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 그런데 참나랑 본래 둘이 아니다. 이게 불교에서 진속불이입니다. 니르바나의 세계와 현상계는 둘이 아니다. 둘로 보지 마시라.
그래서 좋은 비유가 에고의 생각감정오감의 작용은 참나라는 바다 위의 파도다. 바다와 파도는 둘이 아니다. 하나다. 그래서 에고는 참나와 하나가 될 때 온전히 정화되어서 법신불의 화현이 될 수 있다.
자, 이렇게 한번 정리하고 앞으로 수심결 공부를 나가시면 왜 견성을 해야 되는지, 확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접근하시되
견성이 결국 별게 아니라
나의 본래 모습을 아는 것뿐이다.
나의 현존, 나라는 존재감
생각감정 오감의, 육근에 물들지 않는 나 자리를 찾으시면
거기가 법신불 자리다.
육근이 일체입니다. 육근 이외에는 법신불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육근의 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모른다. 모른다하고 버텨보세요. 끌려가지 말아 보세요. 존재해 보세요. 그러면 육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데 나는 존재하는 체험이 옵니다.
그때가 일심의 극치이고, 공적영지를 오롯이 체험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 수심결 강의가 여러분 내면의 법신불을 곧 바로 보고 소통할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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