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우리 내면에 있는 불성, 밖에서 구할 수 없는, 오직 우리 안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그 불성에 대한 이야기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자, 먼저 3_2 밖에서 구하지 말라. 다 지금 같은 얘기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 마다 읽을 때마다 이 글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이 글을 통해
이 글을 바라보고 있는 자,
글을 알아차리고 있는 나 자신에 몰입하실 수 있으면,
이 글을 읽은 것 자체도 그대로 선이 됩니다.
선은
그 순간
자기 내면을 돌아보게 하면
선입니다.
실제로 석가모니께서 견도하시고, 5비구를 처음 제자로 둡니다. 이 스토리가 재미있는데요, 5비구를 둘 때, 앉아서 명상에 깊이 몰입하라. 이런 지도 안합니다. 앉혀놓고 계속 얘기를 합니다, 진리를.
자명한 진리를 계속 얘기함으로서 그 진리에 대한 몰입, 그 진리의 설명에 대한 몰입을 유도하면서 계속. 그 내용이
육근을 내려놔라.
육근을 초월해서 열반에 들어가라.
참나를 초기 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하죠.
열반으로 들어가라.
번뇌 없는 그 자리로 들어가라.
현상계는 무상 고 무아다.
번뇌 없는 그 자리로 들어가라.
이 얘기를 조곤조건 계속 얘기해 주신 거예요. 그 5비구가 참선을 해서가 아니라 몰입해서 듣고 있다가 그 말을 그대로 따라가다가 현상계가 무상 고 무아라는 것을 실감하고 탁 내려놓는 순간 선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 선을 통해서 견도를 합니다. 그래서 그 5비구가 설명만 듣다가 5명이 다 아라한이 됩니다.
요 얘기가 시사 하는 바가 커요. 지금 이 글 하나도 읽으시면서
“음, 좋은 말인데, 나중에 선정이 잘되면 그때 참고하겠어.” 이러시면 안 돼요. 이 얘기를 몰입해서 들으실 때, 참나를 불성을 밖에서 구하지 마라해서 더 이상 밖에서 구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으시는 순간 견성하실 수도 있다는 거 아셔야 되요. 먼 얘기가 아닙니다.
그게 이미 선이에요.
일심이 선이에요.
일심으로 부처님 말을 듣는 게 선이에요.
지금 이런 진리의 말씀도 일심으로 들으시면 그게 정신수양이 되고, 이 안에서 사리가 와 닿으면 끝나는 겁니다. “아”하고 바로 여러분이 진리를 직관하실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정혜쌍수입니다. 선정과 지혜가 함께 가면 여러분은 견성하실 수가 있어요.
견성의 비결은 미리 제가 수심결의 내용을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견성의 비결은요, 우리 안에 있는 공적영지는요, 육근의 마음, 오온의 마음,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육근과 오온의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 이 마음 쓰는 건 하나입니다. 일심. 제가 몰입이라고 하는 일심. 몰입. 몰입이 답입니다.
밖으로 몰입해도 사실은, 밖으로 몰입을 해도요 대상에 대해 몰입을 해도 일심으로 몰입하시면 사실은 우리 내면에 있는 공적영지가 드러납니다. 왜?
뭔가에 몰입했을 때, 잡념이 줄어들거든요.
잡념이 줄어든 만큼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신성이 불성이 느껴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바로 자신한테 몰입하면
가장 쉽게 효과적으로 우리는 불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게 일심인데요,
즉 밖으로 그 초기 비구들은 그랬던 거죠. 밖으로 부처님 말씀에 일심으로 들었던 겁니다. 일심으로 듣다보니까 마음이 자꾸 잔잔해지죠. 할 말이 없어지죠. 자명한 얘기를 자꾸 듣고 있으면 할 말이 없어져요. 할 말이 없어질 때 자기 내면에 몰입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결국 밖으로 대상에 대한 몰입도 중요한 어떤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대표적인 게 호흡에 대한 몰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평생 몰입하셨던 게 호흡입니다. 자신의 호흡. ‘죽을 때 마지막 숨도 알아차려라.’ 라고 지도하셨을 정도로 호흡에 대한 몰입을 강조하셨어요.
호흡, 그러면 호흡만, 우리가 하면 되느냐? 호흡에 대해 몰입하는 중에 천지사방으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셨던 거죠. 호흡이라는 방편으로. 호흡이라는 주제로 모은 다음 어쩌셨겠어요? 그 호흡을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들어갑니다.
즉, 대상에 대한 몰입도 활용하셔서 밖을 향하는, 오온 육근으로 하는 몰입이 우리가 하기 쉽습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몰입. 꼭 나쁜 게 아니에요. 대상에 대한 몰입을 활용하시되 마지막에는 나 자신에 대한 몰입으로 마무리를 지으시면 효과적인 선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 선사들이 많이 하시죠. 아미타불에 몰입하라. 나무아미타불에 몰입하는 걸 권장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렇게 얘기해요.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라.
결국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한 가지 대상에 몰입을 함으로서
우리가 일심이 만들어지고 잡념이 사라졌을 때,
그때가 딱 좋은 상태인 거예요.
“그때, 그 일에 몰입하고 있는, 그 대상에 몰입하고 있는
그대 자신을 찾아봐라.” 하면
우리가 아주 효과적으로 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 얘기두요, 이 한 구절, 한 구절에 몰입해서 들으시고, 다른 생각이 사라지고, 시간 공간도 잊혀지면서 이 진리에 몰입하고 푹 빠지셨을 때,
“이 진리에 몰입하고 있는 나는 누구지?” 라는
“이 육근을 이렇게 몰입해서 쓰고 있는 나는 누구지?” 라고 돌아보시면
누구나 쉽게 견성하실 수 있다고 팁을 드리는 겁니다. 실전 팁. 이 강의를 활용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구하지 말라.’ 요 주제로 한 번 더 말씀 드려볼게요.
/과거에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이 마음 밝히신 분들일 뿐이며/
부처님이 밖에서 신통한 거 찾으신 게 아니다. 우리 안에서 이 마음, 알아차리는 마음, 공적영지의 마음을 찾았을 뿐이다. 요 얘기 하고요.
/현재의 여러 성현들도 또한 이 마음을 닦는 사람들일 뿐이다. /
현재의 성인이 있다면 이 마음 잘 아는 분이 성인이다. 육근만 알고 밖으로만 쫓아가는 게 아니라 육근의 주체를 잘 알고, 육근을 쓰는 사람들이 성인이다. 육근의 주체자리에 가면요, 자, 요거 꼭 아셔야 됩니다.
육근과 오온은 쓰면 쓸수록 더 잘 써요.
우리가 삼학과 육바라밀을 가지고 닦는 것도 이 육근과 오온의 세계입니다. 일심을 유지하느냐? 안 하느냐? 베푸느냐? 안 베푸느냐? 지계_진리를 실천하느냐? 안 하느냐? 선업을 짓느냐? 악업을 짓느냐? 이 모두 육근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삼학 육바라밀을 가지고 닦는 건 육근과 오온의 세계인데요, 결국 이 닦음을 통해서 알아야 되는 것은 육근을 넘어선 본래의 공적영지입니다. 이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 자리를 찾아낸 뒤에 삼학 육바라밀은 이제 탄력받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 삼학 육바라밀은 사실 흉내 내기였던 거예요.
불성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불성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던 거고, 이제 삼학 육바라밀이 견성과 함께 만나게 되면 공적영지에서 삼학과 육바라밀을 끌어내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 전하고 달라요. 육근이 쌩으로 선정을 하는 게 아니라, 참나가 원래 고요하니까 참나랑 주파수만 맞추면 에고도 육근도 고요해 지는 겁니다.
참나는 원래 남을 사랑하니까 참나랑 주파수만 맞추면 공명하게 되면 어떻게 되죠? 육근도 갑자기, 이기적인 육근이, 탐진치만 추구하던 육근이 갑자기 참나랑 공명하게 되면 남 생각을 하게 되고, 남한테 베풀고 싶어지게 되고, 남한테 피해를 주기 싫어집니다.
그러니까 이게 전혀 방법이 달라지는 겁니다. 돈오를 하게 되면요, 점수의 방법이 달라져요. 그 전에 점수는 본인 혼자서 어려운 싸움을 해야 되요. 베풀기 싫은 나 자신의 이기심하고 싸우면서 베풀어야 된다는 계율을 강조하고, 명분을 강조하고, 어떻게든 베풀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견성을 하게 되면요, 경계를 만났을 때 참나, 정신수양을 통해, 정신_원래의 순수한 참나 초의식이 정신입니다. 정신을 수양한다는 건 마음을 막연하게 수양하는 게 아니라 정신수양에 답이 있어요. 원불교에서 말하는 정신이라는 건 이미 또렷한 순수의식 참나를 말합니다.
정신을 수양하라는 건
내 마음 안에 점을 하나 찍는 겁니다.
늘 깨어있는 참나 자리를 또렷하게 드러나게 하면
일심을 통해 나 자신에 몰입하는 게 정신수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안에서 삼학 육바라밀이 터져 나옵니다.
진리를 판단하고 그 안에서 베풀고 싶고, 그 안에서 남한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그 실천력과 지혜가 쏟아져 나옵니다.
거기에 육근이 공명해주기만 하면 삼학과 육바라밀이 현실화 됩니다. 이런 식으로 닦아가는, 그것도 분명히 닦음입니다. 분명히 업을 짓는 건데도 그 전에 참나를 모르고 살 때 업 짓는 거랑 다릅니다. 요 얘기만 미리 해드릴게요. 이것을 보조스님이 아주 멋지게 말씀하세요.
요게 수는 수인데, 견성한 이후의 닦음은요, 분명히 에고의 닦음이죠. 닦음이라는 의미에서는 견성하기 전에 하던 닦음하고 비슷해 보이지만, ‘닦음 없는 닦음’이라고 합니다. 뭔 말일까요? 닦기는 닦는데 이상한 닦음이라는 거예요.
자, 그전에 육근에서 닦을 때는요, 삼학 육바라밀을 안 되던 걸 되게 만드는 닦음이었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닦은 만큼 그게 나아지고, 내가 고생해서 만든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불성을 만난 뒤에의 삼학 육바라밀은요,
에고가 육근이 닦지만 결국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고
불성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에요. 그래서 닦음 없는 닦음입니다.
육근이 열심히 노력해서 닦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은 불성을 드러낼 뿐인 닦음.
태양이 밖에 있구요, 창문이 시커먼 때로 가득찼다고 보면요, 여러분이 창문을 닦아야 됩니다. 닦음은 닦음이죠. 햇빛은 여러분이 만든 게 아니죠. 이 시커먼 창문의 때를 벗길수록 태양빛이 들어옵니다. 이게 닦음 없는 닦음입니다. 내 방을 환하게 만든 건 맞는데, 나는 창문을 닦았을 뿐이거든요. 그 빛은요? 태양이 원래 대준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에고의 업장을 덜어낼 뿐인데, 참나의 지혜덕상이 그 자리를 채워줍니다. 이럴 때는 닦음 없는 닦음이라고 합니다. 내덕이 아닌 거예요. 내가 분명히 고생한 건 맞는데, 진리에 협조했을 뿐이지, 법신불을 도왔을 뿐이지 법신불이 하신 일이거든요.
법신불의 은덕이 한 일을
내 덕이라고 할 수는 없죠.
그러니까 회향하는 겁니다.
이건 내가 도운 건 맞지만
일은 법신불이 하신 거다.
이게 불교식 올바른 회향이고,
이게 닦음 없는 닦음을 아는 사람이에요.
즉, 돈오를 하지 않으면, 견성을 하지 않으면 이 닦음 없는 닦음의 맛을 모르게 됩니다. 다 내가 한 게 되요. 진정한 회향의 맛을 모릅니다. 왜? 불성을 모르니까. 어디다 공을 돌려야 될지 모르고 하는 것은 회향도 흉내내는 회향이지, 진짜 회향은요, 불성자리를 정확히 알고, 거기서 은덕이 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감사해야하는 게 진짜 회향이에요. 요 회향 맛보신다. 그러면 이미 견성하신 분이에요.
견성이 아니고는 밖에서 정한 룰을 따를 뿐이지, 자기 내면에 마음에 있는 룰, 이게 심계입니다. 마음 안에 룰이 있어요. ‘삼학 육바라밀 지켜라’하는 게 우리 마음의 계율입니다. 이 계율을 자기 마음에서 답을 찾아서 따르는 경지, 이건 견성하셔야 됩니다. 견성 전에는 이런 능력을 쓸 수가 없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이 ‘마음’을 밝히신 분들일 뿐이며
현재의 여러 성현들도 또한 이 ‘마음’을 닦은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과거 부처님, 현재 부처님, 다 그 능력 얻어서 쓰신 분입니다. 자기 안에서 진리를 찾아서, 자기 안에서 부처를 찾아서, 부처의 마음으로 진지를 구현하면서 육근으로 멋진 작품들을 세세생생. 대승보살들은 중생 떠나지 않습니다. 세세생생 중생들 앞에 나타나서 또 보여주고 또 보여줍니다.
보살이 중생을 떠난다 그러면 이미 보살이 아닌 거죠. 그건 소승성자입니다. 소승성자들은요, 중생을 눈에 보이는 중생은 도와줍니다만, 열반에 든 뒤에는 신경을 써줄 수가 없어요. 왜? 내가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대승보살들은 나는 원래 열반이고, 난 원래 부처인데, 난 원래 열반이기 때문에 세세생생 나는 현상계에 돌아다니면서 중생들한테 육근으로 멋지게 육바라밀을 보여주는 게 내 사명이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에요.
이 분들은 현상계를 절대로 떠나지 않아요. 중생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아요. 그래서 보살인 거죠. 그 분들은 이미 부처이면서 보살인 거예요. 고게 대승수행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여기서 지금 말하는 과거 부처님, 현재의 성현들은 보살을 말하는 거지 소승성자들을 말씀하는 건 아닙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미래에 수행하고 배울 사람들도/
과거가 그렇고 현재가 그런 거보면 미래에 혹시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있다면
/마땅히 이 진리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마땅히 다 자신 안에 있는 알아차리는 마음, 공적영지에서 답을 찾아서 공적영지를 만나시는 게 먼저 중요합니다. 제가 권해드린 방법이 ‘모른다’에요. 지금 어떤 상황에서도요, 쉽게 일심을 만들어내는 방법은요, 마음 안에 있는 잡념들을 몰아내야 맞지만, 몰아내려고 하는 마음이 이미 잡념이라 마음이 더 시끄러워집니다.
그러니까 가볍게 ‘모른다’라고 해서 단박에 놔버리시면 되요. 지금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모른다’라고 하시면서 내려놓으시고, 집중해야 할 대상에, 일심으로 우리가 몰입해야 되는 대상만 집중하는 겁니다. 그 외에는 다 잡념이니까.
잡념은요,
꼭 몹쓸 생각들이 아닙니다.
몹쓸 생각들은 악념이라고 그래요. 사념이나 악념.
잡념은 좋은 생각인데,
타이밍이 지금 안 맞게 등장한 생각을 잡념이라고 합니다.
명상하려고 앉으시면 나쁜 생각이 꼭 여러분을 괴롭히는 게 아니죠. 오랜만에 영어 책을 딱 폈어요. 영어 공부하겠다. “국어도 해야 되는데.” 그 말은 맞아요. 맞는 말인데, 지금 국어를 생각하면 일심이 안 되잖아요.
즉, 타이밍이 나쁘게 등장해서 일심을 깨는 그 마음을 잡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친구들은요, 없애겠다. 말겠다도 아니고 ‘몰라’하시면 끝나요. ‘나는 너한테 관심을 주지 않겠어.’하면 무력해지고 사라집니다.
우리 마음에 모든 잡념들은요,
내가 쥐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강에 흘러가는 그런 존재들이에요, 사실은.
내가 쥐면 내 마음에 영향을 주고
내가 손을 펴면 흘러가버려요.
그러니까 결국, 잡념 이게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어, 이거 돈 벌어서 명상만 할 게 아니라 돈 벌어서 효도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러든지 말든지 ‘모른다’하고 계시면 흘러가서 끝나요.
“아닌가?” 했을 때 “그러게” 그러면 붙잡으신 거예요. 여러분이 붙잡으신 거예요. “가지 마.” 그런 거예요. “나랑 얘기 좀 더 하고 가자.”
여러분이 결정하신 거예요. 흘러갈 존재를 붙잡으신 여러분이에요. 붙잡지 않는 방식이 ‘모른다’에요. ‘모르겠다’에요. 저도 옛날에 많이 당했어요. 명상하다가.
“너, 이러다가 장가도 못가”하면
“몰라. 괜찮아.”이래야지 흘러가요.
“그러게”그러면 벌써 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식은땀이 나요.
“진짜 큰일인데.” 이러면
“지금 사회에서 외면 받을 이런 공부만 계속 하고 있으면 나 안 되는데. 진짜 낙오자 되는데.”이런 생각이 예전에 진짜 일어나요. 일어나면 몸이 뭔가 총 맞은 것처럼 충격이 옵니다. 실제로. 괜히 혼자서.
“몰라. 괜찮아.”그러면 흘러가요.
내가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그게 나한테 악영향을 끼쳐요.
내 일심을 방해해요.
내가 지금 해야 되는 일을 못하게 만들어요.
잡념 처리하는 방식은
‘몰라’하면 됩니다.
‘몰라. 괜찮아.’
“나는 너한테 신경 쓰지 않겠어.”
그러면 흘러가버립니다.
왜냐? 현상계의 모든 존재들을 관통하는 공식은 ‘무상함’입니다.
즉, 놔두면 무상하게 흘러가요.
좋은 거건 나쁜 거건 다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붙잡으면
그 무상함을 내가 계속 떠나지 말라고 붙잡고 있으니까
나를 괴롭히는 거예요.
잡념도 흘려보내시라.
항상 흘려보내면서
내 내면에 참나자리에 늘 빛나고 있는 그 참나자리를
자각하시면서 사시면
무상함 속에서 부처가 작동하게 되죠.
육근 속에서 부처가 작동하게 되면
보살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보살의 원 이름이 보리, 공적영지는 보리입니다. 깨달음. 살타_육근은 중생성을 대표하죠. 육근을 쓰는 부처님을 보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소승불교에서는요, 보살은 부처가 못된 양반을 말하는 거구요, 대승불교에서는요, 보살은 이미 부처님도 보살이에요. 관세음보살도요 예전에 성불하신 분입니다. 경전에 의하면. 육근을 통해 중생을 도와주고 계셔서 보살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여러분은 이미 부처님이에요. 제가 지난 시간에 이런 얘기도 드렸죠.
부처되기가 어려운 게 아니고,
보살되기가 어렵다.
왜?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본래 부처니까.
여러분 안에 이미 법신불이 작용해서
보고 듣고 육근을 부리는데, 이미 부처님이죠.
그런데 부처님인 것은 이미 여러분이 부처님인데, 보살은 어렵습니다.
보살은요, 육근을
정말 삼학 육바라밀에 맞게 잘 쓰셔야 보살이에요.
보살되기는 어렵죠. 이런 의미에서는.
그런데 사실은
보살의 극치를 부처님이라고 부른다는 의미에서는
여러분이 부처님이 아닌 거지만,
불성을 지니셨다는 의미에서는 부처님 맞죠.
그런데 보살은 좀 달라요. 내가 육근을 진짜로 잘 써야, 도리에 맞게 잘 써야, 깨달은 중생보살이 됩니다. 요 부분을 제가 강조 드리고요. 부처님, 성현들, 이런 분들을 보살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시면 좋겠고, 모두 이 참나 찾으신 분들이다. 그러니까 과거현재미래의 참나 밖에 없다. 한 참나이기 때문에 다른 진리가 있는 게 아니다.
/바라건대 모든 진리를 닦는 사람들이여, 절대로 밖에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시면 안 돼요. 사실은. 그래서 선불교가 뭡니까? 선불교가 이걸 참 잘 도와줘요.
“스승님, 저 부처님이 되고 싶어요.”
땡! 부처님이 되고 싶다는 게 벌써 생각을 일으켜서 감정까지 동요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부처가 못 되서 조급하시죠. 감정이 흔들리고 있어요. 뭔가 마음속에 부처를 찾고 있죠. 오감으로 부처를 그려보죠. 그럼 오감이 동요되고 있어요. 부처라는 개념에 집착해 있죠. 흘러 보내야 되는데, 그 또한 집착하고 있죠. 그것 또한 생각을 동요시키고 있어요.
그래서 선불교가르침은 살불살조에요.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놀래십니다.
“거기는 어떻게 도 닦나요?”
“살불살조요. 부처 나타나면 부처를 죽여야 됩니다.”
그럼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죽여야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게요, 무지의 구름이라는 중세수도사의 최고의 관상실천팁 주는 글을 보면요, 이 얘기를 그대로 합니다.
“그대가 지금까지 생각하는 하나님,
혹시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
만났던 하느님에 대한 오감적인 감각,
일체를 무지의 구름에 빠뜨려라. 모른다고 하라.”
언어명상일 뿐이거든요. 언어명상을 단박에 놓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이게 살불살조랑 똑같은 얘깁니다. 살불살조를 오해하셔서
“부처님 만나면 진짜 어떻게 해야 되나?” 이렇게 생각하면 땡!이구요,
여러분이 부처님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부처님에 집착하는 순간 여러분의 공적영지는 가려집니다.
“부처가 되어야 되는데. 나는 왜 부처가 못되지?” 하는 순간 그 마음에는 결핍감만이 가득하지 꽉 찬 마음, 부처님 안에서 꽉 찬 마음이 가득해야, 그 마음이 있어야 육바라밀 삼학이 터져 나오는데, 안으로 부족하다는 마음밖에 없고
“나는 죄인이다. 불성을 모른다. 이번 생에 불성을 못 만날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이 하나라도 있으면 여러분 마음은요, 동요될 뿐입니다.
부정적으로 작동할 뿐, 긍정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요.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에 그게 공부로 유도했을 때만 입니다. 그런 결핍감이 분심을 일으켜서 공부에 몰입하게 만들면 잘 쓰신 거구요,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고요, 그런 마음이 일어나면 거기 집착하지 말라는. 그게 불성을 돌아보라는 신호로만 생각하시고 빨리 “몰라 괜찮아.”하고 놔버리시면 바로 부처를 봅니다. 이게 선의 정신입니다. 선의 정신을 가지고 절대 밖에서 찾지 말고
/마음의 본성은 오염되지 않으며 본래 스스로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이니 단지 허망한 인연을 떠나기만 하면/
부처가 되고 싶다는 마음, 그 허망한 인연입니다. 부처랑 상관이 없는 소리에요. 내가 부처가 아니라는 생각, 부처가 되고 싶다는 생각. 나는 부처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 또 밖에 부처가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만 내려놓으면 그대로 부처다.
이게 제일 유명한 그 무문관에 화두입니다. 선문답 이죠.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스님이 대답하셨다.
“똥 묻은 막대기이다!”
똥이 아주 말라서 덕지덕지 붙어있는 막대기다. 이 얘기를 들으시고 “역시 불성은 똥에도 있구나.” 이렇게 접근하시면 땡입니다. 왜? 이런 이해해서 여러분이 견성에 도움 받을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지식만 넓혀지는 거예요.
“오케이. 똥에도 불성은 있는 걸루.” 아무 확인한 적도 없고. 불성이 뭔지도 모르는데, 개념 하나 더 보태시라고 이 얘기를 했다면 선의 정신이 아닙니다. 선의 정신은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자기 불성이 들썩하게 만들 수 있어야 선문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선문답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견성에 이르게 못 도와주면
선문답은 실패한 거예요.
위의 선문답은 성공했을까요? 실패했을까요? 모르죠. 저 말을 듣고 제자가 “아”하면 성공인 거구요, “에?”하면 땡이에요. 그런데 이런 대답을 계속 시도합니다. 왜? 언젠가 “아”할 때가 오니까. 그래서 이걸 가지고 이런 선문답 끝에 질문했던 사람이 “아”하고 깨달았다. 이렇게 끝나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것은 하도 하다가 한번 먹힐 때에요. 성공담인 거고, 실패담인 경우에는 말이 없습니다, 뒤에.
상대방이 “어, 뭔 소리야?”한 거죠. 그러면 대화 실패에요. 선문답이라고 성공하는 게 아닌데요, 저 문답을 왜 적어놨냐하면 저 말을 듣고 누군가는 성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당나라 때는 이 문답에서 바로 견성을 시키거나 못시키거나 결정 나요. 그리고 실패했다고 바로 포기가 아니라, 다음에 또 다른 것으로 또 겁니다, 스승이.
그래서 스승이랑 같이 지내는 동안 저런 문답을 계속 받게 되어있어요. 언젠가는 이게 터지게 되어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다.” 하는 순간 견성이 되요. 요게 선불교식 지도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게 당나라 때는 이렇게 해서 견성 자가 속출했는데요, 송나라 오면서 견성자가 줄어드니까, 이 전통이 맥이 좀 끊어져가니까 화두선이라는 게 나옵니다. 그때 대혜종고 스님이 창시해요. 화두선을.
저런 것을 글로 적어놓고, 선문답 날려주는 스승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글로 적어놓고 공부를 합니다. 내가 직접 저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현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몰입하는 건 좋은데 화두선 방식이 조금 오해하시기 쉬운 게 마지막 이거에요.
“왜 똥 묻은 막대기라고 했는고?” 하고 몰입해 들어갑니다. 이럴 때 머리를 쓰면 안 돼요. 궁금하기는 하되, 의심은 갖고 있되, 알음알이로 생각으로 접근하면 안 되기 때문에 생각을 안 쓰고 의심하셔야 되요.
화두선의 비결은요,
머리를 안 쓰고 고민하기입니다.
이러면 여러분 견성할 수밖에 없어요. 답이 궁금한데 머리는 못쓰기 때문에 정신만 딱 차려진 상태에 들어가요. 산란하지도 혼침하지도 않은 정신상태가 딱 이루어지면 찰나에 견성입니다. 화두를 의심하는 순간 바로 견성해야 되는데.
원래의 선문답하고 뭐가 차이가 있냐? 원래 선문답을 맛이 달라요. 화두선은 저걸 소재로 해서 한번 굴려서 쓰는 거예요. 원래는 어떤 의미일까요?
‘왜 똥 묻은 막대기라고 했는고.’ 고민하는 게 아니에요.
“부처가 뭔가요?”
“똥 묻은 막대기 버려. 부처라는 개념은 똥 묻은 막대기야. 그 소리 하지 마.”
그러면 질문한 사람이
“부처가 뭡니까?”
“부처 버려.”
이게 견성이에요.
부처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상태에 들어가면 바로 견성이에요. 여러분, 부처가 되고 싶으시면 견성 못하신 거예요. 견성만 가지고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 성불의 세계, 육근을 쓰는 세계가 아니고 육근을 초월하는 얘기에요. 견성은 다. 선불교로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게 오로지 육근의 초월만 얘기합니다.
육근을 초월시키는 비방은
판단 중지에요.
언어 명상을 단박에 잊게 만다는 것.
그래서 언어를 더 끌고 나가게 하면 안 돼요.
‘부처가 되고 싶어요.’라고 할 때 무슨 말을 하건 계속 이어져서 가면 안 돼요. 그냥 끊어버리는 겁니다. ‘부처가 되고 싶어요.’ 하는 말을 딱 끊어버리는 방식이
“똥 묻은 막대기야. 버려. 왜? 똥 묻은 막대기를 들고 있어? 변소 나왔으면 버려야지, 그걸 왜 들고 있어? ‘부처가 되고 싶어요.’라고 하는 동안 너는 부처 못 돼.” 이겁니다.
선불교 선사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고민을 통해, 생각을 통해 부처를 찾으면 당나귀 해에 견성한다.”
간지 중에 당나귀 해는 없습니다. 너는 끝났다는 거예요. 너는 끝났다. 왜?
생각으로 답을 찾는 동안 너는 끝났다.
생각을 초월해야 부처를 만난다.
그런데 부처라는 건 생각이다.
부처를 왜 들고 있느냐?
운문스님은 고급스러운 분이에요. 지금 이런 선문답을 해주신 것은. 다른 스님한테요,
“부처가 뭡니까?” 했다가 멱살 잡혀요. 몽둥이로 맞습니다. 뺨을 맞아요. 고막 터지게 소리를 지릅니다. 임제 스님 같은 경우 소리 질러요. “악” 그럽니다. 그럼 사흘 간 귀가 먹먹했데요. 제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럼 그 사흘간 뭘 느꼈을까요?
‘다시는 부처 안 찾아야지.’ 이걸까요? 뭘까요?
즉, 부처를 찾는다고 했는데, 그 생각이 나오기 전으로 돌려버린 거예요.
‘헛된 소리 하지 마.’ 딱 안으로 쳐버리니까, 딱 생각이 끊기면서 존재만 하게 되요. 그때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면 견성입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다시 소리가 돌아왔을 때 또 가서
“그러지 말고 한번만 얘기해 주세요.” 그러면 또 소리를 지르거나 몽둥이로 맞겠죠.
선생님한테 부처 물어봤다 몽둥이로 맞으면 어떨까요? 머리가 하얘지겠죠. 그게 견성상태입니다. 판단 중지 상태. 요것을 계속 맛보게 해요. 어떤 스님이 인제스님한테
“부처가 뭔가요” 했더니 바로 뛰어와서 멱살을 잡고 흔들어 버려요. 그럼
“어”하죠.
“그거야” 하고 놔줍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죠. “뭔 동문서답이야?” 하다가 반복되다가 알아요. 언젠가. 그 알 때를 적어놓은 거예요. 대게. “아” 했다는 건요, 많이 이런 짓을 당하다가 “아” 할 때가 와요. 그때 아는 겁니다.
깊은 명상을 통해 아는 게 아니라
선불교는 탁탁 찔러주는 거예요.
“안으로 들어가.”
들어가면 성공이고, 못 들어가면 또 옆에 가서 기와 갈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지? 안으로 못 들어가고 활주로만 열심히 달리면 될 것 같지? 비행기가 날지도 못하면서. 안 돼.” 라는 얘기를 계속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예전에 중국에서 참새 잡는 법, 모택동의 대학진 운동 때 참새 잡는 법 아세요? 참새가 땅에 못 앉게 해서 참새를 잡습니다. 땅에 앉으려고만 하면 온 인민이 뛰어와서 막 소리 질러서 지쳐서 떨어지게, 허공에서. 선사들의 방법이 비슷해요.
여러분이 어떤 생각으로 부처를 찾으려고 하면 막 난리를 칩니다. 몽둥이로 때리고, 소리 지르고. “뭐 어쩌란 말이야?” 할 때 깨어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더 이상 못 잡을 때 깨어나게 만듭니다. 방식이.
선불교방식이 다른 거 같죠. 똑같습니다.
언어 명상을 단박에 놔라. 그러면 그대의 온전한 정신이 또렷해질 거다. 왜? 우리 원래 마음은 본래 마음은 본래 고요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고요하게 한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면, 그건 육근의 마음이지 본래 마음은 아니에요.
본래 마음은요, 태초 이래 그냥 고요해요.
여기는 본래 지혜로워요. 본래 고요해요.
본래 육바라밀이 꽉 차있어요. 원만해요.
여러분이 시끄러운 거고
여러분이 지혜가 부족한 거고
여러분이 욕심덩어리인 겁니다.
그러니까 육근을 가라앉히면 뭔가 나아지는 것 같아요. 그것도 맞는 얘기인데, 공적영지와의 만남이 없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헛도는 겁니다. 육근을 조작해보려는 시도는 실패해요. 죽을 때까지 여러분이 마음을 고요하게 해보겠다. 실패하실 거예요. 왜? 결국 죽을 때 망상부리다가 가실 거예요. 왜냐?
사람의 마음은
고요해지게 되어 있지 않아요.
잠깐은 고요할 수 있어도
계속 고요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명상이 실패하는 이유는
육근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 해서 그래요.
왜? 육근은 원래 무상한 건데.
무상한 것을 고요하게 하겠다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진짜로 견성하신 분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 분들이에요.
육근을 조작하는 게 아니라,
단박에 육근을 넘어서면
거긴 원래부터 고요한 자리가 있다.
본래 고요하고, 본래 알아차리는 공적영지의 자리랑 만나기 전에는
내 마음 안에 고요가 없는 겁니다. 일시적인 거예요.
육근은 요동하니까 가끔 고요할 때가 오죠. 멍 때릴 때가 오죠. 가끔은, 살다가. 그냥. 명상 안 해도 멍 때릴 때 있어요. 그러면 가끔은 멍 때릴 때 있습니다. 다시 요동해요. 그게 육근의 자연스러운 성정입니다.
그러면 견성한 사람은 뭐가 다른가요?
견성은요, 생각이 일어나건 말건, 육근이 움직이건 말건
늘 고요합니다.
요 말을 못 알아채시면 견성이 안 되신 거예요. 육근의 동정과 상관이 없어요. 육근이 일어날 때 일어난 줄 아는 자리, 육근이 사라질 때 사라지는 줄 아는 자리, 거기가 공적영지이고, 거기가 도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찾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선불교 선사들이 왜 이렇게 야박하냐?
육근으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몰아넣는 겁니다.
육근에 못 앉게 하는 거예요.
육근에 집착을 못하게 하면요,
그 자리로 갈 수밖에 없어요.
견성하실 수밖에 없어요.
자, 이제 본격적으로 불성을 보는 비결을 배워보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계속 이미 배우셨어요. 계속 얘기하셨는데, 좀 더 불성을 보는 비결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편이 나옵니다. 여기서부터는 질문을 받습니다. 제가 받는 게 아니라 스님이 질문을 받아요. 질문자의 질문이 등장하기 시작해요. 문답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십니다.
지금까지가 서문격 이었으면 이제 질문문답을 통해서 본인의 주장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세요. 사실은 이게 옛날 글 쓰는 방식이에요. 자기가 질문하고 자기가 답합니다. 예상 가능한 질문들을 자기가 다 써요. 이것을 혹문장 형식이라고 그래요. 혹자가 질문했다는 형식에. 거기에 답하는 형식으로 글을 씁니다. 이것도 방편이에요. 보살들의.
이렇게 해야 글이 더 쉽게 독자들 입장에서 설명이 가능할 거라고 보고, 예전 어른들이 이런 식으로 글을 쓰십니다. ‘혹자가 질문하기를’ 이런 식으로 해서. 질문합니다. 지금까지 수심결을 읽으셨다면 여러분, 독자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거예요. “말씀은 좋은데요 구체적으로 어쩌라는 거예요?” 이런 질문을 누가 해줘야 읽는 사람이 더 쉽게 와 닿겠죠. 독자를 대변하는 질문을 해줍니다.
/만약 ‘불성’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알이 지금 이 몸에 있다면/ 나한테 있다고 하셨잖아요.
/이미 내 몸 안에 있어서 범부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 같은 범부가 다 불성이 있다는 얘긴데, 부처님이랑 똑같은 수준의 불성을 갖고 있다는 얘긴데,
/어째서 저는 지금 여기서 불성을 못 보는 것입니까?/ 당당하게 따집니다. 왜 나는 못 보는 건가요?
/다시 설명하시어 투철히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다시 설명해 주세요.
그런데 재미 있는 게 이렇게 자기가 질문하고 자기가 답하면 나중에 가면 막 화내시기 시작해요. “왜 이해를 못하는 거야?” 하면서 재미있습니다. 자기가 질문하고 답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독자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인 거예요. 나중에 가면 화내시기 시작해요. “이렇게 얘기했는데도 왜 못 알아듣는 거야?” 이미 못 알아듣는 사람을 이미 예상해서 화내시면서 답을 해주십니다. 그만큼 이 답이요, 참 좋아요. 보시면 진짜 이말 듣고 못 알아들으면 안 되겠다하는 정도의 말들만 나옵니다.
/그대의 몸속에 있는데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
지금 그대 속에 있는데, 그대 몸속에 있는데 이 몸이 육근을 상징합니다. 그대의 육근 안에 있는 꼭 몸뚱이만이 아니라, 그대 자신 안에 있는데, 이런 뜻이니까, 그대의 육근 안에 있는데 그대가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24시간 가운데 배고프다는 것을 알며, 목이 마르다는 것을 알고, 춥다는 것을 알며, 덥다는 것을 알고, 화내고 있다는 것을 알며, 기뻐한다는 것을 아니 과연 이 아는 자는 어떤 물건인가? /
그대가 24시간 동안 배고프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배고플 때 배고픈 줄 알죠. 목마를 때 목마른 줄 ‘알고’, 추울 때 추운 줄 ‘알고’, 더울 때 더운 줄 ‘알고’, 화낼 때 화내는 줄 ‘알며’, 기뻐할 때 기뻐한 줄 ‘아니’, 과연 이 ‘아는 자’는 어떤 물건인가? 이게 최고의 화두에요. 이게 이 뭐꼬에요. 다른 말로 줄여서 이 뭐꼬 그러는 거예요. 이건 뭐지?
보세요. 부처가 되고 싶어서 참선하고 앉아있어요. 그때 여러분이 물어보셔야 할 건 이거에요. “부처가 되겠다고 지금 이렇게 앉아있는 이건 뭐지?”그거 아시면 답을 찾을 수 있어요. 이렇게 쉬워요. 쉽다면 참 쉽습니다. ‘부처가 되고 싶은 그건 뭐지?’ 하는 겁니다. 그게 사실은 부처에요. 놀라운 얘기죠.
/이 몸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인연이 모인 것이다./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 지_물질, 수_액체, 화_열기, 풍_바람의 요소. 요게 모여서 네 몸뚱이가 만들어져 있다.
/그 재질이 무디고 알음알이가 없으니/
지수화풍이 알아차리는 존재가 아니지 않는가. 이겁니다. 지수화풍이 생각감정을 일으키는 그 자리가 아니지 않는가. 지수화풍은 재질이 무디고 알음알이가 없으니
/어찌 능히 보고 듣고 깨달아 알 수 있겠는가?/
“너의 몸뚱이가 뭘 알아차리는 건 아니잖아.” 이겁니다.
/능히 보고 듣고 깨달아 알아차리는 자가 필경 그대의 ‘불성’일 것이다./
그러니 이 몸을 통해서 육근을 부려서 보고 듣고 깨달아 알아차리는 자가 필경 그대의 불성일 것이다. “몸 너머에서 알아차리는 그 자리가 어디 있는가. 이걸 찾아라.”
제가 좀 도와드려 볼게요. 제가 5가지 화두를 한번 정해 왔습니다. 화두는 한가지에요. “이건 뭐지” 이 뭐꼬입니다. 이건 뭐지? 이 뭐꼬만 해도 지금 사투리죠. 그러니까 누구나 쉽게 알아들으시려면 이건 뭐지? 하는 거예요. 이건 뭐지? 전라도 식으로 하면 꼭 이 뭐꼬가 안 되겠죠. “이건 뭐시여.” 하고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각자대로 했겠죠.
“아, 내가 거시기구만.” 하면 그건 견성인 거예요. “이건 뭐시여.” “아, 내가 거시기구만.”
그래서 저는 이 뭐꼬보다 보편적으로 이건 뭐지? 이건 무엇이지? 뭘 물어보느냐?
5가지 화두: 이것은 무엇인가?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자는 무엇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감’을 알아차리는 자는 무엇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자는 무엇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을 알아차리는 자는 무엇인가?
여러분 한번 물어보세요.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 그 모습은 뭐지? 하고. 쉬워요. 생각을 일으키시면 되요. 여러분 이름을 불러보세요. 아무개야 하고 속으로. 아무개야. 그 생각 어디서 나왔죠? 거기가 생각나왔다가 변하나요? 아니에요. 생각이 끝없이 나와도 그 자린 그 자리입니다. 그 생각 나오는 그 자리가 뭐죠? 생각 나오기 이전의 그 본래 모습, 만나보세요.
내려가 볼게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자가 무엇인가? 숨이 들어왔다 나가고 들어왔다 나가고. 이걸 알아차리는 자는 누구죠? 또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감을 알아차리는 자는 뭐죠? 눈 앞에 어떤 색깔이 보입니다. 또 사라집니다.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집니다. 자, 뭐가 있어서 계속 알아차리고 있죠?
일어나고 사라지는 감정을 알아차린 자는 뭐죠? 슬펐다. 기뻤다. 계속 바뀝니다. 감정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그걸 계속해서 알아차리고 있는 그 주체는 누구죠?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을 알아차리는 자는 누구죠? 생각으로 특정해 보겠습니다.
결국 이게 한마디로 말해서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이라는 건요, 그 맨 위에 있는 육근이 작동하기 전에 난 누구지? 이겁니다. 육근이 작동하기 전에 난 누구지? 그것을 좀 쪼개봤어요. 호흡, 오감, 감정, 생각.
호흡은요, 석가모니부처님 이래로 사실은 오감 안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따로 분리해서 호흡을 가장 중시하셨기 때문에. 호흡은요, 우리 단전에 생명력을 갖다 줍니다. 그래서 이 생명력과 직결해 있습니다. 수행을 할 수 있는 힘까지 주면서 몰입도 시키는, 일심도 만들어주되 또 생명력, 에너지도 주고, 동시에 수승하강, 머리를 맑게 하고, 배를 따뜻하게 해주면서 건강까지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호흡관찰은 따로 빼서 지금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걸 다 한마디로 하면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 육근 작동하기 전에
본래 모습은 뭐지?
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 안에 밑에 넷이 들어 있구요, 통합하면 하나이고, 쪼개서 좀 다섯으로도 나눠봤습니다. 여러분이 편한 거 하나만 선택하셔서 계속 알아차리시면 똑같습니다. 저걸 다 하셔야 된다는 게 아니라 하나를 알면 다 알게 되어 있어요. 하나만 아시면.
자, 보세요. 오감을 가지고 말씀 드리더라고요, 저를 지금 한번 집중해 줘보세요. 저를 봐 보세요. 저만. 화면에 있는 저만 봐 보세요. 일심으로 보세요. 지금 오감을 보는 그 자리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오감 중에 색깔. 저를 보시죠. 제 색깔이 보이시죠. 눈 감아 보세요. 있으시죠. 방금 보던 자리 있죠? 거기가 참나입니다. 방금 보던 자리.
또 망상이 일어나서 더럽히겠지만, 다시 눈뜨시고요. 저를 몰입해서 보시다가 눈을 탁 감으시면, 오감을 탁 찾아내보시면
눈을 뜨건 감건
보고 있는 그 자리가 참나입니다.
뜨면 뜬 줄 알고, 감으면 감은 줄 알았던 그 자리.
거기서 생각도 나오고 다 나와요.
이 주체를 알고 나면
생각을 쓸 때, 감정을 쓸 때, 오감을 쓸 때
주인공이 되어서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신통이 나오는 겁니다.
무슨 신기한 게 신통이 아니라,
육근을 올바르게 쓰는 게 신통입니다.
육근을 삼학, 육바라밀에 맞게 쓰는 게 신통입니다.
탐진치로 안 쓰고,
계정혜로 그리고 육바라밀로 쓸 수 있다면 그건 신통입니다.
여러분이 주인공이셔야 가능해요.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오감에 끌려가지 않는 주인공인 되시려면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육근의 마음을, 생각감정오감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인공이 되겠다는 건 망상입니다.
이건 모래를 쪄서 밥을 만들겠다는 발상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알아차리는 자,
생각 감정 오감의 본래의 주인을 만나야만
여러분은 생각 감정 오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 또한 여러분 마음이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 안에 답이 다 있다.
요즘 과학기술이 하도 좋아져서 나중에 모래를 쪄서 밥이 나오면 요 비유는 취소하겠습니다. 당장은 먹히니까. 이해되시죠? 그거 안 될 일이다.
요즘 인공지능 가지고 걱정하시는데, 인공지능이 이런 공적영지를 지닌 사람의 영혼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건 모래를 쪄서 밥을 하겠다는 발상입니다. 영혼을 모르니까.
인간의 정신을 뇌의 작용으로 보니까, 인공지능, 내 뇌기능을 넘어선 인공지능이 나오면 내가 졌다가 됩니다. 그때부터는 사람의 존재의 가치도 아마 지금이랑 달라질 겁니다. 인공지능에 대해 겁내시는 게 대부분 이래요.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과학자분들은 뇌의 작용으로 봅니다. 정신을. 그러니까 우리 뇌보다 고급 뇌가 나오면 우리는 그 밑에 위치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을 겁내시는데, 인간의 정신은요, 그런 계산기능, 단순히 이런 답을 내는 기능, 그게 아니에요. 공적영지의 작용이죠.
참나가 작동해서
육근을 펴는 게
인간의 본래 작용입니다.
그건 인간만이 할 수 있어요.
어차피 여러분의 계산기능은 전자계산기만 못합니다. 이미 밀린지 오래에요. 컴퓨터한테 밀린지 오래구요, 스마트 폰한테 안 돼요. 여러분 뇌기능이. 그걸 가지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고요.
정신은 그 천지만물,
모든 것을 알아차리면서 굴려 쓸 수 있는
그리고 어떻게 굴려 쓰느냐?
육바라밀의 프로그램으로 굴려 쓸 수 있는
그게 인간의 신성이고
법신불의 작용인 거죠. 은덕이고.
그것을 감사하게 쓰는 그 존재가 인간이라는 걸 아신다면
인공지능 아니라 더 한 게 나와도
물질이 아무리 개벽해도 정신이 그것을 리드 할 수 있는 겁니다.
정신개벽만 되면
정신개벽의 정의는
내가 내 정신을 온전히 되찾아서
공적영지로 육근을 부릴 수 있는가.
이 답을 내신 분들은 물질개벽에 대한 답을 내신 거고
이 답이 안 나면 물질개벽에 끌려가게 되어있습니다.
물질이 개벽할 때마다 일희일비하면서 끌려가요.
요 답을 내라 하고 벌써 백 년 전에, ‘물질이 개벽하기 전에 정신 개벽하라.’라고 이 원불교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거, 그게 그대로 지금, 지금이 진짜 물질이 개벽될 시기입니다. 지금. 개벽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미 개벽이지만, 지금 인공지능이 정점을 찍을 겁니다. 거기에 맞게 그러면 우리도 준비해서 정신개벽하자.
지난 번 제가 정신을 개벽하자. 하는 특강, 방송해서 했던 이유도 정신개벽의 핵심이 뭔가. 그 얘기 드리려고 했던 건데, 딱 한마디입니다.
공적영지 찾아서
육근을 삼학 육바라밀에 맞게 부리자.
우리가 부리고 살자.
그 말씀 드리고 싶고요, 마무리로 대혜종고 스님의 서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대혜종고 스님은 화두선의 창시자에요. 화두선의 창시자가 결국은 사람들이 바로 참나를 못 만나니까 도와주려고 화두선을 창시하신 분이에요. 이 분이 화두선만 얘기하시지 않아요.
서장이라는 화두선의 바이블인데요, 사실 이 책을 보시면요, 화두선보다 ‘곧장 그대의 참나를 만나라. 알아차리는 그 자리를 바로 찾아라.’ 이 얘기가 더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함 보시죠.
대혜의 [서장]
다만 빛을 돌이켜 보라!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행위를 할 때, 도대체 무슨 형상을 하고 있는가?”
“그 하는 바를 따져 분별하고
마음이 품은 뜻에 따라 이리저리 변통하며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정확히 처리하는 경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은혜인가? 라고 물어보라.
이와 같이 공부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가면
사람이 활쏘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자연히 적중하게 되는 법이다.
돌이켜보라. 불을 가지고 방만 비춰보지 마세요. 등을 가지고 방만 비춰보는데, 육근은 그렇습니다. 육근은 밖으로 찾게 되어있어요. 눈은 색깔을, 귀는 소리를, 혀는 맛을, 코는 냄새를, 몸은 감촉을. 손은 감촉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밖에서 얻은 정보를 가공해서 좋다, 싫다, 따지게 되어 있어요. 사람의 육근은.
그런데 육근을 알아차리는 자는 누구지?
육근을 굴리는 자는 누구지?
하고 안을 돌이켜보시면 바로 견성입니다.
견성을 할 때 엄청난 시간, 참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육근의 마음을 가지고 수행하시는 분이에요. 육근의 주체는 지금 이 순간 작동하고 있는데, 왜 찾는 건 나중에 찾아야 됩니까. 지금 이 순간 누가 육근을 작동하고 있지? 라고 돌이켜 보시면 바로 그 자리입니다.
대혜의 서장에 이게 나옵니다. 다만 빛을 돌이켜보라. 자신을 돌아보면 바로 견성입니다. 오랜 시간 참선해서 보겠다가 아니에요. 지금 화두선 하시는 분들도 뭔가 잘못된 게요, 화두선을 10년 20년 해야 될까 말까다. 땡입니다. 화두선 창시자의 입장은 이거에요.
다만 돌이켜보라.
이 뭐꼬? 할 때 자기를 돌이켜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견성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시간이 걸리는 건요, 바로 참나를 만나도 참나에 대한 만남이 이해되고 소화되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그런데 ‘만남 자체가 나중에 올 것이다. 참선을 많이 하면 올 것이다.’ 이 발상은 원래 선불교의 정신이 아니에요. 왜? 선문답의 정신은 문답을 통해 그 자리에서 원래 불성을 가르쳐주는 게 본식입니다.
화두선도 그걸 돕겠다고 나온 거기 때문에 ‘이 뭐꼬’ ‘뜰 앞의 잣나무’ 똥막대기‘라는 이 화두를 품는 순간, 궁금해 하되 생각으로 찾지 않으시면 그 자리가 궁금해 하는 그 마음이 그 대로 알아차리는 그 마음이에요. 이렇게 해서 견성을 바로 유도하는 정신이 선불교의 정신입니다.
“저는 요즘 10년째 화두하고 있어.” 이런 말이 너무 안이하게 들려요. 그러시면 안 돼요. 예전에 제일 안타까운 분들이 고시원에 들어가시면서 단기에 승부 보실 생각이 아예 없어요. 바둑부터 배우세요. 고시원에 오래 있으려면 바둑을 둘 줄 알아야 된데요. 뭔가 마음에서 이미 한참 집을 짓고 계시는 거예요.
바로 본질을 찾아가시는 게 아니라 가는 과정을 즐기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바둑 두러 거기 가셨다면 모르겠습니만, 본질이 견성이라면 곧장 들어가시는 이 답을 권해드립니다.
/다만 빛을 돌이켜 보라! 이러한 생각 하는 자는 누구인가?/
지금 이 생각 일으키는 자는 누구인가?
/행위를 할 때, 그 자리는 도대체 무슨 형상을 하고 있는가?/
내가 움직일 때, 그 알아차리는 자는 뭐하고 있나?
/그 하는 바를 따져 분별하고 마음이 품은 뜻에 따라 이리저리 변통하며/
우리가 뭔가 일을 할 때, 따지고 분별하고, 이리저리 변통하고 꼼수부리고 여러 가지 일들을 제대로 처리하려고 노력할 경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은혜인가? 라고 물어보라./
뭐가 있어서 내가 이렇게 신통하게 생각을 굴려가면서 살아가고 있나? 누군가? 라고 물어보라.
/이와 같이 공부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가면/
날마다 명상할 때, 참선하실 때 이걸 물어보라는 거예요. 누구지? 물어보면서 딱딱 생각이 끊어져야 됩니다. 이때 생각으로 답을 찾으시면 머리가 탑니다. 수승하강의 반대가 됩니다. 머리가 타오르고, 정기가 고갈 되요. 배는 싸늘해지고, 머리는 타오르게 됩니다.
그게 아니고 화두선의 본식은 지금 왜곡되게 하고 있어서 비판받는 겁니다. 본식은 이 뭐꼬 할 때 머리가 시원해지고 청량해져야 되요. 왜? 생각을 안 쓰니까. 생각을 쓰면 머리가 탑니다. 화기가 위로 올라옵니다.
잘못된 화두선 하는 분들은 선 끝나고 보면 알아요. 선 끝나고 얼굴이 빨갛습니다. 눈이 충혈 되어 있어요. “생각 좀 하셨구만.” 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선을 딱 하시고 나면 맑아져 있습니다. 왜? 참나랑 만나고 있다 나왔거든요.
이 뭐꼬에서 그 자리 찾아서 그 자리를 함께 있다가 선을 깨고 나왔기 때문에 사실 깬다도 없는 겁니다. 앉아있는 게 일어난 거지, 그 정신은 그대로이거든요. 그러니까 외향에 선은 깨졌지만, 안에 있는 선은 일심은 그대로 가는 겁니다.
요게 진짜 선이라 지금 화두선의 창시자가 얘기하는 것은 화두 하라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그 자리 뭐야? 하는 겁니다. 그 자리 뭐야? 이게 원래 모습이 화두인 겁니다. 그 자리 뭐야? 계속 그 자리를 물어봐.
/사람이 활쏘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자연히 적중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다보면 사람이 활쏘기를 배우는 거처럼 자꾸 쏘다보면 딱 맞을 때가 와. 적중할 때가 와. 계속 이 의문만 품고 살아. 이겁니다.
여러분, 끝나고 식사하러 가시면
“밥 먹는 난 누구지? 이 밥을 먹는 배고프다고 알아차리는 자, 밥을 먹고 있는 줄 아는 자, 그 자리는 누구지? 이런 저런 생각하고 있는 이 자리는 누구지?” 하고 찾아보면 한 자리입니다. 공적영지자리.
이 강의를 들으시면서도 이 강의를 듣는 여러분 자신을 찾고, 이 강의를 듣고 이런 저런 고민을 하시는 그 자리를 찾고, 그 자리에는 고민이 없습니다. 오직 존재할 뿐이고, 오직 알아차릴 뿐입니다. 그게 공적영지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의 공적영지를 찾는데, 이 강의가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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