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는 12연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요. 또 12연기를 통해서 어떤 원인에 의해서 윤회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그런 윤회가 일어나는 원인과 그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또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가? 하는 거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때는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죽어서 선처에 태어나는 것도 하나의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처에 태어나지 않고 선처에 다시 재생하는 것도 죽어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거라고 말할 수가 있겠고요. 이보다 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수행을 열심히 해서 만일 깨달음 얻게 된다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죽음은 완전한 열반인, 그러니까 언젠가는 아라한이 되는 것을 보장받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수다원이 되면은 수다원이 된 존재는 적어도 아무리 많이 윤회를 해도 7생 내로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깨달음이 일어나서 최초의 깨달음인 수다원이 되기만 하더라도 완전한 행복인 parinibbāna반열반이라고 하는 그 상태를 가는 것은 확정되어져 있다. 아라한이 되어서 반 열반을 이루는 것은 확정된 것이라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어떻게 보면 아라한이 되지 않더라도 임류, 그러니까 수다원. 임류과. 그리고 사다함 왕래. 一往來일왕래라 그러죠. 一來果일래과. 또는 아나함. 불환과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완전한 깨달음인 아라한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이런 깨달음도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아라한이 되어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완전한 반열반에 드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죽음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느냐? 이것이 저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어떻게 해서 우리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괴로운 죽음을 맞이하는가? 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노력을 통해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부터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가 윤회를 하는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이냐? 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탐_진_치_다. 12연기에서는 무명과 갈애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명과 갈애가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무명과 갈애가 있으면 우리의 삶은 무명과 갈애에 의해서 왜곡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근원적인 왜곡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집착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이 영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하다고 착각을 하게 되고요. 또 아름다운 몸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몸이 영원히 아름다울 거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또 행복하지 않은.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집착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을 하고,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이런 것이 가장 근원적인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집착을 하고 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싫어하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이런 탐욕과 성냄이라고 또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해서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계속 고통이 일어나고, 끊임없는 윤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이런 어리석음과 탐욕과 성냄을 포기를 하게 되면, 그래서 지혜수행을 통해서 이 어리석음을 포기하고 또 알아차림을 통해서 탐욕과 성냄을 포기하고.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왜곡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지혜를 바탕으로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또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되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완전히 버리게 되어 드디어 아라한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아라한이 되면 오염원이 완전히 소멸하기 때문에 오염원이 소멸하게 되면 앞에서 설명을 드렸듯이 오염원의 회전이 사라집니다. 오염원의 회전이 없어지면 업의 회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업이라고 하는 것은 오염원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는 거기 때문에 오염원이 없으면 업의 회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업의 회전이 없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의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고 이로 인해서 완전한 열반인 반열반, parinibbāna것에 들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가 궁극적인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수행은 어떻게 보면 어떻게 해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게 되는가? 여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는 효과적인 방법을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수행은 한마디로 팔정도의 실천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수행을 이야기할 때 팔정도를 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팔정도가 있으면 그것은 불교수행이다. 팔정도가 없다면 그것은 불교수행이 아니다. 팔정도가 있어야 깨달음을 얻은 사문이 있다. 팔정도가 없다면 깨달음을 얻은 사문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불교수행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때는 팔정도를 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정도의 중요한 의미는 중도의 실천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 중도라는 표현을 쓰느냐 하면요, 부처님 당시에는 크게 두 가지 기류에 수행형태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냥 행복을 누리는,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것을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탐욕을 즐기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주 저열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반대의 하나의 기류는 고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몸을 괴롭히고 고통을 줌으로써 다음 생에 아주 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기 몸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이런 수행을 고행수행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기 전에 태자시절에 수많은 감각적 쾌락을 누렸습니다. 봄에 노는 궁전, 가을에 노는 궁전, 여름에 노는 궁전. 계절마다 다른 궁전을 가지고 수많은 시녀들과 함께 온갖 종류의 감각적 쾌락을 다 누렸습니다. 그리고 출가하시고 나서는 외도들의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온갖 형태의 고행을 다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당신 스스로 호흡을 참는, 호흡을 참는 고행수행을 비롯해서 음식을 적게 먹는 그런 고행수행, 극도의 수행을 다 겪으셨습니다. 고행을 너무나 많이 하셔서 온몸이 뼈만 앙상한 그런 모습을 고행상이라고 하는 그런 모습을 아마 여러분들도 한 번쯤은 보셨을 거라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감각적 쾌락을 누려보시고, 또 온갖 종류의 고행을 다 해보셨지만, 이 두 가지가 결코 수행을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두 가지 극단,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또는 고행을 추구하는 이런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가리라. 하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 중도의 길을 가겠다라고 생각을 하시고 실천하신 방법이 바로 정리를 하면 바로 팔정도수행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고행은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괴로움을 겪음으로ㅆ 나중에 행복을 얻고자 하는 그런 방법이라고 할 수 있고요.
또 감각적 욕망은 지금 현재는 행복하지만, 미래에 큰 괴로움을 유발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팔정도의 길을 가는 것은 또는 중도의 길을 가는 것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하는 과정, 과정이 즐거움이고. 또 그 수행으로부터 오는 결과도 역시 즐거움. 그래서 팔정도의 실천은 바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라고 누누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팔정도를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 매우 유익할 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또는 행복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어떤 방법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런 팔정도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한 번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다시피 팔정도는 여덟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염, 정정이라고 하는 여덟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하나에 대해서 간단히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견해를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견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경전에 보면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정견이라고 한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한 번 더 우리가 점검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이 세상의 본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괴로움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이 있고, 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 또 있습니다. 그리고 또 보기 싫은 사람과 계속 만나야 되는 것도 하나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했을 때 또 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슬픔, 비탄, 절망, 탄식 등등의 정신적인 고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삶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근본적으로 행복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또 더 근원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한마디로 물질과 정신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오온의 집합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물질과 정신이라고 하는 것들은 물질세계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정신, 우리 마음도 순간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항상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이런 것들을 행복이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은 안정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이런 안정적이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불확실성을 가진 이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행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는 괴로움이다. 행복이 비었다. 이렇게 말해서 우리가 첫 번째 사성제의 첫 번째는 고성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고성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괴로움,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상은 왜 생겼는가? 왜 이런 게 일어났는가? 이처럼 일어남에 대한 진리. 세상의 일어남에 대한 진리가 바로 집성제입니다. 집성제는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한마디로 갈애로 이야기를 합니다. 갈애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그리고 또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렇게 세 가지로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대상에 대해서 감각적인 대상에 대해서 집착을 하는 것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고요.
또 우리가 영원하리라고 생각하는 영원히 존재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갈애가 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끝이다.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비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불교에서는 업이 있으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한다 하더라도, 업이 남아있는 한에 의해서는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불교의 연기의 가르침입니다. 그렇지만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끝이라고 집착하는 것.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 세 가지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고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 괴로움이 일어나는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바로 갈애다. 이것을 조금 더 세분화해서 이야기하면 탐_진_치_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갈애가 바탕이 되 있지만 그리고 어리석음. 그리고 성냄. 이 세 가지의 그 오염원 때문에 근원적인 오염원 때문에 우리의 삶에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뜻이죠. 그러면 이런 괴로움이 소멸한 상태는 있을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열반이라고 하는 멸성제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멸성제, 다시 말하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탐_진_치_가 소멸됨으로써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탐_진_치_가 소멸하고 되면 더 이상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인 열반을 증득하게 되는데, 이런 탐_진_치_를 소멸하기 위한 길. 어떻게 하면 이런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가? 어떤 것이 탐_진_치_의 소멸을 이르게 하는 것인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바로 도성제입니다. 도성제는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팔정도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 일어나는 구조.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이 일어나고, 어떤 원인에 의해서 세상이 일어나고, 그 일어난 세상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행복을 주지 않는다. 항상 불안정하다. 항상 변하는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한 통찰이 바로 고성제와 집성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그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과 이 세상을 파악하게 되면 이 세상이 고통이 일어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을 버림으로써, 고통이 없는 어떤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멸성제와 도성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성제와 집성제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고요. 멸성제와 도성제는 출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와 우리가 나아가야 될 방향에 대한 이해. 그래서 이것은 어떻게 보면 수행에 대한 바른 방향을 잡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수행을 해야 될지 올바른 방향성을 잡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 방향성이 없다면 우리가 수행을 해나가는 것을 결코 올바른 수행을 해 나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미지의 산을 가는데 나침반과 지도도 없이 길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팔정도 중에서도 정견을 가장 먼저 설하신 이유도 이 정견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바른 견해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에 수행을 하는 경우에 일반적으로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거는 방향을 모르고 수행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수행을 만나지 않고 그냥 살았으면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수행을 만나서 더 안 좋은 어떤 삶의 모습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하기 전에 먼저 사성제에 대한 이해. 이것은 수행을 하는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필수적인 어떤 가르침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성제에 대한 바른 이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하면 이것은 12연기의 바른 이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성제와 집성제는 일어나는 구조. 다시 말하면 12연기에서 순간을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무명이 있기 때문에 행이 있고, 행이 있기 때문에 식이 있고, 등등의 이래서 결국에는 생로사가 있다. 다시 말하면 집성제 때문에 고성제가 있다. 이런 뭐 뭣이 있으므로 뭐 뭣이 있다. 라고 말하는 12연기에서 순간의 구조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라지고, 행이 사라지면 식이 사라지고. 이렇게 가서 결국에는 생로사가 없다. 이런 구조는 12연기에서 소멸하는 구조. 다시 말하면 역관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역관은 사성제에서는 멸성제와 도성제를 이야기합니다. 도성제 수행을 통해서 결국 우리가 탐_진_치_를 소멸하게 되면, 그로 인해서 얻어지는 열반. 이것이 바로 12연기에서 사라지는 구조에 대한 설명인 역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성제는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 또는 연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 두 가지 중에 한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불교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사성제와 연기법에 대한 것은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음은 정사유입니다. 팔정도의 두 번째는 정사유인데요, 정사유라는 것은 바른 사유를 이야기하겠죠. 바른 사유. 무엇이 그럼 바른 사유냐? 사성제에 맞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바른 사유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성제라는 패러다임, 또는 연기라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정사유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바른 사유. 그러면 실제로 사성제에 맞게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 식의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은 이 세상이 결코 영원한 것은 없다. 변하는 것이다 라고 판단을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탐욕이나 성냄을 일으키지 않게 됩니다.
집착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집착하지도 않고, 또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실체도 없는 거에 화를 내지 않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정사유의 내용은 경전에서는 탐욕이 없다. 성냄이 없다. 그리고 남을 해치지 않는다.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은 자비를 행하는 거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성제에 맞게 사유를 하게 되면 세상에 대해서 집착을 하거나 성을 내거나 잔인해지거나 이런 것이 없고, 탐욕이 없고, 성냄이 없고, 남을 해치지 않는, 아주 자비로운 마음으로 우리 마음이 변한다. 이렇게 해서 정사유다. 이렇게 사유하는 것이 바로 정사유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사유라는 것은 탐욕과 성냄을 일으키지 않는, 탐욕과 성냄이 없는 상태로 사유하는 것을 바른 사유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정견과 정사유. 이 두 가지가 팔정도에서도 제일 첫 번째 두 번째로 나와 있고, 이 두 가지를 합해서 지혜수행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지혜수행을 설명하기 위해서 팔정도에서 설해진 것인데요. 그러면 일반적으로 여기서 하나 생각을 해 봅시다. 일반적으로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계_정_혜_.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그리고 지혜를 닦는. 그런 계_정_혜_순서로 알고 있는데. 왜 팔정도에는 계_정_혜_순서대로 설하지 않고, 혜를 먼저 내놨느냐? 혜가 제일 먼저 나온 이유가 뭘까? 여기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정견과 정사유라고 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다. 끝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정견 정사유는 결국은 수행을 통해서 완성해야 될 부분이기도 하지만,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는 수행의 시작에서부터 수행의 끝까지 항상 함께 가야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를 하지 않고 수행을 한다면, 앞서 제가 잠시 언급을 했듯이 수행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경우를 외도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수행의 방향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을 해 나가는 것이 바른 수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오히려 탐욕과 성냄을 키우는 방향으로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견과 정사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이 두 가지가 먼저 자리를 잡고 나서 확고해진 상태에서 수행을 해야 수행하는 것이 원활하고. 어떻게 해야 수행을 하는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 되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킬 때도 지혜롭게.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로서 계율을 지켜야 되는 것이고, 선정을 닦을 때도 지혜를 가지고.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로서 선정을 닦아야 그것이 올바른 수행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팔정도에서는 이 정견과 정사유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우리가 이론적으로밖에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정제와 팔정도 그리고 12연기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라도 이해를 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계속 수행을 해나간다면, 어느 때인가, 아라한이 되는 순간, 이 사성제 연기에 대해서 완전히 꿰뚫게 되어서 그것이 지혜가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수행하는 사람들은 항상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로서 수행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 나머지 여섯 가지에 대한 설명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법문 > 일묵스님_윤회와죽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 일묵스님_윤회와 행복한 죽음//5월 25일 방송 - 선정수행 (16:52) (0) | 2012.08.05 |
---|---|
16. 일묵스님_윤회와 행복한 죽음//5월 18일 방송 (0) | 2012.07.29 |
14. 일묵스님_윤회와 행복한 죽음//5월 4일 방송 - 12연기(3) (29:04) (0) | 2012.07.15 |
14. 일묵스님_윤회와 행복한 죽음//5월 4일 방송 - 12연기(3) (14:31) (0) | 2012.07.15 |
13. 일묵스님_윤회와 행복한 죽음//4월 27일 방송 - 12연기(2) (26:06) (0) | 2012.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