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제가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렸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좌선을 할 때는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만을 하시면서 강한 집중력, 그리고 알아차림. 그리고 마음의 고요함을 계발하시고요, 경행을 할 때는 발바닥에서 일어나는 발의 감각을 알아차림을 함으로써 또 어느 정도의 고요함과 집중을 계발할 수가 있고요. 그 나머지 생활에서는 무엇이든 간에 왜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 계속 알아차림을 하면서 그런 걸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해. 그리고 우리가 접하는 대상들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 세 가지 패턴으로 일상 삶을 유지하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주 깊이 있는 이해가 점점점점 이루어지고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처음에 물질과 정신이라고 하는 우리가 사는 현상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현상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면 그 다음 단계로 현상의 관계성 연기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고요, 그러면 이 현상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연기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나면, 실질적인 현상들이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관찰을 하게 됩니다. 모든 현상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보게 되면 이런 생명의 지혜, 다시 말하면 일어나고 사라짐을 이해하는 지혜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면요. 그 다음 단계는 사라지는 것만 보게 됩니다. 일어나는 거에 관심이 없고, 오직 사라지는 것만 보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현상들이 항상 사라지고 있다는 걸 보게 됩니다. 내가 주위에 접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계속 사라집니다.
그러면 이런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관찰을 한다는 것은 무상함의 극치를 이야기합니다. 무상함으로써 사라지는 것보다 더 심한 무상함을 뜻하는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무상함의 극치인 사라짐을 자꾸 보다 보면 현상에 대해서 아~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현상이 결코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고, 항상 염오스럽다. 아름답지도 않은 것이구나. 이런 이해에 이르게 되는데요, 이것이 바로 혐오, 혐오의 지혜라고 합니다. 이 혐오의 지혜가 생기게 되면 그다음 단계는 이 현상에 대해서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현상에 대해서 집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위빠사나 지혜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다 보면, 그다음에는 사라짐의 지혜를 이해하게 되면, 그다음에는 현상에 대해서 집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되면, 이제는 현상에 대해서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혐오하지도 않고, 그냥 단지 평온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이 현상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평상에 대한 평온함에 대한 지혜. 이 지혜가 일어난다는 것은 위빠사나 지혜가 최고로 성숙했다는 걸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좀 쉽게 이야기하면 현상에 끄달리지 않는 지혜입니다. 어떤 것이 나타나더라도, 어떤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그 현상에 대해서 평온하게 정말 마음의 동요 없이 그 현상을 맞이할 수 있는 상태. 이런 상태가 이런 현상,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현상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생기게 되면요, 우리 마음이 매우 안정되고, 고요해집니다.
이런 평온한 마음상태는 위빠사나 수행의 절정에 이르렀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요. 이것은 깨달음의 직전의 단계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게 되면, 소위 말해서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 여기서 한 걸음만 더 계속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어떤 현상들을 사라짐을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깨달음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이 첫 번째로 깨달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뭐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수다원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수다원이 되는 순간 우리 삶에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수다원이 되는 순간이 바로 성자가 되는 처음 단계입니다. 그래서 入流입류라고 그러죠. 입류라고 하는 것은 드디어 중생을 벗어던지고 중생으로부터 벗어나서 드디어 성인의 흐름에 들어갔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다.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逆流역류라고 하기도 합니다. 중생의 흐름을 거슬렀다. 이제 드디어 중생의 삶을 거스르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역류라고 하기도 하는데요, 수다원이 되면 확실하게 달라지는 것이 법에 대한 신심이 확고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법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사견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더 이상 내가 있다. 라고 생각을 하거나 영원하다고 생각을 하거나 이런 사견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수다원이 되는 것의 대표적인 것이 정견, 바른 견해가 바로 잡히고요. 또 신심이 확고해진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건 역으로 이야기를 하면 사견과 의심이 영원히 사라지는 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나 더 보탠다면 질투심이나 인색함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을 한다면, 나에게 질투심이 일어난다. 또는 누구에게 뭔가를 주기 싫어하는 인색함이 일어난다. 이렇다면은 아~ 내가 아직은 깨달음이 일어난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셔도 됩니다. 수다원이라는 존재가 어떤 식의 변화가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경전에 언급된 거를 보면요. 수다원이 된 존재에게 남아있는 번뇌는 손톱경이라는 경에 보면요, 이 지구상에 흙하고 손톱위의 흙하고 비교했을 때, 손톱위의 흙은 비유도 안 될 만큼 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수다원이 된 존재에게 남아있는 번뇌는 손톱위의 있는 흙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중생들에게 있는 번뇌를 이 지구상에 있는 흙으로 비유를 한다면 수다원이 된 존재에게 남아있는 번뇌는 손톱위에 있는 흙 정도다.
다시 말하면 거의 거친 번뇌는 거의 사라졌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수다원이 되는 순간 달라지는 것은 더 이상 악도에 절대 태어나지 않습니다. 지옥아귀축생수라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오직 인간계나 천상계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악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났고요, 그리고 또 수다원이 되면 달라지는 것이 아무리 많이 윤회를 해도 일곱생 내로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는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길을 보장받았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수다원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중생계에서 벗어나서 성인류에 완전히 들어가서 이제는 해탈을 열반을 완전히 보장받았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수다원이라는 것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요.
그래서 이제, 수다원에서 지나서 다시 수다원에서도 만약에 수다원이 되고 나서도 위빠사나 수행을 계속해서, 다시 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관찰해서, 다시 또 사라짐만을 관찰한다면, 더 위빠사나 지혜가 예리해져서, 다음에 또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이런 깨달음을 사다함. 이거는 이제 一往來일왕래라고 그러죠. 일왕래라고도 하고 一來果일래과라고도 그럽니다. 왜 일래과라고 그러냐하면 이 사다함이 되면은 거친 번뇌가 다 사라집니다. 거친 감각적 욕망이나 성냄이 사라집니다. 수다원이 될 때는 악처에 떨어질 만한 감각적 욕망이나 성냄이 사라졌지만, 이 사다함이 되면은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라고 하는 것이 현저하게 약해져서 아주 미세한 감각적 욕망과 성냄은 남고요. 거친 건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런 존재는 욕계에 돌아오는 것이 단 한 번, 한 번만 더 욕계로 윤회하지 한 번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왕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요. 여기서 또 더 위빠사나 수행을 계속해서 다음에 또 깨달음이 일어난다면 이런 존재는 아나함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아나함이 되면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수다원과 사다함은 감각적 욕망이나 성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거친 것만 사라졌는데요, 이 아나함이 되면은 성냄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성냄이 사라졌기 때문에 성냄에 관련된 번뇌인 후회도 같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아나함에서 사라지는 번뇌는 감각적 욕망과 성냄과 후회. 이 세 가지가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 감각적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 감각대상에 대해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들을 말하는데요, 탐욕에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과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 재생, 다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그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존재에 대한 욕망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각적 욕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으로 이루어진 욕계에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요, 오직 색계에서만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색계 세상에서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불환이다. 더 이상 욕계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不還果불환과.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아나함에서 더 나아가서 마지막 깨달음인 아라한의 깨달음이 일어나게 되면 지금까지 우리가 끊임없이 고통받게 하고 우리 삶을 윤회하게 했던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탐욕 중에서도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탐욕도 사라지고, 무명도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그 외에 나머지 모든 해태 혼침이라든가 들뜸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모든 번뇌가 소멸하여 완전한 해탈,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번뇌가 없어지기 때문에 번뇌가 없어지게 되면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됩니다. 번뇌가 업을 짓게 하는 기본 동력이기 때문에, 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그래서 아라한이 된 존재는 더 이상 업이 없어집니다. 업이 없다는 것은 선한 마음이나 불선한 마음의 개념이 사라진다는 뜻이 됩니다. 불선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선한 마음도 없고, 단지 작용만 하는 것.
어떤 상황에 대해서 그냥 작용만 하는 마음만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라한의 깨달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들은 그냥 어떤 현상들에 대해서 작용만 하기 때문에 업이 남지 않고, 그래서 옛날에 선사들이 이것을 허공을 지나는 새와 같다.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 거죠. 그래서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다음 생이 없다는 뜻도 되고요. 그게 이제 완전한 행복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수행을 통해서 다음 생에 선처에 태어나는 것도 일종의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성자가 되어서 수다원이나 사다함 아나함이 돼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다음 생에 태어나더라도 윤회에서 벗어나는 아라한이 되는 것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두 번째 즐거운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아라한이 돼서 만약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더 이상 태어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완전한 열반을 실현하기 때문에 빠리니빠나. 다시 말하면 반열반, 완전한 열반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아라한의 죽음이 어떻게 보면 진정으로 행복한 죽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진정으로 행복한 죽음인 아라한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고요, 아라한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설사 깨달음이 일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 이생에서 열심히 수행하는 것 자체가 선한 업을 많이 쌓는 것이 되고요, 선한 업을 많이 쌓으면 다음 생에 선처에 태어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거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우리가 이제 윤회가 어떻게 일어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팔정도 수행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제가 간략하게 설명을 드렸는데요, 실제로 이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인터넷 매체나 이런 걸 통해서 설명을 드리기에는 참 어려운 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수행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직접 어떤 적당한 선원을 찾아가서, 직접 같이 수행을 하면서, 지도를 받아가면서 그렇게 수행을 하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어떤 수행을 하는 데 필요한, 또는 윤회, 우리가 살아가는데 이 윤회라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또 이런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여러분들이 이걸 토대로 해서 여러분 삶 속에서 항상 소위 말해서 팔정도를 실천을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고,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 때는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여러분들이 저의 법회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오늘로써 이 모든 법회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이 법회에서 이루어진 모든 내용들이 여러분들 삶에서 많은 이익이 되고, 또 여러분들이 수행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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