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저는 108배 절을 할 때,
50배 까지는 그냥 아무 마음 없이
제 생각에는 그냥 잘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60배나 80배쯤 하고 나면,
옛날에 누구한테 말본새 없이
입방정을 떨었던 그런 생각들이 올라와서
지금 몇 배를 했는지?
너무 헷갈립니다.//
어제 남편하고 싸웠거나 애한테 얘기했던 거를
그때는 잘했다 해서 내가 큰소리치고 화를 냈는데
절을 하다가 보니까
“그 참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생각이 드는 거 하고
잘못한 거를 후회하는 거하고는 틀려.
그럼 이 보살이 갖고 있는 문제는 뭐냐?
“잘못했구나” 하고 끝나야 되는데
“너는 바보같이 수행자가 맨날 잘못한다.”
이거는 후회란 말이야. 아시겠어요?
후회를 한다는 거는
내가 성질 팍 내는 거는
상대편에 잘못한 거를 용서를 안 해주는 거 아니에요, 그죠?
후회를 하는 거는
자기 잘못을 자기가 용서를 안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을 미워했다가 이번엔 또 누구를 미워한다?
그런 자기를 미워해.
잘못한 남을 미워했다, 이번에 또 잘못한 누구를 미워한다?
자기를 미워해.
그렇기 때문에 이건 똑같아
남을 미워하면 꼴보기 싫고
꼴 보기 싫은데 그만 꺼져라 그러는데
안 꺼지고 계속 있으면 어때요?
밀어내고
밀어내다 안 가면 나중에 어떻게 한다?
죽여버려요.
그게 살인이고.
자기가 꼴보기 싫으면
첫째 아까 ‘부끄럽다’ 이 말도
표현을 그렇게 하셨긴 했지만
‘부끄럽다’ 이것도 가장 자기를 미워하는 첫 출발점이야.
자기가 미우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기가 싫어.
마치 남 미우면 남이 보기가 싫은 것처럼
자기가 보기 싫은 게 뭐다?
부끄럽다. 이 말이야.
거기서 조금 가면
“너 같은 건 죽어야 돼”
자꾸 가면.
내가 내가 싫어, 나를 미워해
그러다가 “너 같은 건 죽는 게 차라리 낫다”
이러면 뭐 한다?
자살한다.
그러니까 자살과 살인은
똑같은 잘못된 심리현상에서 오는 거다.
그러니까 남을 미워하는 거나 자기를 미워하는 거나 동격이다.
후회하는 게 수행이 아니에요.
부끄러워하는 것도 수행이 아니에요.
이거는 밖으로 향했던 게
거꾸로 뒤집어져서 나타난 병의 일부다.
“아하, 그건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이걸로 끝나야 돼.
스님 말씀 들으니까
“내가 돈에 집착했구나”
그러니까 알았어? 몰랐어?
알았으니까 얼굴이 탁 패해져야 돼.
“스님 얘기 들으니까 내가 바보 같았다.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다. 아이고 얼굴 어떻게 들고...”
이 생각하는 거는 자기를 방어하는 거야.
자기는 뭔가 좀 잘나야 되는데
스님 얘기 듣다 보니까 자기가 좀 못나졌어.
못난 자기를 자기가 용서하기가 싫어.
이게 뭐냐?
아직도 지잘났다는 게 안 없어졌다, 이거야.
지 잘났다고 바깥에서 고개 들고 세우는 거나
숙이고 부끄러워하는 거는 거나
이게 자기 잘났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내세우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는 거야.
자기라는 걸 놓아버리면 어떠냐?
부끄러워할 것도 없어.
그냥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스님 말씀 듣고 보니까, 내가 내 상태를 이제까지 몰랐는데, 그런 거구나’
이렇게 되기 때문에
아는 거는 자기를 학대하지 않는다.
마치 잘못한 남을 용서해 주듯이 잘못한 자기도 용서해줘야 돼. 미워하면 안 돼.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는 하기 싫다, 하고 싶다
싫다, 좋다.
여기에 늘 끌려다녀.
하고 싶은 거는 해야 되고
하기 싫은 건 안 해야 되잖아.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면
내가 속박을 받아.
하기 싫은 걸 하라 그러면 속박을 받아.
그래서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하기 싫은 건 다 안 하면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냐?
그렇지가 않아.
중생의 자유는 여기까지야.
이게 서양에서 말하는
“자유가 아니면 목숨을 달라” 하는 자유도
하고 싶은 건 하고 하기 싫은 거는 안 하는, 이걸 말해.
근데 하고 싶은 건 하고, 하기 싫은 건 안 한다, 할 때는
이 사람이 어디에 매여 있나?
자기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즉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욕구의 노예다, 이런 말이야.
이 욕구의 노예는
‘지금 담배를 피우고 싶다’
그럼 피워야 되는데, 법당에서 지금 못 피우는 지금 상태에서는
이 사람은 속박을 받아요? 안 받아요?
받지.
옆에 앉은 여자가 보니 참 예쁘다.
엉덩이 좀 더듬고 싶다.
그런데 옆에 딴 사람도 있어서 더듬었다거나 볼탱이 맞을 것 같아서 못 더듬는다.
그럼 이 사람은 지금 자기 욕구대로 안 되니까
지금 속박을 받고 있나? 안 받고 있나?
받고 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건 하고, 하기 싫은 건 안 하는 게 자유라고 할 때는
실제 이 세상에서는 그게 다 되는 게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늘 자유가 속박을 받아.
그러니 이 사람은 완전한 자유에 이를 수가 없다.
인간은 하고 싶은 걸 해도 될 때가 있고
하고 싶은 거를 안 해야 될 때가 있어.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데
하기 싫어도 해야 될 때가 있나? 없나?
있어.
만약에 자기 욕구에 내가 자유롭다.
하고 싶은 걸 해도 되지만
하고 싶은 걸 안 할 수도 내가 있는
그 욕구를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하기 싫으면 안 하고
하기 싫어도 할 수 있는 그런 내 힘이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자유롭나? 안 자유롭나?
자유롭겠지.
이게 해탈이야.
그러면 하고 싶은 건 해야 되고
하기 싫은 건 안 해야 된다.
이게 [쾌락주의]라 그러고
반대로 그걸 무조건 억눌러 봐.
하고 싶은 건 무조건 안 하고
하기 싫은 거 무조건 한다.
이러면 [고행]이 돼.
[해탈의 길]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될 때는 하고
즉 이 방 안에서 지금 담배를 피우는 거는
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될 일이고.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거를 해도 되고, 하고 싶은 거를 안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거 안 해도 되고, 하기 싫은 거를 해도 되고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자유로워.
그러니까 우리가 하고 싶은 거 하고, 하기 싫은 거 안 하는 건
특별히 연습 안 해도 다 되나? 안 되나?
안 가르쳐줘도 할 줄 알지.
그러니까 우리가 좀 연습이 필요하다면 뭐가 연습이 필요하다?
하고 싶은 거는 탁 멈출 줄도 알고
하기 싫은 거는 탁 해버릴 줄도 아는
그 자기 욕구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일정한 훈련이 되면
이 사람은 자유롭겠죠.
그리고 그걸 수행이라고 그래.
이 사람은 자기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행을 한단 말이야.
그러면 절을 하는데
‘절이 하기 싫다’하면 안 해도 돼
절이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지.
내가 지금 수행을 한다 하는 건
이렇게 하기 싫을 때 탁 해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 아니야.
그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는
그건 공부가 아니에요.
하기 싫은 게 공부를 방해하는 게 아니고
하기 싫은 마음 일어날 때, 탁 해버리는 게 뭐라고 했다?
수행이라고 했으니까
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서 수행이 안 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 뭐가 된다?
수행을 한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건 안 시켜도 다 돼.
하고 싶은데 탁 멈출 수 있는 게 뭐다?
그게 공부야.
하고 싶으면
무조건 멈추라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이 필요에 의해서 멈춰져야 될 때
멈출 줄 알아야 돼.
“하고 싶은데 그걸 어떻게 참습니까?”
이러면 그건 얘기할 게 없어.
그러니 절이 하고 싶어서 잘 되고
하기 싫어서 안 되고.
그건 그냥 중생놀음이야.
그건 수행이 아니야.
절을 하고 싶어서 실컷 했다, 그럼 수행 잘했고
하기 싫어 안 했다, 그럼 수행 안 했느냐?
그거는 실컷 한 것도 수행이 아니고
안 한 것도 수행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건 자기 욕구 따라 한 거니까.
다리 운동을 했다.
다리 운동은 실컷 했다, 조금 했다, 이건 말이 되지만
그건 수행을 잘했다 못했다는 평가 기준은 아니다.
/수행은
싫은 마음을 보고 놓아버리는 것
그 욕구를 보고 놓아버리는
그걸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수행할 분위기가 좋다, 수행할 분위기가 나쁘다.
이런 말은 성립하지.
나 하기 싫을 때는, 싫은 마음을 과제 삼아서 수행하고
하고 싶을 때는, 하고 싶은 마음을 수행 삼아 공부를 한단 말이야.
그래서 108배 하라고 했는데
오늘 절이 하고 싶어 300배 했다.
그렇다고 ‘수행 잘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야. 아시겠어요?
참회는 마음에서 뉘우쳐지는
“내가 이걸 몰랐구나, 이걸 잘못했구나, 바보같이 그걸 내가 틀렸구나”
이렇게 뉘우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게 뭐다?
참회다.
그럼 두 다리가 잘린 사람도 참여할 수 있겠어? 없겠어?
있겠지.
‘절 못하니까 참회 못한다’ 이래 말할 수가 없겠지.
그럼 절하기 싫은 마음은 이런 법문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알아요?
“그럼 스님, 절 안 하고도 참회할 수 있겠네요”
이런 생각을 해.
두 다리가 멀쩡한데 왜 절을 안 하려 그래?
그건 안 하고 싶은데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건 수행이 아니야.
그럼 절을 한다면 절을 하고
또 절 할 수 없는 조건일 때는
절 안 하고도 참여할 수 있나 없나
있어.
근데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는
공부가 아니다, 이 말이야.
그럼 됐어요?
아침에 수행을 108배 하기로 했으면 그냥 해버려.
하고 싶어도 하고
하고 싶은 날도 뭐 하고? 하고
하기 싫은 날도 하고
생각 있는 날도 하고
생각 없는 날도 하고.
그러니까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생각 있다 생각 없다.
그거에 구애를 받지 마라.
그걸 가지고 논하는 게 바로 번뇌다 이 말이야.
그런 거 구해받지 마.
하기로 했으면 그냥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절로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생각 있다 생각 없다
하는 이런 데 내가 끌리나 안 끌리나?
안 끄달리게 돼.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아.
그래서 자기 내부의 번뇌도
바깥에서 누가 뭐라 하는 소리에도
구애를 안 받게 된다는 거예요.
그럼 공부법이 조금 잡혀요?
쉬운 거에요.
수행법은 아주 쉬운 거요.
조금 더 아직 덜 잡힌 사람, 거기 맞춰서 더 질문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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