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제가 욕심이 좀 많은 것 같아요.
정토회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까 봉사를 더 많이 하고 싶어요.
그런데 직장을 다니고 있다 보니 굉장히 시간이 없습니다.
1년 365일 중에 노는 날이 없어요.
노후를 위해1년은 더 직장일을 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1년을 더 하고 싶으면 그냥 더 하세요.
절에 들어와서 산다고 수행이 되는 건 아니에요.
수행은 전쟁통에도 할 수가 있고, 수행은 싸움 속에서도 할 수가 있고
수행은 앉아서도 할 수 있고, 수행은 서서도 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선을 닦는 사람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다 선정이 된다”, 이런 말이 있죠.
행하고, 가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멈추고
그런 거에 따라서
이래 됐다가 저래 됐다가, 이래 됐다 저래 됐다 하는 거는
경계에 끄달리는 범부중생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수행을 하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둔다든지, 이혼을 해야 된다든지
안 그러면 결혼을 해야 된다든지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봉사를 하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절에 들어오겠다’
이건 말이 돼요.
수행은 모든 경우에서 그냥 자기 마음을 살피는 거니까
이거는 어떤 처한 시간이나 공간하고는
크게 관계가 없는 문제다.
정토회에서 하는 여러 가지 일을
일단 포교활동을, 봉사활동을 내가 좀 해보고 싶다.
이것도 일이죠.
일은 두 가지가 동시에 하기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직장 일을 하든지, 이 일을 하든지
하나는 그만둬야 될 거 아니에요, 그죠?
근데 지금 보살님이
정토회에 와서 일도 하고 싶고, 직장도 다녀야 되겠고
둘 중에 어느 거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조금 번뇌가 생긴다, 이 얘기인데.
그럼 이 번뇌가 왜 생기냐?
이 [번뇌]가 생기는 거는 [욕심] 때문에 생긴다.
그럼 무슨 욕심이냐?
돈을 벌겠다는 게 욕심이 아니에요.
[두 가지를 다 하겠다는 게 욕심이다] 이런 의미고요.
돈을 벌겠다는 게 욕심이 아니고
둘을 다 하겠다는 게 욕심이다.
그러니까 ‘이걸 할까? 저걸 할까?’ 번뇌가 생기는 거는
‘어느 게 더 나을까?’, 이걸 지금 고르고 있단 말이야.
‘어느 게 더 나을까?’ 하는 거는 이익을 추구하는 거란 말이에요.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게 욕심이고
욕심이기 때문에 번뇌가 생기는 거예요.
즉 ‘이혼을 할까? 말까?’ 하는 거는
그거는 번뇌에 속하는 거예요.
‘결혼을 할까? 출가해서 스님이 될까?’
이것도 욕심인 거예요.
왜 그런 번뇌가 생길까?
결혼해서 자식 낳고 재미도 보는 것도 마음에 들고
머리 깎고 중이 되어서 또 존경받는 것도 마음에 들고
이거 할까? 저거 할까? 하는 건
어느 게 더 좋을까? 하는 거니까
어느 게 더 좋은 거를, 자기 좋은 거를 추구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두 번째는 두 개를 다 어떻게
결혼해야 재미도 누리고, 또 존경도 받고, 그런 무슨 게 없을까?
이게 밑에 내재 돼 있기 때문에
이런 걸 뭐라 하냐 하면
욕심이라고 한다.
누가 나한테 와서
“스님, 전 장가를 갈까? 출가해서 스님이 될까?” 이런 생각합니다.
이러면 “이 사람이 구도심이 있구나” 이렇게 볼 것 같죠?
아니다.
“욕심 버려라”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혼을 할까? 말까?’
이 사람도 욕심이예요.
이혼을 하려니 혼자 살아야 되고, 자식도 있고, 이런 또 문제가 있고,
그렇다고 같이 살려니 또 남편 성격이 있고, 또 뭐도 있고
그러니까 ‘그 둘 중에 어느 쪽을 해야 내가 일이 더 될까?’
이런 잔머리를 지금 굴리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머리가 아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익을 놓아버리면 머리가 아픈 게 금방 없어져요.
또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잃는다는 거를 그냥 받아들여.
그러면 이게 싹 없어져 버리죠.
머리 굴릴 것도 없죠.
근데 그 두 가지를 어떻게
이거 놓으려니 저게 아깝고, 저거 놓으려니 이게 아깝고
이렇게 되는 게 욕심이라는 거예요.
돈을 벌겠다, 결혼하겠다
이게 욕심이 아니에요.
그런 거 갖고는 번뇌가 안 생깁니다.
지금 번뇌가 생기는 거는
그냥 직장 다니고, 열심히 돈이나 벌고 살아야 되겠다는 사람보다
이분은 정토회 와서 일하겠다고 마음을 냈으니
마음이 더 구도심에 가깝구나, 이렇게 평가하면 안 돼.
절에 와서 뭐가 하나 더 붙었다?
욕심이 하나 더 붙었다.
이렇게 평가해.
그럼 절에 와서 수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원래 ‘이거 할까 저거 할까’ 이렇게 망설이는 사람이
여기 와서 본문을 듣고
하나를 탁 놔버리는 게 뭐다?
그게 공부를 제대로 한 거다.
법문 들었다고 다 수행이 되는 게 아니다.
혹 떼려다 와서 혹 붙이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
괴로워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절에 왔다가
절에 와서 이것저것 맡아서 더 괴로운 사람 있어.
그 사람도 뭔가 공부가 어딘가 잘못됐어.
절에 와서 뭘 맡았기 때문에 잘못된 게 아니라
뭔가 마음가짐이 병을 고치려다 병을 얻었다, 이런 얘기예요.
병 고친다고 약 먹어서 없는 위장병 만드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있지.
그 병도 안 낫고, 위장병은 하나 더 생기고
이런 케이스가 많다.
그러니까 그 병을 결핵병이 낳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위장병을 좀
더 큰 병을 낳기 위해서 작은 병을 얻는 그런 게 아니라
병도 못 고치고, 병만 하나 더 얻는
그런 오류처방도 굉장히 하는 거다.
/그러니까 보살님이 지금 같은 경우에
그냥 직장을 다니시라.
그러고 시간 나는 대로 와서 본문 듣고, 봉사하고 이렇게 하면 된다./
--
근데 한 발 더 가서 우리가 살펴보면
돈이라는 게 뭐냐?
이걸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게요.
옛날 노예시대에는
사람의 신분을
“너는 노예다, 너는 종이다,” 이래서 딱 묶여 있었죠.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우리가 생각할 땐 ‘도망가 버리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그 사람은 도망가도 어디 가서 살 수가 없어.
첫째는 어디를 가도
사람 안 사는 산속에 자기 혼자 가서는 살 수가 없고
사람 사는 데 가면
“신분이 뭐냐?” 물을 거 아니에요.
양반이면 양반 패쪽이 있어야 되는데 없잖아, 그지?
종이다 하면
어차피 종으로 들어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 종이 도망왔다 하면 그 시대는 어때요?
잡아서 원래 자리로 돌려 보내버린단 말이야.
크게 도망갈 생각을 못해.
딱 묶여 있어.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그 안에서
종질하는 속에서 안종이 있고 바깥종이 있어.
인도에서는 이걸 터치블 언터치블이라 그래
즉 집 안에서 예를 든다면
안주인을 모시는 종, 남자 주인을 모시는 종, 밥하는 종, 청소하고 하는
이거는 안 종에 속해, 집 안에 있는 종.
이거는 주인하고 종이 터치, 서로 이렇게 부딪히나? 안 부딪히나?
부딪히죠.
근데 언터치블, 불가촉천민은 뭐냐?
이거는 주인하고 몸을 부딪치면
저 인간이 부정타는 인간이라 내가 더러워져버려.
그래서 그 인간은 주인하고 부딪히면 안 돼.
그 사람은 집 밖에 살아, 집 안에 살지 않고.
집 밖에서 농사짓거나 소먹이거나 똥치거나 이런 일을 해.
그건 집 안에 못 들어 와.
이게 인도에서 말한 불가촉천민이라 그래.
차이가 뭐냐 하면
애완용 동물을 옛날에 키우더라도
요즘은 개도 집 안에 들어 있지만
개는 바깥에서 키우고
고양이는 집 안에서 키우고 뭐 이런 것처럼
그게 같은 애완용 동물이라도 차이가 있는 것처럼
같은 종인데도 그 차이가 있다.
그럼 바깥 종은 소원이 뭘까?
안 종이 되는 거겠지.
또 종도 주인의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에 따라서 권세가 있죠.
종인 주제지만은 그래도 또 딴 종한테
양반집 종은 그 밑에 종한테, 대감님집 종은 그 밑에 종한테 큰소리 치고 산다.
거기서 떨어져 나오면
그 사람은 죽어.
살 수가 없어.
근데 시대가 바뀌어서 우리나라는 놔놓고
중세 같은면
이 노예가 뭘로 바뀌었어요?
농노로 바뀌었지.
농노는 노예처럼 신분이 완전히 묶인 거는 아니죠.
그런데 농노라는 건 어디에 묶여 있나?
땅에 묶여 있어, 영주한테.
장원 이런 거 중세, 서양역사 배우면서 아시죠?
땅에 땅 묻혀 있어.
이건 그 땅을 떠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조금 달라진 것 같지마는
이게 어디 묶였느냐의 차이가 있지.
근본적으로 똑같아.
그러다가 이 농노가 이 땅에서
자기가 도시에 나아가 일해도 되는데
땅에 묶여 있는 그 돈만큼
도시에 나가 벌어서
딴 데 신분은, 몸은 풀어주는 대신
그만큼 돈을 갖다 주면 해결이 됐어.
이래서 생긴 게 뭐다?
노동자야.
그러니까 오늘날 노동자는 뭐에 묶여 있다?
돈에 묶여 있어.
그러니까 지금 돈에 묶여 있으니까
여러분들은 돈 많이 받는 데는 어디다?
옛날로 치면 양반집 종이고
돈 적게 받는 데는 뭐다?
나쁜 집종이고 그런 거예요.
전부 다 돈에 묶여 있어.
그래서 남편이 돈을 잘 벌면 좋은 사람이고
돈을 못 벌면 나쁜 사람이 돼.
남편 남편이 돈을 잘 벌 때는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복을 죄가 저런 남편 만났나” 이렇게 생각하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서 돈을 못 벌면 어때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인간 만났나”
이 좋은 남편 나쁜 남편도 뭐로 평가된다?
돈으로 평가 돼죠.
이거 하고 살아야 될까? 말아야 될까?도
돈 있을 때는 “살아야 되겠다” 싶고,
돈 없을 때는 “살면 뭐하노? 나만 손해지”
이 평가도 돈에 의해서 돼.
그러니까 서양에서 사랑의 평가가 뭐에 의해서 된다?
다이아몬드 캐럿에 의해서 결정되잖아요, 그죠?
우리는 그거 반지 갖고 뭐? 이러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다 그거를 몇 캐럿을 사주냐에 따라서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의 기준이 된다 이 말이지.
근데 요즘은 우리도 다 그렇게 됐어.
그래서 자식한테든 누구한테든 선물을 사줘도, 생일 선물을 사줘도
애가 맨 먼저 묻는 게 뭐예요?
“엄마 이거 얼마 줬어?” 이렇게 묻지
“이거 얼마짜리야?” 다 이렇게 묻잖아.
절에 와서 이 여자가 신심이 깊나 안 깊나 하는 것도
가끔은 뭘로 평가될 때가 있다?
보시금으로 평가될 때가 있잖아.
절에 여기 연등 달 때도 보통 대부분의 절에서
많이 내는 거는 큰 등으로 앞에 달아주고
적게 내는 건 작은 등으로 뒤로 달잖아, 다.
다 돈으로 평가되잖아.
그러니까 이거는 옛날에 이 종에서 벗어난 게 아니야.
-옛날에는 신분에 묶여 있었고
-한 때는 토지에 묶여 있었고
-지금은 돈에 묶여 있어.
돈의 종이야.
그럼 부처님이 더 나을까? 하느님이 더 나을까?
이것도 요즘은 뭐에 의해서 평가된다?
돈에 의해서 평가된다.
절에 다니다가 사업이 안 되다가
교회 다니다가 사업이 잘 되면
“역시 하나님의 영험이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도 돈에 의해서 평가돼.
그러니까 오늘날의 유일 신앙
오늘날의 신앙은 하나밖에 없어.
그건 불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야.
뭐다?
돈교야.
그 돈교 밑에 브로커로서 뭐가 있다?
부처도 있고, 기독교 하느님도 있고, 여러 개, 알라도 있고 이래서 서로
“어느 거 믿으면 돈 더 잘 번다” 이거 경쟁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거기에 지금 매여 있다, 이거야.
/그러면 그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느냐?
아니다.
돈이 우리를 지금 속박하고 있고
모든 사랑도 모두 평가를 다 돈 갖고 다 하고 있다/
옛날에는 신분이
양반이냐? 상놈이냐? 신분이
그 인간의 모든 거를 좌지우지했는데
부처님이 ‘인간의 귀천은 그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다’ 해서
계급 차별을 부정하셨잖아.
그럼 부처님이 지금 오신다면 어때요?
‘인간의 행복이 그 돈의 유무에 의해서 오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실 거예요.
그런데 보살님이
자신의 인생을 지금 돈에다가 걸어놓고 산다 이거야
노후도 뭐 갖고 보장한다?
돈 갖고 보장하고
남자보다도 뭐가 더 믿을 수 있다?
돈이 더 믿을 수 있으니까
지금 부부가 결혼해도 재산은 어때요?
남편 아내 따로 하려고 그러잖아.
아차해서 이혼을 해도 뭐는 있어야 된다?
돈은 있어야 돼.
그리고 재산도 자식한테 물려줘 버리면
나중에 과시 받으니까, 죽을 때까지 쥐고 있어야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불법을 가지고,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해탈을 구한다면
이 돈에 의지해서 사람을 평가하고
돈에 의지해서 자기 인생을 보장받으려고 하는 거는
어리석은 짓이다.
돈은 다 필요 없고 돈은 부정하고
돈은 손도 대지 말고, 돈은 그냥 거머리처럼 멀리해라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사람이 옷을 입어야 돼?
사람이 옷걸이가 돼야 돼?
사람이 옷을 입어야지.
옷이 사람에게 쓰여야 되잖아.
사람의 옷걸이가 되면 마네킹이잖아.
근데 여러분들이 좋은 옷을 한번 입어봐.
어디 가서도 자기도 모르게
옷을 좀 자기보다 앞세우나? 안 앞세우나?
심리가 그렇게 돼요? 안 돼요?
그런 경험 안 해봤어요?
보통 옷을 입고 있을 때는 좀 구겨지고
애가 와서 좀 밟거나 국물을 쏟아도
털면서 애 걱정 먼저 하지 마라.
비싼 옷을 입고 있을 때 애가 국물을 쏟으면
옷 걱정하나? 애 걱정하나?
옷 걱정부터 먼저 해.
그러니까 이게 전도된다.
옷이 주인이 된다.
옷이 주인이 돼.
그래서 집이 크면 집이 주인이 돼.
집이 사람을 지키는 게 아니고
사람이 집을 지켜
“왜 법회에 안 나옵니까?” 하면
“아이고 아무도 없어서요.”
“아무도 없는데 왜 문제냐?”
“집 지켜야죠.”
그럼 내가 그러지.
“당신 집 지키는 개냐?”
집을 크게 하면 집을 지켜야 돼.
보석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보석을 지켜야 돼.
그게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내가 그걸 지켜.
좋은 옷을 입으면
옷이 나를 감싸는 게 아니라 내가 옷을 감싸야 돼.
내가 돈을 부려 쓰는 게 아니고
우리 전부 다 지금 돈의 노예가 돼 있다.
돈의 종이 돼 있다.
사랑도 돈에 의해서 결정이 돼.
아까도 내가 물어보니
어떤 여자가 찔찔 눈물 짜고 울고, 남편 때문에 못 살겠다 그래.
왜 그러냐?
처음에 결혼할 때는 남편이 그래도 살림이 괜찮았는데
사업을 하다 몇 번 실패해서 처가까지 돈 빌려서 쫄딱 망했어.
이리 사느니 이혼하는 게 낫겠다.
근데 남자가 없이 살면 되는데 너무나 돈돈한다 이거야.
그래 내가 가만히 보니까
지금 이 여자들 뭐 하는 거다?
남자하고 살까 말까도
돈이 없으니 지금 살까 말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이것도 평가 기준이 뭐다?
돈이야.
그 남자만 돈 밝히는 아니라 너도 똑같이 돈 밝힌다.
/살고 안 살고를 왜 돈 갖고 결정해?
그 사람이 망하면 망하는 거고.
그럼 사업이 망해서 경제적으로 어렵지.
그게 왜 살고 안 살고의 결정 기준이 됐냐, 이거야.
살다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고,
살다 보면 날씨가 답답할 때도 있고 추울 때도 있고, 비가 올 때도 있고 맑을 때도 있고 그것처럼 그런 거지.
이게 돈에 노예이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야./
스님이 법문을 하고 돈을 받는다, 그러면 어떻겠어?
나도 모르게
어느 절에 가서, 어디 가서 강의하면 많이 주나?
이런 게 자꾸 신경이 쓰이겠지.
“거기는 몇 번 갔는데 매년 5만 원밖에 안 주더라.”
“거기는 갈 때마다 50만 원 100만 원 주더라.”
그럼 그쪽에서 요청하면 선뜻 가고
이쪽에서 요청은 핑계대고 그러겠지.
그러면 내가 지금 뭐에 묶여 있다?
돈이 묶여 있지.
내가 부처님 제자니까
돈이 안 묶이려고 내가 법사비를 안 받는 거야.
법문하고 돈을 안 받아.
법문하고 내가 돈을 안 받으니까
이쪽이 큰 절이든 그쪽이 작은 절이든
나하고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그냥 가서 법문만 할 생각이니까.
--
그런 돈을 1년 더 벌겠다, 이 말은
돈노예, 종노릇 1년 더 하고 부처님한테 오겠다, 이런 얘기야.
그러면 종노릇이 그리 하고 싶거든 1년 더 하고 오라, 내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이제는 이 종노릇 그만해야 되겠다. 그러면
오늘 저녁에 이 법문 듣고 끝을 내고.
...
그런데 이렇게 이치를 알고
“내가 여기 매여 있다” 하는 걸 알고 살아라.
그러면 그 메인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
그냥 이 집에서 돈을 주기 때문에 일하는 게 아니고
이게 필요하니까 일을 한다.
적게 주든 많이 지든
이게 필요하니까 일을 한다.
이래 되면 벌써 내가 돈에 매이지 않게 돼.
그러면 거기에 있어도 뭐가 된다?
이미 수행이 되는 거다.
절에 여기 와 있다 하더라도
이 생각이 안 바뀌면
그건 수행이라고 할 수도 없고 해탈로 못가.
몸뚱이가 절에 있냐? 어디 있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서 세간 출세간이 절의 담장으로 나눠지는 게 아니란 말이야.
몸이 저자에 있어도 구도심이 있으면 출세간에 있고
몸이 법당에 앉아 있어도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으면
그거는 세간의 진흙탕에 빠져 있는 거다.
결론 말씀드리면
‘절에 들어올까 말까’
이렇게 걱정이 되는 거는 욕심 때문에
그렇고 한 1년 더 있으면 좋겠다 싶거든
기꺼이 더 하셔라.
그리고 절에 시간 나는 대로 어때요?
편안하게
절에 와서 뭐 해야 된다, 너무 욕심 내지 말고
편안하게 시간 나는 대로 와서 봉사를 하셔라.
그런데 조금 더 깊이 공부를 하셔서
정말 내가 해탈해야 되겠다 생각하거든
굳이 해탈할 거면
평생 종노릇 해야 되겠다 하면 몰라도
어차피 종노릇 그만해야 되겠다, 이 생각하면
1년 있다가 그만할 게 뭐 있어?
지금 그만하지.
그리고 옛날 사람이 그 집에서 못 나와.
그 집에서 나오면 죽는 줄 아는 것처럼.
지금 여러분들이 돈을 놓고 못 나와.
왜?
돈 놓고 나오면 당장 지금 죽는 줄 알기 때문에.
그런데 돈 놓고 나와도 아무 일도 없어.
정토회에 와서 살면
아침에 밥 먹고 저녁도 주고 그래
그냥 와서 살면 돼.
만 명이든 천만 명이든 내가 다 받을 수가 있어.
나 같이 살려면.
우리는 물건 안 사기로 하니까 주는 밥 먹고
요즘 헌옷 남아도? 모자르나?
남아돌지.
북한돕기한다면 너무너무 좋은 옷이 막 산처럼 들어와.
그거 입고, 또 봉사하고 이렇게 살면 돼.
근데 이래 묻는다.
“몇 시에 일어납니까?”
“4시에”
“4시에 일어납니까?”
“고기 줍니까?”
“안 준다.”
“그럼 맨날 채식하고 살아야 됩니까?”
“외출 시간에 있습니까?”
그런 얘기를 해.
그러니까 그 세속이 괴로움이라면서도
그 세속적인 거를 미련을 갖는 거예요.
술 먹어서 위 빵꾸 나서 치료하러 가는데
“병원에 가면 술 줍니까?”
이래 묻는 사람하고 똑같아.
그럼 이러거든요.
“아이고 난 그런 데는 못 살아요.”
‘난 그런 데는 못 살아요’ 하는 거는
아무리 괴롭다 해도
지금 사는 게, 스님 사는 거 보다 낫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살아라, 이거야.
내가 동정할 필요 없잖아.
나보다 더 잘 먹고 살겠다는데.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괴롭다고 하소연 해봐라.
스님이 눈썹 하나 깜빡하는가.
동정 안 하죠.
왜?
그래도 아직 나보다 나은데 뭐.
나하고 같이 살자면 안 살려니까.
그게 다 이게 뭐냐?
호강이 받치고 요강깨는 소리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 더 자기를 깊이 살펴보시라.
그러면 인생 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지 않을까.
질문하시는 분, 얘기가 됐습니까?
ㅎㅎ
질문하는 사람 핑계 잡고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예요.
내 할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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