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가 성불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기존의 수행을 몸소 겪어 보고 그 한계를 처절히 맛보았습니다.
이후 더 높은 경지를 위해 홀로 수행에 들어갔고 이것마저 완전히 실패하게 됩니다.
이로써 수행에 대한 그의 금강석과 같은 원력은
바닥까지 무너지고 허탈한 마음만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런 허탈한 마음마저 사라지면서 그냥 있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은 마음 상태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 과정에 그의 마음을 옥죄던 차원의 설정값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면서
불현듯 5차원 의식(무상정등각)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싯다르타의 성불 과정을 되돌아보면 그냥 있는 상태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물론 싯다르타가 가끔씩 한 생각을 일으켜 실존(제1원인)의 화두를 잡은 건 맞지만
수행의 근간은 역시 그냥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중도라고 부르는 그냥 있는 상태에 주안을 둬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냥 있는 상태’는 매우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 해보면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냥 있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생각을 멍 때리거나 생각이 없어진 상태를 떠올릴 수 있는데
그것은 ‘그냥 있는 상태’가 아니라 생각에 의해 꾸며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무념무상에도 차원의 설정값은 그대로 붙어 있게 됩니다.
혹자는 싯다르타가 목숨을 걸고 갈구한 수행이 무너짐으로써 ‘그냥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면이 매우 큽니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싯다르타와 같거나 비슷한 수준의 수행을 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수행자분들 사이에서도 싯다르타처럼 ‘그냥 있는 상태’가 조성된 경우가 나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그냥 있는 상태’가 무상함의 궁극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싯다르타의 수행에 한 가지를 더 보태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호흡입니다.
사실 호흡에 따라 선정에 몰입하는 것에 차이가 납니다.
번뇌망상을 거둘 때도 호흡은 매우 유용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에서 호흡의 관찰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생각과 싸우면 백전백패라는 사실은 수행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강적과 대치했을 때 흔히 그 보급로를 끊는 전술을 택하죠.
마찬가지로 이길 수 없는 생각과의 전쟁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의 보급로를 공략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보급로가 바로 호흡입니다.
그래서 수행승들은 예로부터 호흡을 중시해 왔고
이런 이유로 싯다르타가 성불할 때도 호흡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 것으로 예측합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싯다르타의 호흡이 그의 깨달음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단언하자면 그건 사실입니다.
싯다르타는 의식의 구조적 변화에서 성불의 9할을 이루었고
나머지 1할은 호흡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호흡의 비중이 적은 것 같지만, 퍼즐의 한 조각은 그림의 완성을 좌우하는 마지막 열쇠가 됩니다.
그래서 호흡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의 대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호흡의 대칭은 생존을 위한 것인데, 이는 곧 생각의 대칭에도 직결합니다.
생각의 대칭을 깨기 위해서는 그 보급로인 호흡의 대칭을 깨야 하는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죽어야만 호흡의 대칭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것이 호흡을 가라앉혀 그 대칭성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깊은 호흡이나 복식 호흡으로 알려진 조식(調息)입니다.
조식은 선도나 불도를 통틀어 모든 호흡의 근간이 됩니다.
물론 선도에선 복식 호흡에 단전과 운기주천의 단계를 만들었고
힌두교에서는 차크라라는 에너지 통로를 개설해 호흡의 응용을 멋지게 승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호흡의 대칭성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의 호흡은 무엇이 달랐을까?
싯다르타는 지금껏 알려진 불가의 ‘선호흡’, 선도의 ‘단전호흡’, 힌두교의 ‘차크라호흡’과 결이 달랐습니다.
싯다르타의 호흡 역시 대칭을 깨지는 못 했지만 그것을 조화로 바꾼 특색이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대칭이 창조를 위한 조화로 바뀐 호흡인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시시각각 일어나는 분별이 창조를 위한 도구가 되면서 번뇌망상의 구조도 바뀝니다.
생각이라는 적을 무찔러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적이 아닌 아군으로 동화시키는 것
이것이 싯다르타의 호흡인 조화식(鳥和息)입니다.
이런 조화식이 싯다르타의 의식에 결합해 작지만 절대 작지 않은 힘을 보태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과거로 돌아가서 싯다르타의 호흡을 면밀히 살펴봅시다.
싯다르타는 세 명의 스승 곁을 떠나 6년 동안 홀로 수행에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그는 6년 동안 24시간 내내 수행만 했을까요?
아니면 하루 12시간 수행하고 나머지 12시간은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했을까요?
사실 사지를 적당히 움직이지 않으면 수행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토굴에 갇혀 한두 달만 지나도 만신창이가 되지 않던가요?
몸이 힘들어지면 그냥 버티는 것이지 수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운동은 필수입니다.
달마가 소림 무술을 만들어 낸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던가요?
싯다르타 역시 일정 수준의 건강을 유지해야 했고
그래서 그는 가끔씩 가벼운 산책을 하는 정도로 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산책 내내 싯다르타는 자연과 한없는 공명을 하였습니다.
풀 내음과 바람의 감촉도 느끼고, 숲이 내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다가 싯다르타의 정신을 끌어모으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새소리였습니다.
새의 고음에서 울려 나오는 청명한 소리는 싯다르타의 지친 마음에 위안을 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수행 중에 자신도 모르게 새소리에 흠뻑 몰입하기도 했습니다.
싯다르타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새와 일체 되는 느낌을 얻었고
어느 때엔 며칠 동안 새가 되어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꼬박 6년을 보내자 싯다르타의 하복부에 새와 유사한 호흡 메커니즘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인간이 제아무리 단전호흡의 고수가 된다한들
새의 호흡에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싯다르타는 저절로 새의 호흡을 터득해 나갔고
어느 때부터인가 그의 호흡은 자연에 조화를 한껏 머금게 되었습니다.
호흡의 대칭은 조화가 되었고
생각의 번뇌는 적이 아닌 창조 그 자체로 화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의 의식은 놀랍도록 외계와 공명하였고
어느 순간부터 그냥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일찍이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무상정등각입니다.
싯다르타는 성불을 향한 한 조각 퍼즐을 새의 조화식에 얻었으니
이것이 바로 붓다의 호흡에 얽힌 비밀입니다.
그렇다면 새의 호흡을 어떻게 익힐 수 있을까요?
싯다르타처럼 새와 공명이라도 해야 할까요?
싯다르타 같은 근기를 타고났다면 가능하겠지만
대부분은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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