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란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걸린 피조물을 의미합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時空의 장벽 앞에서는 한없이 초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이란
오로지 時空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의 난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먼저 공간부터 살펴볼까요?
공간이 등장하면
우리들의 존재는 먼지처럼 한없이 작아집니다.
너무 보잘것없어서 깊은 자괴감마저 듭니다.
그래서 먼저 덩치를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무조건 연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외계와의 공명(共鳴)을 통해 개체의식에서 전체의식으로 조금씩 확장해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전체의식이란 것이 말처럼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탐진치가 조금이라도 작동하면 다시금 개체로 돌아와 먼지처럼 되고 마니까요.
그래서 탐진치를 다스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것들의 뿌리인 我相부터 손봐야 합니다.
我相이란 ‘나’라는 개체가 실재한다고 믿는 관념을 총칭합니다.
‘나’가 실재하니 탐진치가 動하면서 개체의 한계에 걸리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튼 연결을 통해 전체의식을 갖춰 나가는 것이 공간적 수행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간적 수행법은 결국 마음 수양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계속해서 마음을 닦아 나가야 하는데
사실상 거울처럼 온전히 비추는 상태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마음에 티끌이라는 着이 하나도 없게 되면 해탈이 되겠지요.
‘나’라는 개체가 소멸되어 아무런 걸림도 없게 된 열반의 상태입니다.
이때의 의식을 ‘전체의식’ 혹은 ‘순수의식’이라 하는데,
공간의 문제는 어느 정도 풀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시간의 문제란 존재의 시작과 끝을 찾는 화두입니다.
다시 말해 ‘제1원인’을 깨우쳐야 답을 찾게 되는데, 해탈이나 열반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적 수행법은 어떨까요?
시간적 수행법을 최초로 꺼내든 분이 바로 싯다르타입니다.
당시 브라만교의 수행은
공간이 대상이고, 그래서 열반과 해탈을 추구해 왔습니다.
이에 비해 싯다르타는 오로지 시간의 문제를 푸는 것을 목표로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출가 이유가 시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익히 아시듯 싯다르타는 노인의 죽음을 보면서
시간의 한계를 절감했고
생로병사를 야기하는 시간과 맞서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싯다르타는
브라만교에서 추구하는 ‘해탈과 열반’이라는 공간의 완성을 이루고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1원인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으니까요.
당시에 시간적 수행을 가르치는 스승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래서 싯다르타는 나홀로 수행에 임하게 됩니다.
공간적 수행에서는 마음이 수행의 대상이 됩니다.
마음을 닦아 전체의식을 회복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시간적 수행에서는 마음보다는 생각에 초점을 둡니다.
이것은 생각을 없애거나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을 최고도로 발달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생각을 잘 써서 ‘제1원인’의 화두를 푸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간적 수행처럼 생각을 멈추거나 끊어내면 곤란합니다.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켜 지혜를 키우고
나아가 반야를 증진해 ‘제1원인’을 풀어내야 합니다.
결국 싯다르타는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생각을 무기로 삼아 시간과 진검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1원인’을 깨닫게 됨으로써 시간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제1원인’이란 시간과 공간이 나뉘기 이전이기에
공간의 문제도 덩달아 풀립니다.
싯다르타는 시공의 한계를 극복하여 인류 최초로 성불하게 됩니다.
정리하면 수행은 마음을 닦는 ‘공간적 수행’과
생각을 키우는 ‘시간적 수행’으로 나뉩니다.
전자는 하근기의 중생이나 신도들에게
후자는 상근기의 수행인에게 적합합니다.
그렇다면 모두들 시간적 수행을 선택하면 간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조적으로 시간적 수행을 해 나가기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시간을 떠올리는 순간
쉽게 망각하게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적자생존을 위해 어느 생물을 막론하고
죽는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게 설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공간을 위해 시간을 지워 버린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인간은 죽기 직전까지도 욕심을 놓지 못해
갖은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더군다나 시간의 근원을 따져 들어가면 차원의 방해까지 받게 됩니다.
그래서 상근기의 수행자들을 제외하고는 시간을 화두로 삼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이 불교나 힌두교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수행자들이
마음 닦는 것을 수행의 대간으로 여기게 된 이유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인류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학자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학자들은 마음과 같은 주관을 배제하고
오로지 생각 하나만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시간적 수행을 할 수 있는 이성이 어느 정도 구비되어 있지만
수행자들은 전혀 그렇지 못한 현실인 것이지요.
마음을 벗어나면 수행이 끝장나는 걸로 신앙처럼 믿고 있으니까요.
깨달음은 철저히 객관적 진리의 세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은 생물학적 망각 기능을 극복해
시간을 화두로 삼을 수 있으신가요?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달마나 원효에 버금가는 상근기를 타고난 진짜 수행자일 것입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시간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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