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점수돈오인가, 돈오점수인가? 현란한 말장난의 최고 고수들

Buddhastudy 2022. 2. 2. 06:37

 

 

 

수행이 과정이면 깨달음은 목적지입니다.

그렇다면 수행을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해야

목적지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깨달으면 완전히 끝인지

아니면 깨닫고 나서도 일정 시간 동안 계속해서 수행해야 하는지도 의문일 것입니다.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당나라의 승려인 종밀이 다섯 가지 경우수를 들고나왔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순서대로 단계를 밟아서 일시에 깨닫는 점수돈오입니다. 두 번째는 닦는 과정을 단번에 뛰어넘고 서서히 깨달아 나가는 돈수점오입니다.

세 번째는 급하면 체한다는 말처럼 서두르지 않고 수행하여 마치 과일이 익듯이 서서히 깨닫는 점수점오입니다.

네 번째는 단번에 깨달은 뒤에 깨달음을 숙성시켜 나가는 돈오점수입니다.

다섯 번째는 일거양득이라고 한꺼번에 깨달음과 그것의 숙성을 해결하는 돈오돈수입니다.

 

, 그렇다면 이상의 다섯 가지 수행 과정 가운데 어느 것이 진실에 부합할까요?

 

물론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적합한 모델이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교학의 반야를 증득해 나가거나, 고행을 통해 삼매를 이루려는 쪽은

점수가 기본 바탕이 돼야 합니다.

반면에 의식구조에 일련의 충격을 가해 단번에 각성을 얻으려는 쪽은

돈오를 중심에 둘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자에 따른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주류는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려 중기의 승려 지눌이 돈오점수를 채택한 이후

줄곧 이것을 교과서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혹자는 돈오돈수나 점수돈오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역시 돈오점수입니다.

 

사실 점수점오나 돈수점오는 가능한 경우수를 모두 제시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 넣은 성격이 짙습니다.

그래서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우선 점수돈오는 가장 평이하게 보입니다.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자는 보편적인 명제니까요.

 

그런데 수행승들이 이렇게 평범한 주장을 하면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했는지

대부분 돈오점수에 애착을 갖습니다.

그리고 사실 돈오는 선종의 선문답이나 간화선과도 잘 부합하는 면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선종에서 돈오점수를 교과서로 채택한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돈오점수가 성립하려면

여기서의 돈오가 불완전한 깨달음으로 전제돼야 합니다.

그래야만 점수라는 숙성과정이 따라붙을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돈오를 이치적 각성인 해오로 놓고

이후에 점수를 통해 증오나 성불에 이른다는 논리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해오와 같은 불완전한 것을 가지고

돈오게 빗대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돈오는 온전한 깨달음이 돼야 하고

이렇게 되면 돈오의 뒤에 점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돈오를 증오나 성불로 놓으면

돈오돈수가 됩니다.

 

싯다르타가 무상정등각을 성취한 이후

한동안 앉아서 그 경지에 머무른 정도가 돈수일 것입니다.

 

정리하면 돈오를 불완전한 깨달음을 놓으면 점수가 길을 잃고

돈오를 온전한 깨달음으로 놓으면 돈수가 뒤에 붙게 됩니다.

 

이처럼 깨달음의 정의에 따라

각각의 위치가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히 깨달음에 대한 정의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 무얼까요?

 

깨달음은 단적으로 말해 1원인에 대한 진리적 자각입니다.

이것을 세간의 말을 빌려 비판해 보자면 해오입니다.

 

해오는 깨달음을 이치적으로 풀어서 터득한 상태로서

대개 견성보다 하위 개념으로 봅니다.

그런데 해오로써 1원인에 접근하면

지식적 앎심리적 상태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정혜쌍수의 쌍두마차가 일두마차가 되어

아는 것이 곧 상태이고 상태가 곧 아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설프게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해오를 하면

그것이 곧 증오이면서 의식의 상태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1원인에 대한 진리적 자각만으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1원인을 등지고 해탈, 열반, 삼매, 선정등의 상태적 접근을 하면

그 궁극에 이르러서도 1원인의 화두가 풀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치로 접근해서 앎의 궁극에 이르면 상태와 하나가 되지만

상태의 궁극에 이르러서는 앎이 무조건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극소수의 타고난 도인은 예외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이런 대원칙에 걸립니다.

 

이런 이유로 깨닫기 위한 길이 여러 갈래지만

이왕이면 가장 확률이 높은 진리적 자각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즘 같은 과학의 세상엔

해오와 증오의 대문이 어느 때보다 활짝 열려 있지 않습니까.

 

깨달음엔 1등급 깨달음도 없고, 2등급이나 3등급의 깨달음도 없습니다.

빛은 너무 환해 구분할 필요조차 없는 것처럼

깨달음 역시 너무 명확해서 상대적 구분 따위는 일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껏 알고 있는 힌두교식의 깨달음이 꽤나 부족하다 보니

그것을 보완할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그래서 나온 것들이 종밀의 다섯 가지 수행 과정입니다.

 

대승기신론이나 화엄경에서 깨달음에 계단을 만든 것도 같은 이유이고

참나에서 깨어 있는 시간을 따지는 것도 이런 고충 때문입니다.

 

대저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깨닫고는 싶고

그렇다고 깨달았다고 자부하자니 뭔가 미진함이 남아 있고

그래서 깨달음의 명찰을 달고

부족한 것을 하나씩 메워 나가자는 발상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종밀의 다섯 가지 수행의 과정은

깨달음의 정의를 바로 세우지 않음으로써 생긴

일종의 해프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돈오를 온전한 각성으로 전제하면

그것에 숙성의 꼬리표를 달지 않은 점수돈오와 돈오돈수만 통용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깨달음에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깨달음에도 품질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고 믿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