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많은 선문답의 모습들은
그 스님들이 무엇을 어떻게 공부했는지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문답의 과정에 도달하기 위해
스승과 제자가 쌓은 수행의 과정은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선의 전승이 내려오는 과정에서
이런 내용들보다는
촌철살인의 선 문답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고
경전 공부에 대해서는
경전만을 파고드는 이른바 경승,
법사에 대한 경계의 법문도 많아서
마치 선불교는 경전 공부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는
오해가 생겼습니다.
“너는 어떤 일에 힘쓰고 있는가?”
“예, 화엄경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몇 종류의 법계가 있는가?”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가 있습니다.”
제안 손님은 설법 할 때 쓰는 불자를 들어보이며 물었다.
“이것은 무슨 법계냐?”
“어...”
“생각하여 알고 따져서 푸는 것은 죽은 귀신들의 생활 계략이다.
태양 아래의 외로운 등불 신세처럼
결국에는 그 빛을 잃고 만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라는
2016년에 나온 실화 영화가 있습니다.
2009년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US에어웨이 항공기는
엔진이 모두 꺼진 상태에서 수상착륙에 성공해
한 명의 희생자도 없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항공기의 기장이었던 체슬리 셀렌버거는
관제탑의 회항 명령을 거부하고
비상 착륙을 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훌륭한 것이었고
만약 회항했다면
착륙 고도가 너무 낮아져 추락했을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옵니다.
문제는 그가 왜 기준과 절차를 무시했냐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웬만한 조종사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많이
매뉴얼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준과 절차에 대해 깊고 많이 알았기에
그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빈 깡통은 요란하기만 할 뿐
결코 이런 인연을 만들지 못합니다.
당연하게도 선불교의 스승들은
하나의 각론에
경전 20개를 인용해야 한다고 할 정도의
치열한 학승들이었습니다.
경전 공부를 멀리하거나 교학을 무시하는 경우는 없었으며
조주 스님처럼
밥 먹을 때를 빼면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교와 선 모두에 열심인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조 혜능 이후 돈오의 인연이 드물어지고
선이 문자선의 수준으로 내려오면서
마치 불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나 정견을 세우는 일은
깨달음의 방해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문자선을 하는 경우에는
경전을 아예 외면하는 전통마저 생겨났습니다.
박건주의 <능가선법 연구>를 보면
이런 상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법계냐?”라고 물은 제안 스님이
과연 화엄경의 법계를 몰랐고
법계에 대한 지식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한 것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죠.
화엄의 법계를 눈앞의 현실로 적용하지 못하면
그 지식이 그저 개념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의만 골몰하는 강승에게 경고한 것이 맞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까?”
“나는 그 어떤 법으로도 사람을 가르친 적이 없다.”
“선사들은 모두 이 모양이라니까.”
대주 혜해를 찾아온 법사가 혀를 찹니다.
그러자 혜해가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법으로 가르치는가?”
“금강반야경으로 강의합니다.”
“이 경은 누가 말씀한 것이냐?”
“선사는 저를 희롱합니까?
어찌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인 줄 모른단 말입니까?”
“금강경에 이르기를
만일 여래가 말씀한 것이 있다 하면
이는 붓다를 비방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했다.
그러나 이 경을 붓다가 말씀한 바가 아니라 하면
이는 경을 비방하는 짓이다.
이제 너는 말해보거라.”
법사가 대답을 못하자 혜해는 한마디 더 합니다.
“만약 형체로서 나를 찾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발을 잘못 들여놓았으므로
여래를 볼 수 없다 하였다.
그럼 너는 어느 것이 여래인지 말해보라.”
“제가 그 문제에 부닥치니 오히려 미혹해졌습니다.”
“본래 깨닫지도 못했는데 어찌 미혹했다 하는가?”
“선사님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이 경전을 20번 이상 강의했어도 아직도 여래를 알지 못하는가?”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여래란 제법의 여실한 이치인데 어찌 이를 망각했단 말인가?”
이 법문은 더 이어집니다.
결국 법사가 혜해스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해
이 문답은 이른바 노파선,
즉 시시콜콜한 잘못을 다 짚어주는 선이 되고 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선승들이 결코 경전을 모르거나
외면한 분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혜해스님의 금강경 지식은
법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핵심을 짚어 경전을 인용할 정도로 밝았습니다.
스님은 경전에 적힌, 글자가 박힌 종이의 이면까지
꿰뚫어 보는 눈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법,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이 곧바로 여래임을 못 보면서
글을 외우고 강론을 펼치는 어리석음을 깨우치려 했던 것이죠.
혜해스님은 경전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도
결코 문자 해설의 길로는 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선의 길입니다.
법사가 말합니다.
“경문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여래는 제법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를 제가 깜빡 잊었습니다.”
“네가 그렇다는 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
“경문이 분명히 그러한데 어찌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까?”
“너는 여실한가?”
“그렇습니다.”
“목석도 여실한가?”
“그렇습니다.”
“너와 목석의 여실함이 동일한가?”
“다름없습니다.”
“너는 목석과 무엇이 다른가?”
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도대체 이 상황을 뭐라 말해야 하겠습니까?
--
“목석들이 말을 잊으니
빈 수레만 요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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