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위산이 낮잠을 자는데 제자 앙산이 들어왔다.
선사는 잠이 깨서 벽으로 돌아 누웠다.
앙산이 말했다.
“스님 왜 그러십니까?”
“꿈을 꾸고 있던 참인데 무슨 꿈인지 알고 싶은가?”
앙산은 말없이 밖으로 나가더니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말했다.
“스님 세수나 하시지요?”
위산이 세수를 하고 있는데 향엄이 들어왔다.
위잔은 향엄에게도 물었다.
“아까 꿈을 구웠는데 무슨 꿈인지 알고 싶나?”
향엄은 밖으로 나가 차를 달여왔다.
“스님 차나 한 잔 드시지요.”
위산이 혼잣말로 뇌까렸다.
“흠, 두 사람의 견해가 사리불보다 더 낫구나.”
뭔 낚시에 걸려야 해설이라도 할 것이 있는데
이런 경우엔 제가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저도 한 말씀 올릴까요?
“스님 제자들이 심심하니 심심하시죠?”
운암이 지장선사를 찾아왔다.
지장은 운암을 보더니 갑자기 활 쏘는 시늉을 했다.
운암은 한참 있다가 칼 빼는 신늉을 했다.
지장이 말했다.
“너무 늦었다.”
아예 걸려들지 않는 제자에 비하면
그나마 좀 낫긴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활 쏘자마자 칼을 뽑아 내쳤다면
일단 고사장 입구는 통과한 셈인데, 시험을 못 보게 생겼습니다.
청세라는 스님이 조산 선사를 찾아와서 말했다.
“청세는 외롭고 가난합니다.
스승님 제발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조산이 느닷없이 큰소리로 불렀다.
“청세 큰스님.”
청세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예.”
“천하의 명주를 석 되나 마시고도
아직 입술도 적시지 못했다 하느냐?”
성령의 술은 알코올 도수가 없어서 낌새를 알기는 힘듭니다.
이 술에 취해도 아무 느낌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성령에 취하라’는 성경 말씀도
여기서처럼 물론 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렇듯 낚시에 걸려들지도 않는 제자.
시험장 앞에서 주저앉은 제자
자격 시험 볼 상태도 안 되는 제자가 있으면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하렵니까?
이것도 선문답입니다, 답해 보시죠.
황벽이 어디를 다녀오자 백장이 물었다.
“어디를 갔다 오는가?”
“산 아래 내려가 버섯을 좀 따왔습니다.”
“산 아래에서 큰 벌레 한 마리를 못 보았느냐?”
“어흥!”
큰 벌레 대충은 호랑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황벽이 호랑이 소리를 내자
백장이 허리춤에서 도끼를 빼들고 달려들었습니다.
황벽도 백장을 덮치려 하자
백장이 웃으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백장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산 아래 큰 벌레가 한 마리 있으니
너희들도 잘 살피도록 해라.
나는 오늘 그놈에게 한 입 물렸다.”
이쯤 되면 이분들이 선 수행하시는 선사들인지
어린이집 다니는 유아들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매번 이런 식이었는지는 몰라도
기록으로 남을 정도면 좀 심했겠죠.
시험 문제입니다.
다음 중 내가 스승일 경우 선택할 제자는
1번 걸려들지 않는 앙산
2번, 조금 늦은 운암
3번, 아예 모르는 청세
4번, 선문답에 걸려든 나
선문답이 오고 가면
우리는 그걸 재미로 볼 것이 아니라 진중하게 봐야 합니다.
재미있는 듯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함정을 가지고 있기가 쉽습니다.
특히나 스승이 제자에게 당하거나
스승이 드리운 낚시에 전혀 걸려들지 않는
기계 높은 제자를 보면
마치 내가 그 제자인 듯 느껴지기 쉽지만
오히려 거꾸로 봐야 합니다.
소산이 암두를 찾아갔다.
마루에 앉아 있던 암두는 소산을 보자마자 고개를 떨구고 자는 체 했다.
소산이 가까이 가서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암두는 계속 자는 체 했다.
소산이 마루를 두드리며 암두의 팔을 흔들어 깨웠다.
“무엇인가?”
“스님 더 주무십시오.”
이 말에 선사가 크게 웃었다.
“내가 30년 동안 말타기를 익혔는데
오늘 당나귀에게 채였구나.”
제가 암두 선사였다면
팔을 흔들어 깨운 소산에게 한마디 했을 겁니다.
“도대체 계를 받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두드려 소리를 내고 흔들어 깨우고서는
오리발 내미는 짓거리인가?”
모든 선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행하는 침묵의 외침입니다.
스승을 통하기도 하고, 제자를 통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자기에게 날리는 화살이고 도끼이며 두드림입니다.
어떤 중이 귀종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내가 말해줘도 네가 믿지 않을까 무섭다.”
중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큰스님의 진실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네가 바로 부처야.”
큰 스님의 진실된 말을 믿는 것과
내가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은 같은 것일까요?
이 시험 문제의 답은 무얼까요?
질문했던 스님은 어찌 되었을까요?
어떤 중이 법안에게 물었다.
“저는 해초라고 하는데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부처란 어떤 겁니까?”
선사가 답했다.
“그대가 바로 해초로구나.”
질문했던 스님은 어찌 되었을까요?
내가 부처이든 해초이든, 답을 듣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만약 답에 답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육긍 대부가 남전에게 물었다.
“스님, 옛날에 어떤 사람이 병 속에서 거위를 키웠는데
거위가 자라서 병에 나올 수가 없게 됐습니다.
병도 새도 다치면 안 되는데, 어떻게 새를 꺼내시겠습니까?”
남전이 느닷없이 크게 불렀다.
“대부”
육긍이 대답했다.
“예”
남전이 말했다.
“나왔소.”
오늘은 답 대신 질문만 열심히 드립니다.
“스님, 아무것도 들어간 적이 없는데
이자가 꺼내려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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