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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다이아몬드 어프로치 (1/2)

Buddhastudy 2025. 3. 24. 19:16

 

 

[다이아몬드 어프로치] 한국으로 옮기면

금강석 방편이 될까요?

알마스의 책인 <늘 펼쳐지는 지금>에 소개된 [현존] 수행의 방법입니다.

 

책을 쭉 읽으면

찬찬히 이해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 내용입니다만

기존의 이른바 현존이라는 단어를 잘 쓰는 수행법들에 비해서는

어렵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출판사의 책 소개처럼

심리학 용어들과 새로 개발한 고유 용어들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수행 체계를

아주 거시적인 틀로 소개해 드리는 시도를 해왔고

이제는 조금 더 세밀하게 들어가서

하나씩 짚어볼 만한 주제들을 찾고 있습니다.

 

나름 통합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은 강한데

그럴 능력이 부족해서

여러 석학들에 의존해 방편에 가까운 것들을

소개해 드리고 있는 상황이죠.

 

이번 동영상도 그런 시도 중의 하나입니다.

알마스의 <늘 펼쳐지는 지금>에 나오는 접근 방법들은

정말 말 그대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너무 잔잔해서

이렇게 해도 될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평이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사용되는

동일시, 현존, 경험, 저항

받아들임, 자각, 용기, 상호 연결성,

증오, 무지, 앎과 모음, 존재와 비존재 같은 용어들은

우리가 다른 자료들에서도 쉽게 접하는 개념들입니다.

 

알마스의 영적 수련의 배경 자체가

심리학, 티벳 불교, 수피즘, 그루지에프, 위빠사나라고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접근 방법이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이유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서 그나마 가장 어려운 용어는

[에센스]라는 말인데,

이것을 선불교의 [성품]이나

기독교의 [그리스도] [성령]으로 바꾸면

그다지 어렵지는 않습니다.

 

알마스는 선천적인 본성의 핵심을 [에센스]라고 하며

이것이 [에고]라고 부르는 구조물에 의해 덮여버린다고 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에센스를

지지하지 않고, 인식조차 하지 않는 세상에서

에센스를 보호하기 위해, 에고가 발달한다고 합니다.

 

에고의 층들이 발달하면서 [에센스]의 본성은 더욱 감춰집니다.

참된 자기를 자각하고 해방되는 과정은

이런 구조물들을 무너뜨리면서 에센스로 연결되는 과정이고

이런 과정을 위해 제시되는 것이 바로

방편에 해당하는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입니다.

 

자고로 수행법이란

이렇게 큰 얼개가 먼저 나와야 하는 법인데

알마스의 그것은 큰 얼개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인터넷 서점에 소개된 책의 제목을 보는 것으로

수행법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기는 한데

제 경험으로 보면 너무 쉽게 설명돼 있어서

마치 그런 수행법의 적용마저 쉬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점이 단점일 정도입니다.

 

다이아몬드 수행법이 궁금하다면

그에 대한 이해는 책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고

우리는 방편들 중에서

여러 가르침에 공통으로 나오는 개념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골라낸 용어와 문장이

다이아몬드 어프로치를 정리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책을 정리해 수행 체계를 제시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책 한 권 읽었다고

그 방편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고

다만 제가 스스로 적용하면서

잘 되어서 쉽게 이해했거나

잘 되지 않아 몇 번씩이나 고민했던 것들을 위주로 발췌해 봤습니다.

 

 

--실제로 존재하기

실제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어떤 반영된 이미지가 아닌 진정한 자신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각이라는 말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경험을 이해하는데

이것조차 우리가 아는 것처럼 천차만별의 수준이 있습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죠.

 

알마스는 여기서 방편으로

[있는 그 자리] [경험 관찰하기][그것에 대해 묻기 시작하기]를 제시합니다.

 

실제로 생각하기는 우리가

이미 본 깨달음 단계의 범부각 수준에서는

지속되는 반성을 의미합니다.

 

범부각이 있다는 것과

생각 때문에 내가 고통을 받고 있고

그래서 거기까지는 내 책임이라는 것을 이해한 단계이므로

자각 자체가 반성적 성격을 가지게 되죠.

 

알마스가 말하는

자기의 본성대로 존재하는 참 의미는

이것보다는 조금 더 높은 수준

상세각이나 수분각에서는

자기 본성에 대한 이해에 해당합니다.

 

이런 수준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초점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현재 상태나 행위에 대해 그 성격을 모르면

너무 막연한 수행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알마스는 경험에서 손을 떼고, 애씀을 멈추는 방편을 제시합니다.

마음이 내면의 경험을 조작하려는 것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놓아두면

자연스럽게 자각된다는 것이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수행 방편입니다.

좋고 싫고 하는 선택이 없고, 그저 내맡김을 통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쉬운 수행이 아니죠.

 

나눌 수 없는 것이 참 본성이라서

드러남은 하나의 과정이고

수행이라는 것이

깨어 있고, 현존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애씀을 멈춘다는 것은

상당한 고통이 수반되는 도전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쉴 새 없이 실패하고

다시 마음먹고, 도전하고, 부딪히고, 깨지고, 반복해야

겨우 어느 정도 흡족한 수준에 이릅니다.

이것조차 에고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이한 용어와 문장으로

이렇게 서술해 놓은 것을 보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받아들이면 되는구나하고 생각하는 것은

상황을 간과하는 것이기 쉽습니다.

 

물론 알마스도 말합니다.

현존은 나눠질 수 없고

일어나는 일은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저항하지 않을 때 본성으로 존재한다.

진실로 존재함은 일종의 죽음과 같다.”

 

수행의 측면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평화롭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향해 열기

자기방어 포기, 자기주장 철회라는 익숙한 수행 원리들이

여기도 나옵니다.

 

방어는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기에 대한 방어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방어할 수 없습니다.

방어한다는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통해 무언가에 방어할 때마다

저항에 따르는 의식은 둔해집니다.

 

그 반대는 뭘까요?

방어를 내려놓으면

상처받기 쉬운 상태의 느낌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다라고 알마스는 말합니다.

 

카발라에도 나오는 능동성은

바로 방어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카발라의 반응성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방어하는

에고의 체제를 가리킵니다.

 

반응성을 내려놓기가

바로 상처받기 쉬운 상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것 역시 말은 쉽지만 적용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알마스는 [경험의 두 구성 요소]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제 경험으로는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좀 힘들었습니다.

 

그렇죠.

자각도 힘든데, 자각 내용을 분류하는 거라니 무슨 난해한 작업일까요?

어쨌든 개념적으로 주요 구성 요소는

개인적인 경험 안에서 일어나는 중심 사건이고

부차적 구성 요소는 중심 사건에 대한 반응과 응답입니다.

 

쉽게 말해 뭔가 [] 하는 것이 중심 사건이고

그것에 대한 [생각][감정]부차적 구성 요소입니다.

가능하면 부차적인 것에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물론 모두 자각의 대상입니다.

 

알마스는 이런 [경험의 단계를 3수준]으로 분류합니다.

우리는 이미 대승기신론의 5위를 깨달음 단계로 상정한 바 있어서

이 부분은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1단계입니다.

1단계는 현존의 발견을 향해 깊어가는 자각과 탐구 수준입니다.

여기서는 감각, 감정, 생각이 경험과 탐구의 대상입니다.

전형적인 범부각 수준의 공부에 해당합니다.

열심히 자각하는 것이죠.

 

2단계는 경험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현존을 드러내는 단계입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만

책을 통독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이렇게 발췌한 상태로 보니까 어렵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상사각 수준의 생각과 본질로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상태에서는

경험의 중심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생깁니다.

수분각 수준에서 성품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현존이 드러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3단계는 자발적으로 펼쳐지는 현존 자체가

모든 경험이 일어나는 장임을 인식하는 상태입니다.

이 지점은 스스로 몸과의 동일시를 벗어나

의식을 누리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마스의 이 표현도 꽤 추상적이어서 어렵고, 저희 표현도 그렇습니다.

체험을 전달하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나 비이원성의 영역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늘 곤혹스럽습니다.

 

 

--장애물 다루기

수행에서 가장 요긴한 것이

바로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처리하는 방법이죠.

알마스의 장애물은 무지, 욕망, 공격성입니다.

물론 불교의 탐진치와 같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1단계의 간단한 장애물들은

오히려 공격성의 힘을 이용해 물리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거친 생각이 들어오면 그냥 이렇게 말하는 거죠.

꺼져라, 됐다.”

 

조금 미세한 장애물들은 그것을 일단 자각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용해된다는 것이 알마스가 제시하는 방편입니다.

 

자각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각각의 의식 수준에서

그 대상과 내용이 차이가 있고

상황과 상태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자각과 이해는

따로 주제를 편성해도 될 정도의

중요한 이야기가 많은 영역이기도 합니다.

 

알마스의 3단계, 즉 비이완 수준에서는

수퍼 에고의 공격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장애물들은 용해됩니다.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에서

망치로 열심히 이곳저곳을 두들기던 것을

아예 철판을 올려놓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