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경험은 다름 아닌 참본성이다.]
알마스의 다이아몬드 어프로치는
철저하게 일상적 체험을 대상으로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나갑니다.
그런 점에서 경험을 통하지 않은 것을 활용하는 것은 없으며
다만 그 경험에 대한 수행자의 관점이 바뀌는 지점을
명확하게 표시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이 바로, 참 본성이라는 점도 그렇습니다.
“경험의 비이원적인 바탕을 알면
오직 현존, 참 본성만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은
진화에 대한 앎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고
“참 본성은 가장 작은 입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본성으로 드러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로 연결된 성품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깨달음의 상태에서 경험하는 의미는 실제의 현존이다”라는 말
즉 사물의 의미란
그것의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와도 통하게 됩니다.
[진실하게 받아들이라.]
경험의 거부는 곧 자기 거부입니다.
이른바 받아들임이라는 것은
속의 거부를 숨기고 체념하는 것이나
좋은 것에 대한 집착과는 다르죠.
우리가 수행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받아들이라고 하면
그것을 체념과 비슷한 뉘앙스로 받아들이고
또한 나한테 맞는다는 핑계로
하고 싶은 수행만 골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받아들임은
관여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자각입니다.
[경험을 변화시키려는 내적 행위가
참 본성의 현현을 막는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적극적인 행위에 해당합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수행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데
경험에 대해 이런저런 간섭을 하면
참 본성을 지각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고 하는 알마스의 언급은
수행을 통해 변화하고 성취하려고 하면
참 본성과 방향이 달라진다는 언급에서 강조됩니다.
이것은 켄 윌버가 말한
“비이원의 기이한 성질”과도 통하는 것으로
뭔가를 바꾸려고 하고 이루고자 하는 그 시도는 본성
즉 비이원에서 물러나는
비이원을 밀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원래 있는 것, 원래 있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참본성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꿔 보려는 어떤 행위는
뭔가 이루려는 그것과는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죠.
이 부분이 사실상 가장 어려운 수행의 초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내적 행위는 본성을 공격하는 폭력이고 증오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스스로의 힘을 드러내며 무지를 소멸시키는 것인데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에서
우리는 내적 행위를 자각하기 어렵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결국 단순하게는 생각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지침으로 귀결되는 것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후천적 무지와 선천적 무지]
무지에 대해 알마스의 다이아몬드 어프로치는, 두 가지를 설명합니다.
굉장히 역설적인 표현이라 잘 봐야 합니다.
즉 후천적 무지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살면서 쌓아온 모든 지식은
실제가 아니거나 근사치일 뿐이라는 점에서 무지에 해당합니다.
개념, 관념, 지식이 사실상 무지라는 겁니다.
선천적 무지란
자신이 참 본성임을 모른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살면서 배워온 것들은 후천적 무지이고
내가 참 본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선천적 무지까지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무지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즉 후천적 무지를 발달시켜서 그것을 작업함에 따라
참 본성을 경험하기 시작해
참 본성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려면 개념 관념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마스는 후천적 무지를 발달시킨다고 표현하는 점이 독특합니다.
[마음의 필터에서 자유롭게 되기]
여기서는 마음의 여러 작용에 대한 개념들이 나오는데
많은 부분이 다른 깨달음 전통의 개념들과 같습니다.
마음이 일종의 필터라고 선언한 전부터가 그렇죠.
(그리스도 요가) 조건화에 대해 알마스는
“축적된 신념과 이해를 가지고 지각함으로써
경험의 자발성에 간섭한다”고 표현합니다.
또한 “경험은 기억, 사고 정보에 따라 일어나는 반응이다”라고 한 부분은
(그루지에프) 반사작용이라는 개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반응에 대한 간섭을 멈춰야
경험에 씌워진 여러 층의 베일을 인식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는
생각의 층층에 쌓인 얇은 막을 베일로 설명합니다.
또한 “경험은 대부분 구상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개인의 고유한 생각의 틀에 해당합니다.
경험이 구상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부분은 중요한 관찰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추상화된 개념을 사용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는 이미지를 따로 만들어 고유화하는데
이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개념이 80억 분의 1에 해당하는
한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추상적 개념과 구상적 경험이 만나
개인적 조건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생각의 틀을 형성합니다.
“경험이 참으로 직접적이 될 때
우리는 하나 됨을 우리의 본성으로 경험한다.
이 나는 바로 현존이고 자각이며 참 존재의 명료함으로 이루어진
살아있는 의식이다.”
이런 말이 처음 접했던 저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문장인데
이제는 이유를 알죠.
직접 보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경험이 참으로 직접적이 된다는 것은
내가 곧 경험인 상태, 비이원의 체험을 말합니다.
또한 내가 현존이고 자각이며 살아있는 의식이라는 말도
같은 상태입니다.
물론 수행 초기에서나 과정에서도 이런 체험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 말의 뜻이 완전하게 이해되고 체험되려면
존재의 특성이 이 상태로 진입해야만 합니다.
다만 이런 말을 수행 지침에 올려놓은 이유를 저는 이해합니다.
미묘하지만 경험이 직접적이 되는 상태를
우리는 수행 과정 중에
정묘적으로 또는 원인적인 의식 상태로 체험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의식”이라는 체험도 그렇습니다.
완전하지 않더라도 체험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이런 말들을 알고 있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물론 말만으로 이해했다고 믿는 것은 역으로 장애가 됩니다.
“구상화된 것에 동일시하며 덫에 갇힌다.”
수행에서 중요한 장애가 바로
자신이 느낌 체험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느낌은 일시적인 파도일 뿐인데
그 상태와 동일시하면 갇혀버린다.
허나 경험을 구상화하면 마음이 그것과 동일시한다”거나 하는 언급이
바로 이것과 연결됩니다.
동일시라는 것이
나 자신을 무언가와 연결시키려는 정신적 행위인데,
이것은 분리를 믿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에고의 경험은
동일시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행위자이든, 몸이든, 감정이든, 체험의 현연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동일시를 해체하기]
동일시를 해체하는 방법 역시 그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수행의 대부분은 사실상 무지를 걷어내는 것이고,
무지를 걷어내는 것의 대부분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먼저 개념을 이해하고, 구조와 원리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벌어진 상황에 대해 인지 지능을 발휘해야 하죠.
특정한 경험 내용에 의식을 달라붙게 하는 내적 행위를 인식하는 것도
이해하기 일부입니다.
결국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집착, 동일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용해되도록 허용하는 것이죠.
이해하고 나면 동일시를 믿지 않고 따라가지도 않습니다.
불필요하게 밀쳐내는 내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움직이면 고통인 것이 행위의 질서입니다.
[늘 존재하는 경험의 특성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라.]
“에고는 자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구조물을 설치해
익숙한 내재적 지속성에 의지한다.”
우리는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특별한 패턴에 집착해
자신의 움직임과 펼쳐짐을 방해한다.
좋아하는 것을 보존하고 싫어하는 것을 바꾸려는 시도는
시간 개념에 묶여 있다.
순수한 자각은 일상적인 자아 없이 그저 일어나는 경험이다.
수행의 과정에서 우리는 무상의 본성을 배웁니다.
불교의 삼법인을 통해 지혜 수행의 첫걸음을 뗀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이치와 원리입니다.
알마스의 말처럼
“참 본성의 본질은
역동적인 현존이며 끊임없는 변형과 응답”이기 때문에
그 무엇이든 고정된 것으로 집착하게 되면
탐진치가 발생하는 좋은 조건을 만들게 됩니다.
자신에게 발생하는 그런 패턴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한 수행입니다.
“움직이며 변화하는 우주 안에서
각자는 자신만의 경험을 하고 있다.”
우리는 수행 과정을 통해 나라는 역사를 체험합니다.
처음에는 애고를 체험하지만 나중에는 성품을 체험합니다.
그러면서 “영이 지금 여기서 이 체험을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깨닫는 순간을 맞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체험들이 쭉 이어지는 의미도 체험하게 됩니다.
거창하게 신의 뜻이라고 하지 않아도 정말 감격적인 체험입니다.
알마스도 이 부분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인식하고 그것과 함께 존재하며
자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의미일 뿐이다.
당신의 삶은 경험 우주 안에서
서로 동시에 움직이며 연결되는 끈이다.”
우리는 이미 윌버- 컴즈 격자를 통해
의식수준의 거대한 진화에서 우리의 좌표를 보는 법을 봤습니다.
에마스 역시 같은 언급을 합니다.
[지각하는 자각과 인지하는 자각]
찬본성을 자각하는 능력이
인간의 인지하는 지각보다 더욱 근본적이라고 알마스는 말합니다.
이렇게 인지 지각을 넘어서
본래의 순수 자각에 도달하고
인지 자각을 도구로 쓰게 되는 상태가 깨달음의 상태입니다.
마음이 없을 때는 순수 자각만이 존재하는 앎 이전의 상태인데
이것은 바로 성품을 보고 체험하는
깨달음 이후에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해서 간략하게나마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에 나오는
몇 가지 개념들을 살펴봤습니다.
비슷한 수행법을 보면서 드는 느낌은
심리학의 발견들을 수행 방편과 결합하는 방식이
어떤 면에서는 효과적이지만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헷갈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체험이 없는 상태에서의 막연한 개념은
오해를 빚기 쉽다는 점에서
여러 수행법을 비교해 회통해 보려는 작업은
결코 소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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