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이 차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 관념, 개념이
차별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차별적인 생각. 관념, 개념에서 벗어난다.”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서광 스님
상사각은 대승기신론 5위 중 두 번째 단계입니다.
한자 뜻 그대로 ‘깨달음과 비슷하다’, 유사한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깨달음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런 단어를
대승기신론에서 설정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승기신론의 설명을 한 번 볼까요?
“거친 분별과 집착하는 모습은
떠났기 때문에 상사각이라고 한다.”
‘거친 분별과 집착하는 모습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아직 미세하지는 않지만
큰 것들은 대충 제거된 상태,
혹은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개략적으로 정의하면
공부를 시작하고 뭔가 맛을 좀 봤다,
즉 불각 상태에서 고통을 겪던 거친 분별과 집착을 떠났고
큰 개념으로는 진리에 대해 이해하는 상태라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그럭저럭 몇 년 공부했으니 상사각이다” 이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뭘 알았나 살펴봐야 합니다.
“관하는 지혜를 가진 이승과 초발의보살과 같은 사람들은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으면
생각에 이상(異相)이 없게 된다.”
차근차근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여기서 이승(二乘)이란
성문과 연각, 공부를 하고 있는 수행자라는 의미이고
초발의보살은 이미 공부에 발심을 해서 어느 정도 수준이 된 사람이라는 뜻이니
바로 어제 입문한 초심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초심자가 아닌 수행자들,
그것도 어느 정도 공부에 진척이 있는 수준에서
상사각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바뀐다,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바뀌는 것의 차이를
확실히 이해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생각과 생각의 차이에 대해
이해를 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생각은 실재가 아니라 생각일 뿐이니
그 생각이 무엇을 지시하고 있든
생각은 그냥 생각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때문에 이상,
즉 생각에 대한 헛된 망상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생각에 대한 헛된 망상을 이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주로 탐진치로 표현되는
욕망, 분노, 무지, 자만, 의심 등을 말합니다.
이런 생각이든 저런 생각이든 모두 생각일 뿐이라면
그 내용이 욕망이든 분노이든 의심이든
그저 생각일 뿐이어서
오히려 차별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도 뭘 깨달았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죠?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이렇게 수준에 따라 다른 것을 깨우친다는 가이드라인을 주는데
그것만으로는 해당 수준에서 뭘 어떻게 깨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볼까요?
사람은 생각을 합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너무 두루두루 쓸 수 있는 넓은 범위의 뜻을 가지고 있죠.
자세히 보면 [사람의 생각]은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
감각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지각]
지각에 대해 좋고 싫음을 느끼는 [감정]
그 감정에 연해 일어나는 [상상]
상상을 종합해 틀을 만드는 [사상]에 이르기까지
꽤 넓은 범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각은 물리적 신호를 감지하는 것이고
사상은 지성이 필요한 지식체계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구분해서 차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별상 조차도 하나의 생각이긴 합니다만
저급한 감각과 고도의 지성이라는 구분을 할 수 있죠.
감각, 지각, 감정, 상상, 사상으로 대충 수준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걸 죄다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상사각 수준에 이르면 이것이 보입니다.
실제로 있는 것, 일어나는 일, 벌어지는 사건과
그것을 부르는 지칭, 이름, 표현, 설명에 해당하는 생각이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연상하는 것은
그냥 언어,
즉 생각일 뿐입니다.
실재는 그것과 상관이 없어요.
눈앞의 그 장미꽃이 아니라면
그건 그냥 장미꽃이라는 이름일 뿐이에요.
우리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대하고 있어요.
그렇게 이름을 지어놓고 그것에 대해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상사각에서 그 믿음이 처절하게 깨어집니다.
이름은 이름일 뿐입니다.
그것은 그냥 생각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지금까지 철썩같이 믿어오던 생각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됩니다.
생각을 믿지 않게 되면
이상(異相), 즉 욕탐하고, 분노하고, 의심하고, 자만하는 그 생각들에
따라다니지 않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변화입니다.
범부각은
생각을 발견하고
나쁜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깨달음이었습니다.
상사각은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그냥 그것은 모두 생각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일체유심조에 발을 담근 겁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앎입니까?
이렇게 상사각은
생각의 허상을 완전히 이해하는 중요한 단계입니다.
그 많은 문제들이 모두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고민이 와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확연히 줄어들죠.
...
물론 완전하지 않아서
우리가 지고한 깨달음이라고 여기는 수준은 아니지요.
범부각 수준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는
완연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죠.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도
구도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도
지관수행을 열심히 하면
상사각 정도는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상사각을 기독교식으로 바꿔서 말해보면
탐진치의 에고를 버리고
성령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하는
발심이 가능한 수준이라는 겁니다.
모든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매사에 이런 식으로
“에고냐 성령이냐”를 선택할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크나큰 삶의 힘입니다.
액면 그대로만 보면 거의 성인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 대승기신론의 상사각을 풀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상사각에서는
생각의 차별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결국 현상과 본질의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생각이라는 것에는 차이라는 것이 없다고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뀌고
달라진 것에 대해 분별해서 심판하지 않게 된다.
분별과 심판이 일어나지 않으면
비교하고 선택하여 고집하지 않게 되니
결국 분별에 따른 집착이 사라진다.
모습으로만 보면
궁극의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래서 궁극의 깨달음과 유사한 모습을 갖추었다는 의미에서
상사각이라고 부르는 깨달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직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체달하지 못한 깨달음은
유사한, 비슷한 깨달음이라고 해서
상사각이라고 한다.”
- 대승기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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