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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선과 깨달음, 쇠가죽을 뚫어야

Buddhastudy 2025. 5. 19. 19:47

 

 

  • 교와 선의 관계: 교는 깨달은 후 가르침을 설명하는 것이고, 선은 직접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둘 다 방편이며, 결론은 본래의 나를 아는 깨달음입니다 [01:08].
  • 생멸과 정멸: 모든 행은 무상하며 생멸의 법인데, 생멸이 멸하면 적멸함이 즐거움이 됩니다 [01:28].
  • 인도 선의 문답: 17살의 몸과 하얀 머리털은 생멸의 드러남이지만, 생멸을 멸하면 마음은 깨끗하고 고요한 성품으로 가득해집니다 [02:57].
  • 경전 멀리하기: 수분각에 이르는 경지에서는 개념 관념이 극도의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경전을 멀리해야 합니다 [04:06].
  • 돌파의 중요성: 생각을 넘어서는 곳에서는 끈기와 용기가 필요하며, 쇠가죽을 뚫어야 합니다 [07:18].

 

 

동인도 국왕이 27조 반냐다라 존자를 청해 재를 올렸는데

존자는 독경을 하지 않았다.

왕이 물었다.

왜 경을 잊지 않으시오?”

저는 숨을 들이쉴 때 세상에 머무르지 않고

숨을 내쉴 때도 인연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읽은 경이 백천만억 권입니다.”

 

중국 선의 초조를 달마라고 하는데,

각종 기록에서는 달마가 인도 선의 28대조라고도 합니다.

27조 반야다라는 달마의 스승이었습니다.

달마의 9년 면벽이 경을 읽는 일이었군요.

 

교선일체라고 하면 교와 선이 같이 가야 한다는 뜻이지만

교는 깨닫고 나서 가리킬 방법을 만들게 된 것이라

일종의 설명에 해당합니다.

이해하자는 것이지요.

 

설명을 듣고 원리를 이해했으면 직접 보려고 해야 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선입니다.

교와 선이 모두 방편이고

그 결론은 본래의 나를 아는 깨달음입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

-모든 행은 무상하니 바로 생멸의 법이다.

-생멸이 멸하고 나면 적멸함이 곧 즐거움이 되리라.

 

인도선의 초조를 가섭이라고 합니다만

가섭에게 정법안장을 전한 분이 세존이니

세존이 선불교의 원조입니다.

 

우리나라 음식점 앞에 강조하는, 진짜 원조가 되겠습니다.

세존의 선법은 모든 생명을 멸해

적멸의 위락이 든다는 간결한 결론입니다.

팔만대장경의 원조가 이렇게 간결하다는 것이

좀 어리둥절할 수도 있겠습니다.

 

상나하수 존자가 우바국다에게 물었다.

너희 몸이 17살인가? 성품이 17살인가?”

스님이 머리털이 이미 흰데 머리가 흰 것입니까? 마음이 흰 겁니까?”

나는 단지 머리털이 흴 뿐, 마음이 희지는 않다.”

그러자 우바 국다가 말했다.

저도 몸이 17살일 뿐, 성품이 17살은 아닙니다.”

 

인도 선의 3조 상나하수와 4조 우바국다의 대화입니다.

흔히 접하지 못하는 인도식 선문답인데

아주 고결하고 정직하게 느껴집니다.

 

생멸을 멸하여 적멸의 위락을 얻는다는 교법을 들었으면

생멸을 멸하는 방편인 선을 바로 써서 직접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대놓고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17살의 몸과 하얀 머리털은 생멸의 드러남이지만

생멸을 지우면

마음은 깨끗하고 고요한 성품으로 가득해집니다.

적멸위락

즉 니르바나입니다.

 

굉지의 도량에서는 좌선 외의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선사는 늘 경을 읽었다.

승이 물었다.

우리도 스승님처럼 경을 읽으면 안 됩니까?”

소가죽을 뚫을 정도면 된다.”

 

원리와 이치를 이해하고

선의 길을 걷는 이에게

경전을 멀리하도록 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지점, 즉 수분각에 이르는 경지에서는

개념, 관념이 극도의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가 말하는

나라는 느낌’, ‘내가 있다는 느낌이 바로 수분각의 직입 지점인데

마하라지 역시

내가 있다는 이것 말고, 모든 생각을 거부하라고 말합니다.

 

 

약산이 오랫동안 법좌에 오르지 않아 원주가 청했다.

선사가 종을 치게 하니 대중들이 모였다.

선사가 법상으로 올라 잠시 가만히 있다가

바로 내려와 방장으로 돌아갔다.

원주가 뒤따라가 물었다.

설법을 해주신다 하더니, 어째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경에는 경사가 있고 논에는 논사가 있는데

어찌 나를 괴이하게 여기는가?”

 

선사의 선에는 경과 논이 따라올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듣는 자의 상태에 달렸습니다.

이해가 부족하면 이해를 채워야 하고

각성이 부족하면 침묵을 채워야 합니다.

 

종을 치고 법상에 올라가 머무르다 내려오는 것이

바로 설법입니다.

이런 공안을 통해 선불교는

직입해야 할 수행자들에게

경론에 의지하지 않아야 할 지점을 설명한 것이죠.

 

 

무엇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현소 선사가 답했다.

이해하는 것이 곧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오,

의심하는 것이 곧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해로는 안 되고 의심해 치고 들어가야 하는

수분각의 이 지점은

구르지예프의 표현으로는

계단을 올라 길에 들어서는 상황입니다.

 

계단을 오르는데

계단 아래를 생각하거나

계단 위의 길을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계단의 구조와 재질을 분석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올라서야 합니다.

 

 

백거이가 태수로 부임해 도림을 찾았다.

선사께서 머무는 곳이 너무나 위태함이다.”

태수가 말하자 선사가 답했다.

태수의 위험은 더욱 심하오.”

제자는 지위가 강산을 진압하고 있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습니까?”

장작과 불이 서로 사귀듯이

식의 성품이 멈추질 않으니 위험치 않소이까?”

 

생각을 넘어서는 곳에서는

끈기와 더불어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돌파라고 부릅니다.

쇠 죽을 뚫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뭇 선행은 받들어 행하시오.”

세 살짜리 아기도 그런 것을 알겠습니다.”

세 살짜리도 말은 할 수 있으나 여든 노인도 행하지 못하오.”

 

여든 노인이 3살짜리 말을 하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