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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선과 깨달음, 간절한 마음 하나

Buddhastudy 2025. 5. 14. 19:10

 

선과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관심과 집중의 중요성: 선과 깨달음을 이해하려면 오랜 시간 관심을 갖고 집중해야 합니다 [00:26]. 관심이 흐트러진 사람에게는 방학이 약이 될 수 있지만, 수행은 오직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01:10].
  • 본질을 꿰뚫는 지혜: 위산과 앙산의 대화를 통해 본질을 보고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01:27]. 앙산은 위산에게 본체는 보고 작용은 깨닫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위산은 앙산의 말에 밥값을 했다고 칭찬합니다 [02:10].
  • 소통의 중요성: 동산과 우남의 대화를 통해, 자기 말을 듣지 못하면 남의 말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03:15]. 산천초목이 말을 하는 이유는 사람이 듣기 때문이며, 사람이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자기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03:27].
  • 나눔과 배려: 노승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에게는 항상 음식이 부족하지만, 나누고 배려하면 남는다는 교훈을 전달합니다 [03:58]. 또한, 자신이 들을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소용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04:40].
  • 주체적인 깨달음: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경전이 되어야 하고, 화두를 푸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화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05:00]. 스승은 가리키는 사람일 뿐이며, 직접 보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가리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06:01].
  • 간절한 마음: 선은 꾸준하고 순수하며 진지한 애정과 같으며, 언제나 젖먹이를 떠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06:48].

 

벼는 익었느냐?”

아직 타작을 못했습니다.”

 

선과 깨달음을 쭉 이어서 보고 들은 분은 금방 이해할 겁니다.

홍인과 혜능 사이에 오고 간

저 짧은 몇 문장의 뉘앙스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말이죠.

 

저 대화의 뉘앙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꽤 오랜 시간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느껴본 결과입니다.

그래서 알 수 있는 것이지

지나가는 사람에게 갑자기 들이대면 황당할 겁니다.

 

 

스님 진정한 불법이 무엇입니까?”

임제가 느닷없이 뺨을 갈겼다.

뺨을 맞은 승이 얼빠진 얼굴로 임제를 쳐다보고 있자

옆에 있던 승이 말했다.

법문이 끝났는데 왜 절을 하지 않나?”

 

관용구가 아닌 이상 저런 상징적인 질문에

걸맞은 대답을 하려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집중을 해야 가능합니다.

관심이 흐트러진 이에게는

방과 할이 그나마 빠른 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수행입니다.

수행은 그것만 말하고,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모두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

선이 칼끝을 걷는다는 이유도 같습니다.

 

위산이 차밭에서 앙산을 불렀다.

혜적아, 어디에 있느냐?”

, 저 여기 있습니다.”

어찌 네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느냐?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앙산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차나무를 흔들었다.

위산이 대꾸했다.

너는 작용만 알고 본체는 보지 못했구나.”

그러는 스님은 어떻습니까?”

앙산이 말을 이었다.

스님은 본체는 보고 작용은 깨닫지 못하셨군요.”

위산이 앙산의 말에 큰소리로 웃었다.

네가 오늘 밥값을 했다.”

 

항상 귀 기울이는 이에게는 관용구가 따로 없습니다.

제일구가 모든 것을 다 대체합니다.

마치 젖먹이 아이를 잠시 강보에 두고

일을 하는 엄마처럼 마음은 늘 거기에 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을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알려줘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뭐가 되었든 기다렸다는 듯 답할 수 없다면

한눈을 팔고 있는 것이 선입니다.

 

 

동산이 운암에게 물었다.

스님, 초목의 법문은 누가 듣습니까?”

초목의 법문은 초목이 듣는다.”

스님께서는 초목의 법문을 듣습니까?”

내가 들었다면 그대는 내 법문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저는 스님의 법문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사람의 법문도 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초목의 법문을 듣겠다는 것인가?”

 

산천초목이 말을 하는 이유는

사람이 그것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한 사람이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이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의 말을 듣지 못하면

남의 말도 듣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의 말도 듣지 못하고, 초목의 말도 듣지 못하며

오직 자기가 계속 말을 할 뿐입니다.

 

선객 하나가 절에 와서 스님들에게 문제를 냈다.

집에 작은 솥이 하나 있는데

떡을 찌면 3명이 먹기에는 부족하나

천 명이 넘으면 남으니, 그 이유를 아시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멀찌감치 앉아 있던 노승이 답했다.

자기 배만 채워본 이에게는 항상 음식이 모자라는 법이오.”

그렇죠, 다투면 부족하고 사양하면 남습니다.”

노승이 선객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큰 떡이 뭔 줄 아시오?”

선객이 멈칫하며 대답하지 못하자 노승이 말했다.

입 안에 있는 떡이올시다.”

 

자신이 들을 수 있고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소용이 없는 것들일 뿐입니다.

늘 자기 말로 배가 부른 이는

사양할 수도 없지만, 또한 먹을 수도 없습니다.

떡을 먹으려면 입안에 넣어야 하고

입안에 넣으려면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경전이 되어야 합니다.

화두를 푸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화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아무아무라 합니다.”

그대는 나를 아는가?”

분명합니다.”

 

백장이 불자를 세워 들고 말했다.

그대는 이 불자를 보는가?”

봅니다.”

스님께서 문득 말을 그쳤다.

 

귀 기울이던 자가 들을 때면 그가 곧 들음이 되고

주시하던 자가 보면 그가 곧 봄이 됩니다.

이럴 때 스승도 눈이 멀고 귀가 먹습니다.

 

스승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가리킨 것을 직접 보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가리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승도 함께 봅니다.

 

 

운문이 주장자를 잡고 한 스님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주장자입니다.”

지옥에 떨어져라.”

 

스승은 가리키는 것을 안 보고

가르치는 것을 입에 무는 제자를 정확히 읽어냅니다.

가리키는 것을 끊이지 않는 주시로 지켜본 이와

사방팔방으로 시선이 돌아다니는 이를 구분해 냅니다.

 

선을 칼끝이라고도 하고,

간절할 절 자 하나면 족하다고도 합니다.

그것은 꾸준하고도 순수하면서 진지한 애정

언제나 젖먹이가 자기 존재를 떠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오늘 이전은 묻지 않겠다.

오늘 이유에 대해서 누가 말해보라.”

대답이 없자 운문이 말했다.

항상 좋은 날이지

 

문 닫으면 흐린 날, 문 열면 맑은 날

마음 열고 닫는 문 없으면 항상 좋은 날.”